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자론

단자론

저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출판사: -
등록일: 2000-09-05
라틴어를 독학으로 익힌 어린 신동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7월 1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었을 때 돌아가셨지만 라이프니츠에게 배움에 대한 사랑을 심어놓으셨다. 그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였지만 그 당시에 그는 독서를 통한 독학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무도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하자, 그는 여덟 살 때 혼자 힘으로 라틴어를 익혔다. 그는 동판화로 장식된 리비우스의 책을 대했을 때, 표지에 있는 글자를 보고 그 낱말들의 뜻을 해독했다. 그리고 나서 그 본문에 집중해서 낱말 하나 하나의 의미를 해독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거기서 그의 광범위한 독서가 시작됐다.

'지식의 틀'을 갖추고 있는 논리학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던 그는 15세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처음에는 라이프치히 대학(1661∼6)에, 그리고 알트도르프 대학(1666-7)에 다녔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법학에만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그는 곧 철학적 문제들에 부딪혔다. 당시 철학은 목적론에 바탕을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계론에 바탕을 둔 데카르트 철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스물한 살에 교수직 제의 거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치히의 로젠탈 거리를 혼자 산책하면서 이 두 입장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 둘의 종합을 시도하지만 이미 15세에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위해 중요한 관점을 정립한 것이다. 철학을 생각하면서도 그는 법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들은 그가 박사 학위를 얻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어떤 기록에는 대학 학장 부인이 라이프니츠를 싫어하여 박사 학위 취득을 방해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는 뉘른베르크에 있는 알트도르프 대학으로 학적을 옮겨, 그 대학의 교수들의 경탄 속에 빼어난 성적으로 박사 학위 시험에 통과했다.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스물 한 살에 불과한 그에게 교수직이 제의됐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라이프니츠는 대학 교수직이라는 속박을 원치 않았고 보다 더 넓은 세계와 접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보다 더 활발히 교제함으로써 대전환기를 맞는 시대의 문제들과 직접 대면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정치 고문과 외교관을 역임한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마인츠 영주와 대주교의 정치적 고문으로 활동하다 하노버 궁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하노버 왕당원의 자문관으로 일한다. 그의 일은 대부분은 외교 사절로 파리, 비엔나, 베를린, 뮌헨 등으로 다니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이집트 침공이라는 모험적인 기안서를 제시해 프랑스 왕의 관심을 독일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 나폴레옹이 이 기안서를 참조해 이집트 침공 계획을 세웠다.

여러 외교 활동 중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여행은 1672년의 파리 여행이었다. 그가 파리로 간 후에서야 비로소 유럽 지식 세계의 주류에 입문하게 됐다. 그는 파리에서 중요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를 만나 새로운 사상을 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계산술(후에 보편 기호학으로 정리된다), 물리학,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가 당시에 보여준 외교 활동은 그의 철학 가운데 특히 화해에 대한 추구를 보여줬다. 그가 소망한 민족연합은 개개의 민족이 자신의 고유한 민족적 과제를 다른 민족들과 협력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크리스트교 민족들의 조화와 세계 평화를 열망했던 것이다.

책을 빌려가는 것을 싫어한 도서관장

라이프니츠는 외교 여행을 빼고는 줄곧 하노버에 머물렀다. 그는 하노버와 볼펜뷔텔에서 궁정 도서관장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특이한 도서관장이었다. 누군가 책을 빌려가려고 하면 몹시 화를 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제안한 하노버 왕가의 역사 저술을 위임받았다. 그는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지질학과 지구의 발생사에 대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고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런 선행 연구를 하느라고 왕가의 역사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왕이 참다 못해 연구의 진행을 재촉했다. 이 임무는 평생토록 계속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지지부진을 거듭하다 성화같은 독촉 속에서 괴로움만 맛봤다. 하지만 그는 그 왕가의 명성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세계의 생성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이 연구와 더불어 라이프니츠가 몰두한 것은 루터교와 개혁파의 분열을 통합하고 그 다음으로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통합을, 마지막으로는 서유럽 교회와 동유럽 그리스정교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의 학문적 노력도 체계를 잡기 시작했다. 그는 비엔나, 드레스덴, 베를린, 페테르부르크 등의 학술원 창립에 대한 구상을 하고 그 구상의 일환인 베를린 학술원의 초대 원장이 됐다. 하지만 화려한 삶처럼 보이는 그는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고 버림받은 몸으로 1716년에 너무나 외로운 최후를 맞았다.

학문 활동과 저술

이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도 그가 학문 연구를 광범위하게 수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수학, 물리학, 역학, 지질학, 광물학, 법학, 경제학, 언어학, 역사학, 신학 등을 골고루 연구했다. 그는 수학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인 미적분을 발견했다. 이 미적분의 최초의 발견자가 누구인가와 관련해서 뉴턴과 그의 추종자들과 달갑지 않은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라이프니츠는 계산기와 잠수함 설계에 성공했다. 그는 학계에서 유명한 인사들과 광범위한 학문적 서신을 교환했다. 이 편지만도 15,000여 통에 이른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초안이나 기획에 불과한 단편들이지만 그가 발간한 저서도 적지 않다. 그가 1684년에 《인식, 진리, 관념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cognitione, veritate et ideis》을 발간하고 1686년에 《형이상학 담론 Discoure de m taphysque》을 작성했지만 이 책은 160여년 후인 1846년에 발간된다. 1704년에 로크의 《인간지성론》을 비판한 《신인간지성론》을 작성하지만 로크의 죽자 발간을 미뤘다. 이 책은 쓴지 60년 후인 1765년에 발간됐다. 그는 1710년에 자신의 철학적 대작인 《변신론 Th odic e》을 발간했다. 그의 최후의 철학 저작은 짧은 요약집으로 자신의 철학에 대한 입문서로 쓰여졌다. 이런 요약서는 두 권인데, 하나는 《단자론 Monadologie》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 ce》다. 이 두 작품은 1714년에 쓰여졌으리라 추정된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개개의 사물은 모두 자신에 내재해 있는 힘인 활력의 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화한다. 이 활력의 점이 단자(모나드)다. 모든 단자는 살아있다. 따라서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체다. 자연 전체는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이 생명의 왕국은 무한한 수의 살아 있는 단자들로 구성돼 있고, 그 단자들은 모두 다르다. 눈의 보이는 현실의 진정한 실재는 살아있는 활력점으로서의 단자인데, 이 활력점의 속성은 표상과 욕구로 구성돼 있다.

단자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근거로부터 키워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단자는 다른 단자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따라서 그런 영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단자는 그 무엇이 들어가거나 나오거나 할 수 있는 창문이 없다. 단자는 완전히 자족적이다. 그런데 개개의 단자 안에 온 세계가 현존한다. 개개의 단자는 살아 있는 영원한 우주의 거울이고 작은 우주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 그것은 하나의 작은 신성이다.

단자는 과거를 간직하고 있으며 미래를 잉태하고 있다. 이런 단자들은 예정조화에 의해 상호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예정조화의 체계는 단자의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상호 조화시키고 정돈해 주는 정신이 요구된다. 이 정신이 바로 신이다. 신은 위대한 수학자처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개개의 단자에 내면적 법칙을 기획해 전체의 모든 단자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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