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지성론

인간지성론

저자: 존 로크
출판사: -
등록일: 2000-08-12
경건한 왕권주의에서 종교적 관용으로

로크는 영국의 철학자로서 홉스·데카르트·라이프니츠 등의 철학자, 갈릴레오·하비·보일·뉴턴 등의 과학자들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그는 찰스 1세가 통치하던 1632년 서머셋의 농촌에서 자영업을 하는 중산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머셋 지방의 법률가였는데, 지방 치안판사의 비서이자 완고한 의회주의자였다. 어머니는 경건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1647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학교(당시 교장은 특이하게도 왕당파인 버스비였다)에 입학했다. 그가 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649년 왕권주의를 지나치게 추구하던 찰스 1세가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에 의해 처형되고 영국은 공화국이 됐다. 이곳에서 로크는 훗날 뛰어난 철학자가 되기 위한 학문적 기초를 닦았고, 정치계에 발을 내딛는 계기를 마련했다.

로크는 1652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가장 비중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다. 여기서 로크는 어린 시절의 편협한 경건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시절의 왕권주의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종교적 관용을 강렬하게 외치는 분위기를 만난다. 비록 나중에 옥스퍼드의 교육방식인 스콜라 학풍을 맹렬하게 비난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논리학, 문법, 수사학, 그리스어와 도덕철학을 공부하고 계속해서 역사와 히브리어까지 폭넓게 공부했다. 그뿐 아니라 티렐 등 평생을 함께할 좋은 친구들도 사귀었고, 많은 여인들과 열렬한 연애에 빠지기도 했다.

실험적 자연과학에 관심

1658년 로크는 석사학위를 받고 선임연구원으로 선출됐다. 이때만 해도 로크는 국가의 권위를 우선하는 권위주의자였다. 명예혁명 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보수주의자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재산 관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었고 임대인들에게 관대한 편이 아니어서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의 기질을 지닌 듯하다. 그런 그가 훗날 관용과 저항권과 같은 자유주의 사상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로크가 자유주의 사상가뿐 아니라, 격변하는 영국 정치계 한가운데서 그 나름의 역할을 하기까지 아주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첫째 새로운 철학과 과학 이론과의 만남이다. 이 새로운 이론은 너무 혁신적이어서 기존 강단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도 그를 사로잡았지만, 그보다 가상디의 에피쿠로스적인 원지론과 쾌락주의가 더 영향을 끼쳤다.

이런 영향 때문에 로크는 실험적 자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당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자연과학인 의학에 몰두했다. 옥스퍼드는 1650년대에 자연 일반과 인간 육체의 경험 연구를 지향하던 실험적 자연과학 연구모임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권주의가 회복된 후 찰스 2세의 인준을 받아 왕립학회를 창립했다. 두 번째 만남은 바로 이 학회의 주도적 창설자인 로버트 보일과의 만남이었다.

로버트 보일과의 만남으로 로크는 자신의 인식론의 기초 가설인 미립자 이론을 알았다. 또한 로크는 유행병과 천연두 연구의 권위자인 토머스 시든햄과 공동으로 의학을 연구해 많은 성과를 올렸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1668년 왕립협회 회원이 됐으며, 1675년 의학사 학위를 받아 개업의가 됐다. 그런데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의학이 그를 세속 정치로 나아가는 운명의 길을 열어준다.

샤프츠베리와 함께 휘그당 지휘

1666년 여름 옥스퍼드에서 로크는 근처 온천에 놀러온 앤소니 애슐리 쿠퍼 경(샤프츠베리 백작 1세)과 아주 운명적으로 만났다. 로크의 학술과 화술에 매료된 쿠퍼 경은 그를 개인 가정의로 초빙했는데, 로크는 1668년 쿠퍼 경의 간종양 수술에 성공해서 신뢰를 얻었다. 1672년 샤프츠베리 백작이 된 쿠퍼 경이 정치적으로 빠르게 승진하자 조언자이자 비서였던 로크도 현실 정치에 많이 관여하게 된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외국과의 무역 증진을 통해 경제를 번영시키려면 종교적 관용을 허용하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로크는 초창기의 권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주의적 시각을 갖게 됐다. 또한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백작이 여러 지우들과 토론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에서 종교와 도덕의 인식론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지성론》의 1차 초고로 알려진 초고 A를 1671년에 작성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트찰스 2세가 왕권적 절대주의를 표방하던 프랑스와 비밀리에 손잡고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샤프츠베리는 이를 반대하는 '초록리본회'를 결성했다. 이 모임이 나중에 '{w:휘그당}'으로 발전하게 됐다. 반면 왕당파는 '{w:토리당}'으로 불렸다. 토리당이 권력을 쥐고 있었으므로 휘그당은 감시받거나 쫓겨다녔다.

휘그당의 지도자인 샤프츠베리의 혁명 계획이 실패하고 휘그당의 제임스 암살계획이 발각되면서 휘그당원들이 체포돼 처형되자, 휘그당을 지지하던 로크도 1683년에 네덜란드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럽 서적의 중심지인 네덜란드에서 《인간지성론》을 다듬을 수 있었고, 그곳의 관용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관용 편지》를 저술한다. 한편 영국에서는 제임스 왕이 지나친 가톨릭 위주의 정책과 친프랑스적인 정책을 펴자 휘그당과 토리당이 모두 등을 돌렸다. 이들이 1688년 프랑스 절대왕정의 강력한 맞수이자 찰스 1세의 손녀, 제임스 왕의 맏딸인 메리와 그 남편 오렌지 공 윌리엄을 불러들여 '명예혁명'을 단행한다. 의회와 절대왕정의 대립에서 의회의 승리를 의미하는 명예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 로크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57세가 될 때까지 저서를 하나도 내지 못한 로크는 영국에 돌아오자마자 1689년에 《관용 편지》, 《정부론》, 《인간지성론》을 연달아 발간했다. 1704년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는 근대 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 많은 저서(《교육론》(1693년), 익명으로 발간한 《기독교의 합당성》(1695년)이 대표적이다)를 펴냈다.


▣ 《인간지성론》의 내용 구성                             

제1장 본유관념 비판

사변적이고 실천적인 본유관념설을 비판한다.



제2장 관념에 관하여

본유관념설에 대한 대안으로 백지설에 기반을 둔 경험적 관념 기원에 관한 분석을 시도한다. 개연성의 인식론과 도덕 심리학이 언급된다.



제3장 언어에 관하여

2장의 경험주의 원칙을 가지고 언어 비판을 시도하여 유명론적인 언어관을 제시한다.



제4장 지식에 관하여

지식의 재료가 되는 관념에 대해서는 경험주의적 분석을 시도하지만 이 관념을 가지고 만든 지식은 합리론적으로 고찰한다. 지식의 합리주의는 도덕적 인식론적 기획으로 연결되고 이성과 신앙의 관계를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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