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될 때를 아는 겸손한 작가
고트프리트 켈러, 그는 스위스와 독일에 걸쳐 매우 유명하며 성공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7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신문들은 기념 기사를 내보냈고 여러 가지 행사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켈러는 가족도 없이 혼자 스위스의 한적한 곳으로 은퇴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때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치 앞을 내다보는 사람처럼 그로부터 바로 1년 뒤 켈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첫 장편소설《녹색 옷의 하인리히 Der grune Heinrich》(1855)가 성공한 후 켈러는 고향인 취리히에서 연방 공업대학의 문학사 강사직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이 자리를 거절했다. 그리고 1861년에는 취리히의 서기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언론들은 그에게 이런 관직이 어울릴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이후 15년 동안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 직무를 잘 수행했다.
켈러에게는 초기에 미술 공부를 하다가 포기한 후 사랑에도 실패하면서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그는 독일에서 망명해온 자유주의적 작가들, 예를 들면 F.프라일리그리트, W.실츠 등과 만나면서 그들의 작가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연방제를 반대하는 내분이 일어나자, 켈러는 연방제를 옹호하는 쪽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스위스가 보다 민주적인 연방 체제를 마련하는 데 일조하였다.이처럼 그는 작가로서 독특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난 켈러는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직공인 아버지와 지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때부터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처음에 화가가 되고자 했지만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한때 뮌헨에서 공부를 했지만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켈러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 정부의 장학금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법학과 역사, 문학 등을 공부했다. 그후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가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출판사의 권유로 쓴 것이 바로 그의 첫번째 성공작인《녹색 옷의 하인리히 Der grune Heinrich》(1855)였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고독과 실망을 겪을 때마다 어떤 위협을 느꼈는지 말하고 있다.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1861년에 마침내 취리히의 서기관에 임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또한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57세의 나이로 퇴직한 후에는 자유로운 작가로서 오로지 창작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켈러는 이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헤쳐나갔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냈다.
단편소설계의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희곡계의 거장이라면 단편소설에서는 단연코 켈러를 들 수 있다. 켈러는 서정시와 장편의 작품들도 남기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재능은 역시 단편에서 발휘됐다.
그의 단편 속에는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사실주의적 문학 경향과 함께 따뜻한 인간애가 어우러져 있다. 또한 단편에서 발견되는 그의 문학적 영상력은 우화적 즐거움을 주는 환상과 선하고 밝은 의식, 그리고 본능 등이 합쳐진 것이며, 여기에 완숙한 그의 문체가 더해져 스위스의 괴테라고도 불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단편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믿음이며 도덕적 인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단편집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1부Leute von Seldwyla 》(1856)에는 <젤트빌라의 로미오와 줄리엣 >, <3인의 직공> 등 주옥 같은 단편 다섯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2부 Leute von Seldwyla》(1874) 에는 <옷이 날개>를 비롯한 5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그가 퇴직 후 창작에 몰두해서 발표한 《취리히 단편집 Zurich Novellen 》(1877/78)에는 <그라이펜 호수의 지사 Der Landvogt von Greifensee>, <칠인의 의인의 깃발 Das Fahnlein der sieben Aufrechten> 등이 들어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음산한 가을날.
한 가난한 재단사가 배고픔과 추위로 인해 고통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작은 보따리 하나뿐. 재단사로 일하던 양복점에서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머니에는 한푼도 없는 빈털털이 신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름다운 용모, 그리고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는 몸매만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때마침 이 가엾은 재단사 곁을 화려하고 장중한 귀족의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마차를 몰고 가던 마부는 재단사에게 동승을 요청하고, 배고픔과 추위로 지친 재단사는 기꺼이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부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어느 작은 도시의 시장 근처에 마차를 세운다. 작은 도시의 시장에 화려하고 장중한 귀족의 마차가 멈추어 서는 일은 여간해서 보기 드문 일이다.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마차를 구경하려고 뛰쳐 나와서 마차를 둘러쌌다. 마침 마차의 도착을 지켜보던 허영심에 가득찬 음식점 주인은 황급히 달려와서 마차의 문을 정중히 열었다.
잘 생긴 청년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백작이나 왕자쯤은 될 거라고 추측하는데...
고트프리트 켈러, 그는 스위스와 독일에 걸쳐 매우 유명하며 성공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7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신문들은 기념 기사를 내보냈고 여러 가지 행사로 떠들썩했다. 하지만 켈러는 가족도 없이 혼자 스위스의 한적한 곳으로 은퇴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때라고 여겼던 것이다. 마치 앞을 내다보는 사람처럼 그로부터 바로 1년 뒤 켈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첫 장편소설《녹색 옷의 하인리히 Der grune Heinrich》(1855)가 성공한 후 켈러는 고향인 취리히에서 연방 공업대학의 문학사 강사직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이 자리를 거절했다. 그리고 1861년에는 취리히의 서기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언론들은 그에게 이런 관직이 어울릴지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이후 15년 동안 충실하고 성실하게 이 직무를 잘 수행했다.
켈러에게는 초기에 미술 공부를 하다가 포기한 후 사랑에도 실패하면서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그는 독일에서 망명해온 자유주의적 작가들, 예를 들면 F.프라일리그리트, W.실츠 등과 만나면서 그들의 작가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연방제를 반대하는 내분이 일어나자, 켈러는 연방제를 옹호하는 쪽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스위스가 보다 민주적인 연방 체제를 마련하는 데 일조하였다.이처럼 그는 작가로서 독특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난 켈러는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직공인 아버지와 지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때부터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처음에 화가가 되고자 했지만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한때 뮌헨에서 공부를 했지만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이 부족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켈러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 정부의 장학금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 법학과 역사, 문학 등을 공부했다. 그후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가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출판사의 권유로 쓴 것이 바로 그의 첫번째 성공작인《녹색 옷의 하인리히 Der grune Heinrich》(1855)였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고 고독과 실망을 겪을 때마다 어떤 위협을 느꼈는지 말하고 있다.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1861년에 마침내 취리히의 서기관에 임용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또한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57세의 나이로 퇴직한 후에는 자유로운 작가로서 오로지 창작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켈러는 이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헤쳐나갔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냈다.
단편소설계의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희곡계의 거장이라면 단편소설에서는 단연코 켈러를 들 수 있다. 켈러는 서정시와 장편의 작품들도 남기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재능은 역시 단편에서 발휘됐다.
그의 단편 속에는 현실을 대상으로 하는 사실주의적 문학 경향과 함께 따뜻한 인간애가 어우러져 있다. 또한 단편에서 발견되는 그의 문학적 영상력은 우화적 즐거움을 주는 환상과 선하고 밝은 의식, 그리고 본능 등이 합쳐진 것이며, 여기에 완숙한 그의 문체가 더해져 스위스의 괴테라고도 불릴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단편을 비롯한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믿음이며 도덕적 인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최초의 단편집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1부Leute von Seldwyla 》(1856)에는 <젤트빌라의 로미오와 줄리엣 >, <3인의 직공> 등 주옥 같은 단편 다섯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젤트빌라의 사람들 제2부 Leute von Seldwyla》(1874) 에는 <옷이 날개>를 비롯한 5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그가 퇴직 후 창작에 몰두해서 발표한 《취리히 단편집 Zurich Novellen 》(1877/78)에는 <그라이펜 호수의 지사 Der Landvogt von Greifensee>, <칠인의 의인의 깃발 Das Fahnlein der sieben Aufrechten> 등이 들어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음산한 가을날.
한 가난한 재단사가 배고픔과 추위로 인해 고통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작은 보따리 하나뿐. 재단사로 일하던 양복점에서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머니에는 한푼도 없는 빈털털이 신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름다운 용모, 그리고 어느 옷이나 잘 어울리는 몸매만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때마침 이 가엾은 재단사 곁을 화려하고 장중한 귀족의 마차 한 대가 지나갔다. 마차를 몰고 가던 마부는 재단사에게 동승을 요청하고, 배고픔과 추위로 지친 재단사는 기꺼이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마부는 잠깐의 휴식을 위해 어느 작은 도시의 시장 근처에 마차를 세운다. 작은 도시의 시장에 화려하고 장중한 귀족의 마차가 멈추어 서는 일은 여간해서 보기 드문 일이다.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마차를 구경하려고 뛰쳐 나와서 마차를 둘러쌌다. 마침 마차의 도착을 지켜보던 허영심에 가득찬 음식점 주인은 황급히 달려와서 마차의 문을 정중히 열었다.
잘 생긴 청년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백작이나 왕자쯤은 될 거라고 추측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