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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궁예

이재범 지음 | 푸른역사
제1장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제2장 서자 궁예, 수원승도 궁예, 호족 궁예우리나라 역사에서 후삼국시대가 가장 역동적인 시대이며 이 시기에 등장한 호족들은 '새 역사를 열고자 한 동반자적 관계에 있는 영웅들'이다. 이들 호족들의 대표주자격인 왕건, 궁예, 견훤은 중국의 조조, 유비, 손권이나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에 비교될 만한 지론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역사관은 지나치게 이긴 자 중심으로 서술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왕건을 '좋은 놈'으로 만들기 위해 궁예와 견훤을 죽이는 역사서술이다. 일반적으로 궁예는 신라의 왕족이면서도 소외된 삶을 살게 되면서 반항적이고 비정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궁예에 대한 선입관을 짧은 시간 내에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왕건을 미화하기 위하여 잘못 염색된 궁예에게 덧입혀진 옷들을 벗겨내 보기로 하자.
▣ 유용한 사이트http://myhome.hananet.net/~sangjoon/document/wanggun.htm 고려 태조의 앞선 궁예의 생애http://www.kbs.co.kr/drama/king/history.htm 태조 왕건 연보http://mahan.wonkwang.ac.kr/source/korsasang/06.htm 궁예의 미륵사상쇠둘레, 곧 철원은 두 눈으로 보기에도 넓고 큰 세상을 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궁예가 이상사회의 꿈을 펼쳤던 터전이다. 그는 한 눈만으로도 두 눈 가진 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이상세계를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패자로 만들었고, 역사는 그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잔인한 정신이상자로 서술했다.

궁예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궁예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세계에 상당히 근접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궁예의 실패는 소중하다. 궁예는 우리에게 영원무궁한 유토피아의 실현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피안에의 도달이 얼마나 힘든지를 가르쳐 준 것이다.



궁예 찾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관련 자료가 고의적으로 인멸 또는 변조되었다는 데 있다. 과장과 변조가 심한 궁예 관련 자료에서 제대로 된 사실을 추출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현장에서 수집한 자료는 대부분 구전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의 본질이 바뀌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그대로 믿을 수도 없다.



삼국사기나 제왕운기 등의 역사서에서 궁예는 포악하고 방자한 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의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미완성 소설이나 김동인의 《진헌》과 같은 소설 속에서 그려진 궁예의 모습은 민심을 얻어 왕위에 오른 뛰어난 인물이라는 표현들도 자주 나타난다. 단재는 궁예를 미래의 희망인 미륵으로 만들고, 조선의 왕만이 아닌 세계의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와같이 단재가 궁예의 전기를 소설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가 생각하는 궁예의 진면목과 정사 기록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인 것 같다.궁예와 후백제의 전투는 육지와 수상 양면에서 전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수상전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궁예는 왕건을 금성(나주)로 보내 후백제의 배후를 쳤는데, 912년 덕진포 전투 이후 궁예 세력은 서남해에서 절대적으로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또한 신라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에도 박차를 가하여 세력이 소백산맥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901년 궁예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후 대내외적으로 제정하고 선포한 첫 국호는 고려였다. 이는 궁예의 점령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으로 토착민인 고구려 유민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호응을 기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토가 점차 확대되면서 백제와 신라계 유민들의 편입을 수용하기에는 고려라는 그릇이 너무 작았다. 결국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라 했다. 그것은 궁예의 의지가 고구려 중심의 통일을 지양하고 삼국 공통의 대동방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종전의 방침을 추종하던 세력들의 반발을 감내해야 했다. 예측한 대로 국호 변경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적인 집안이 왕건가였으며, 이 때부터 왕건은 역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서 궁예는 철원으로의 천도를 단행한다. 궁예는 송악에서 더 이상 왕권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환도와 동시에 청주인 1천 호를 철원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었다. 궁예는 태봉이라는 국호에 자신이 추구하는 통일의 방향, 곧 삼국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친 통일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던 게 아닐까? 그러나 새 국호인 태봉도 고구려주의자들에게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 같고, 이제 고구려계 호족과 함께 기타 기득권 소유층에게까지 반궁예 정서를 확산시키는 빌미가 되었다.896년 궁예는 국호를 고려라 하고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스스로 임금을 칭하며 내외관직을 설치했다. 궁예의 칭왕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집단은 패서 호족들이었다. 특히 송악을 근거지로 오랫동안 호족으로 군림해 온 왕건가와 결합한 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왕건가와 결합한 궁예는 임진강과 예성강 하류지역을 모두 휘하에 두게 되었으며 897년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이 일대의 세력은 주로 해상력이 강성한 호족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왕건가는 뛰어난 해상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수운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 또한 왕건가나 정부 유씨 등은 단순히 선박을 이용한 무역만 한 것이 아니라 배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한 장인 집단이었다. 궁예가 송악으로 천도한 것은 한강과의 수운이 편한 송악을 거점으로 한강 상류로 진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궁예에게 있어 북원과 국원을 중심으로 한 중부의 패자 양길과의 일전은 불가피한 숙명이었다. 패서 호족들과의 제휴에 성공한 궁예는 이제 후삼국을 통일하려면 한강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897년의 1차 전투와 899년의 2차 전투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둔 궁예는 소백 이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후백제와의 전투에서도 왕건이 이끈 수군의 활약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궁예의 정복활동은 세력 확대를 위한 전쟁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통일전쟁의 대열에 나서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상을 품은 영웅들의 전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궁예는 고구려의 옷을, 견훤은 백제의 옷을 입었고, 신라 천년 사직이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른바 후삼국 통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우리의 역사 속에서 후삼국 시대는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따라서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궁예, 견훤을 위시한 국왕들은 물론이고 그 기간 중에 진행된 역사발전 자체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후삼국 시대는 중국의 유비, 조조, 손권이 쟁패를 벌이던 삼국시대나,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약하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전국에서 발호한 호족들이 스스로 장군, 성주를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고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며 한 시대를 이끌어 간 것이다.



이 책은 후삼국시대의 영웅의 한 사람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궁예를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 내어 재조명한 획기적인 책이다. 궁예가 가졌던 통일의 꿈과 그것이 지역주의 세력의 저항 속에서 좌절하는 과정을 그리며,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통일이라는 과제를 실현하는 데 있어 좋은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신라 헌안왕(857~861) 또는 경문왕(861~875)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고, 《제왕운기》에는 경문왕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많은 가문이 자신들의 가계를 미화할 목적으로 신라 왕실과의 관계를 강조했다는 점을 들어 이 기록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궁예처럼 악의적으로 표현된 인물을 조상으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수록된 궁예의 탄생설화는 궁예가 어떤 형태로든 왕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궁예의 탄생설화중 일부는 사서 서술자에 의해 조작된 흔적이 보이는 데, 서술자는 궁예를 출생부터 비정상적이고 불길한 인물로 묘사해, 지나칠 정도로 부정적으로 서술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궁예가 태어난 5월5일 중오일은 명절로 꼽히는 상서로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날이라고 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는 표현도 다른 사람에 비해 성장이 빨랐다는 사실이 담겨져 있는 데, 반 궁예적 입장에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궁예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면, 헌안왕 때나 경문왕 때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은 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반면 궁예를 선조로 삼고 있는 성씨 가운데 하나인 순천 김씨 세보에는 궁예가 신문왕의 다섯때 아들로 되어 있다. 신문왕 우징은 흥덕왕(826~836) 사후 벌어진 치열한 왕위 쟁탈전의 주인공으로, 836년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후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가 장보고의 도움으로 839년 왕이 되었다. 신무왕은 즉위하던 해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뒤를 잇는다. 따라서 순천 김씨의 족보대로 궁예가 신무왕의 아들이라면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왕자들 간의 후계자 쟁탈전 중 희생된 인물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신무왕이 죽은 해인 839년에 궁예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나라를 세울 때인 901년에 63세가 되어(견훤 34세, 왕건 25세) 나이가 문제가 된다.



한편 장보고는 문성왕8년(846)에 반란을 일으키는 데, 그 이유는 중앙 귀족들이 그의 딸과 문성왕의 혼인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장보고의 딸과 문성왕의 결혼은 이미 신무왕 때 약조했던 일로 보이는 데, 문성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을 근거로 궁예는 장보고의 난 때 희생된 인물이라는 가설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궁예의 외가에 대하여 고의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의문이 제기되는 데, 궁예의 외가는 청해진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궁예는 신무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문성왕의 자손으로 장보고의 외손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약 궁예가 장보고의 난(846) 때 태어났다면 901년 건국할 때의 나이는 56세가 된다.



비극적인 출생을 하게 된 궁예는 10세가 조금 넘으면 세달사라는 절에 추탁하여 불교적 생활에 적응하면서 성장한다. 궁예가 세달사로 간 것은 경제적 동기에 의한 투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궁예는 궁핍을 면하기 위하여 투탁한 처지였으므로 경이나 외우고 강이나 하면서 품위를 지키는 모양 좋은 승려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궁예는 고급 승려라기보다 수원승도(隨院僧徒)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궁예와 뜻을 같이 했던 종간과 은부, 허월 등도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 추정된다. 궁예는 세달사에서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적지만 하나의 무리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세달사에서 사원과 불교의 타락상을 체험하고, 세속화된 사원에서 더 이상 구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도 느꼈을 것이다.



이 무렵 신라적 질서가 붕괴되어가던 새로운 세력, 즉 반 독립적인 성향을 띄고 신라에 반기를 든 호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궁예와 그 친구들은 후원자를 물색하다가 죽주의 호족 기원을 찾아가기로 결정한다(891). 그러나 궁예의 예상보다 큰 조직과 세력을 갖고 있던 기훤이 궁예일행을 홀대하였고, 궁예와 그 친구들은 오만한 기훤의 태도에 무척 당황했다. 결국 그들은 기훤을 떠나 자신들을 받아줄 새로운 상대를 찾아 북원의 호족 양길에게로 간다(892). 그때 그냥 몸만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기원의 부하인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함으로써 궁예 일행은 더 큰 세력이 되었다.



이 해에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신라의 비장을 거쳐 서남 해안의 수비를 맡았던 견훤은 백제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후백제를 창립했다. 궁예는 하층민으로 곤궁한 생활을 계속하여 반신라적 성향이 강했던 데 비해 견훤은 반신라적 분위기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유망한 청년 장교였다. 따라서 궁예로서는 견훤에게 의탁하기보다는 자생적인 반신라적 경향의 호족들과 규합하는 편이 자신의 미래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으리라.양길은 신라 5소경 중 북원(원주)과 국원(충주) 2경이 포함된 30여 성 이상을 거느린 대호족이었다. 특히 당시의 교통수단에서 가장 중요시되던 수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길의 세력은 수군도 매우 강했을 것이다. 국원과 북원, 신라 5소경 중 두 지역을 중심으로 한 양길의 세력은 한강을 끼고 발달한 하나의 내륙왕국이었던 것이다. 이 내륙의 국왕 양길은 궁예의 투탁을 흔쾌히 수락하고 그를 믿어 주었다. 아마도 양길은 세력 확대를 위해 궁예를 받아들인 것 같다.



892년 10월 궁예는 양길의 지원 아래 첫 정복활동에 나섰다. 궁예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한다. 장수로서의 실력과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궁예는 치악산 석남사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주천(영월군 주천면), 나성(영월), 울오(평창), 어진(울진) 등의 정벌에 나서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다. 892년 정벌에 나선 궁예는 명주(강릉)에 입성하기 전인 894년까지의 짧은 기간에 영동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판도 아래 두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 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행동 때문에 궁예를 비정상적이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이 사건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오히려 민심을 대변한 계산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궁예는 이 칼질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의 신라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해 결속을 단단히하려 했을 것이다. 신라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해야 한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894년 궁예는 영동지역에서 가장 핵심지역인 명주 일대를 점령한다. 당시 명주는 신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배한 김주원이 추종세력과 함께 이주해 지배집단을 이루고 있었다.이러한 대도시를 궁예는 아주 쉽게 점령했다. 그것은 명주에서 궁예를 영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명주 내부의 계층간 대립이 궁예의 영입을 자초했고 이 과정에서 궁예는 적은 병력으로 명주 세력을 휘하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주를 점령한 후 궁예는 장군에 추대되어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군대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궁예가 얻은 장군이라는 칭호는 신라의 관제에 따른 장군과는 다른 성격이었고, 그의 군대 역시 전장에서 함께 피와 땀을 흘린 인간적 관계로 뭉친 사병적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 궁예가 장군을 칭한 것은 막부장군으로서 위로부터의 독립과 상하가 대등한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심적, 인격적으로 결합하는 특수한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다. 궁예는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은폐할 수 있었을 것이고 많은 하층민들로부터 역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주 지역이 안정되자 궁예는 고성 일대로 북진하였다. 그것은 서진하게 하면 바로 양길과 부딪히게 되어 우회전략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진에도 한계가 있었다. 발해와 말갈이 그의 전진을 막은 것이다. 895년 궁예는 서진을 결심하고 백두대간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 저족(인제), 생천(화천), 부약(김화), 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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