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국교도를 다루는 첩경》필화사건
1702년 12월, 영국에서는 편의적 국교신봉을 폐지하자는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주장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편의적 국교신봉(Occasional Conformity)은 비국교도가 일 년에 한 번 국교교회의 미사에서 성체를 받기만 하면 공직취임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는 관용주의를 말한다. 이즈음 디포는 보수적 국교도의 편협성을 통렬히 비판하는 《비국교도를 다루는 첩경》이라는 팜플렛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극단주의자 목소리를 빌려, 비국교도를 다루는 최상책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배경이 되는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편협성을 비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의 의도는 전혀 엉뚱하게 해석된다. 반어적 의도를 깨닫지 못한 고교회파와 비국교도는 공히 이 글을 심각히 받아들였다가, 비록 이유는 다르지만 이 글의 아이러니가 밝혀지자 양쪽이 다 격분했다. 결국 디포는 선동적인 중상모략죄로 감옥에 수감돼 형틀을 쓰고 대중 앞에 세 번이나 서는 모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이 필화 사건으로 그가 운영하던 벽돌 공장은 파산하고, 이를 계기로 디포는 상업에의 꿈을 포기하고 문필가의 길을 걷게 된다.
비국교도파 중산계급 출신의 중요성
디포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비국교도파 중산계급이라는 출신배경이다. 디포의 소설에는 경제력을 장악해가던 비국교도 중산층과, 그를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으며, 이는 당대에 새로 부각되던 중산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소설이라는 근대적 문학 장르의 발생에 디포가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디포는 1660년에 네덜란드 계통의 제임스 포우의 세 번째 자녀로 런던에서 출생했다(30대 중반에 그는 자기의 성을 디포라고 부르고 있는데, 자신의 성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비국교도인 장로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 육류 등을 거래했던 성공한 상인이었다. 비국교도이기 때문에 디포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대신 비국교도인 찰스 모튼이 관장하던 뉴잉튼 그린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디포는 모튼에 의해 탁월한 교육을 받는다. 후에 하버드 대학 부총장이 된 모튼은, 디포의 호소력 있는 평이한 구어체 문장과 단순하고 명료한 문체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성직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지만 디포는 성직을 택하지 않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디포는 상업을 '사랑하는 주제'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것은 일생에 걸쳐 그를 사로잡은 관심사였다. 그는 여러 종류의 물품을 다루었으며 시대를 앞선 경제에 관한 예리한 이론가였다.
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인생은 결코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1692년에 그는 1만 7천 파운드의 빚을 지고 첫번째 파산을 경험한다. 디포는 부주의하기는 했으나 불명예스러운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향후 10년간 5천 파운드를 제외한 나머지 빚을 성실히 갚아나간다. 파산 2년 뒤 습지에 차린 벽돌과 기와 공장은 번창하여 100여 명의 일꾼이 동원돼 연간 6백 파운드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불운은 그를 다시 찾아와 필화사건에 휘말려 투옥되고 이로 인해 사업도 엉망이 되었다. 이후로 디포는 더 이상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문필가로서 생을 영위한다.
정치가로서의 디포
디포의 경제적 삶과 정치, 종교적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런던의 상권을 비국교도들이 장악했던 이유는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첩경이 바로 경제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당대에 대두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편의적 국교신봉을 주장한 이면에는 사회의 중심으로 진출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디포가 작품에서 근대 자본주의를 열광적으로 수용하고 정치적으로 휘그주의를 지지했던 것은 신분상승을 원했던 비국교도파 중산층들의 전형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1685년에 디포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장에 뛰어든다. 가톨릭이었던 제임스 2세의 즉위에 위협을 느낀 비국교도들은 몬머스 공작의 반란을 지지했고 디포도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 반란은 몬머스 공작이 처형되면서 실패로 돌아가는데 1687년에 발표된 반란 연루자들의 사면대상 명단에는 디포의 이름도 있다. 디포는 영국에 신교도왕 윌리엄 3세를 불러들이는 1688년의 명예혁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며, 1689년에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을 호위하는 시민자원친위대가 구성되었을 때도 당당히 가입한다. 명예혁명을 옹호한 그의 입장은 그가 쓴 일련의 정치적 팜플렛에서 잘 드러나는 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인인 것을 비꼰 존 터친의 《외국인 The Foreigners》이라는 작품을 반박한 풍자시 《진정한 영국인 The True-Born Englishmen》이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 건너온 정복자(단적인 예로 노르망디공 윌리엄)와 그 후손이 통치한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국인이 누구인지를 반문한 것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근대적 문필가로서의 삶
디포는 필화사건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하원 국회의장이던 로버트 할리의 도움으로 출감하게 된다. 할리는 휘그 성향에도 불구하고 디포의 재능을 사 그를 첩보원이자 토리 정책을 옹호하는 문필가로 이용할 속셈이었다. 디포는 이후 영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경제 여건과 여론의 기류를 파악해 할리에게 보고하고 또한 그의 후원으로 《리뷰》지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문필가의 길을 걷는다. 1704년에 창간돼 1713년까지 주 3회씩 발간된 이 잡지에 실린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제에 대한 다방면의 논평을 혼자 집필함으로써 디포는 문필가로서의 재능과 다산성을 한껏 과시한다. 1714년에 앤 여왕이 서거하고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휘그당이 집권하자, 디포는 휘그당의 편에서 친정부적인 글을 발표한다.
디포를 근대적인 문필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그가 후원자의 호의를 위해 글을 쓰지 않고 당대에 대두하기 시작한 출판물 시장을 근거로 문필활동을 했으며, 둘째, 군주제하의 농업경제 사회에서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쌍두마차로 대변되는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저작활동은 그가 영국소설의 발흥에 일조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근대적 면모와 신조는 사실적인 묘사, 평범한 삶의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그리고 일반 독서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산문이야기 양식의 형태로 대두되기 시작한 소설의 발흥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디포의 소설가로서의 완성은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를 통해 이루어진다. 언뜻 보면 단순한 모험담 같은 이야기에 디포는 자본주의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의 경제적 발흥,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하는 청교주의적 교훈, 그리고 허구적인 사실의 사실적인 묘사 등을 가미하여 근대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소설로 완성했다. 다음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에서는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난 몰 플란더즈라는 하층민 여성의 무자비한 사회적 신분상승 욕구와 그에 대한 회개를 통해 당대 사회의 관심사,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이기도 했던 사회적 유동성 문제를 다루면서 근대적인 면모를 다시 과시했다.
변모하는 사회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작품 속에 투영하려 했던 디포는 실제로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사업가로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또한 문필가로서도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말년까지 빚에 시달렸으며 1731년 4월 26일 빚에 몰려 피신생활을 하던 중 하숙집에서 숨을 거둔다. 작품 속에서는 새로운 경제와 경제적 인간의 도래를 예견하고 찬양했지만, 자신은 그러한 경제적 인간이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영국에 정착한 독일 상인의 아들 로빈슨 크루소는 장사를 권유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모험을 찾아 나선다. 첫번째 항해는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두 번째 항해에서 그는 성공을 이루는 듯하나 모로코 해안 근처에서 터키해적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겨우 탈출에 성공해서 포르투갈 배에 구조된 그는 브라질로 가 거기에서 농장주로 성공한다. 그러나 다시 모험에의 충동에 사로잡힌 그는 아프리카로 출발하고, 그 여행에서 배가 난파해 동료들은 다 죽고 그만 홀로 살아남아 남아메리카 오리노코강 근처의 무인도에 상륙한다.
그렇게 시작한 무인도 생활. 홀로 여러 해를 보낸 그는 어느날 식인제를 지낸 흔적을 발견하고 공포에 떨게 되는데......
1702년 12월, 영국에서는 편의적 국교신봉을 폐지하자는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주장이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편의적 국교신봉(Occasional Conformity)은 비국교도가 일 년에 한 번 국교교회의 미사에서 성체를 받기만 하면 공직취임의 요건을 갖춘 것으로 인정하는 관용주의를 말한다. 이즈음 디포는 보수적 국교도의 편협성을 통렬히 비판하는 《비국교도를 다루는 첩경》이라는 팜플렛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극단주의자 목소리를 빌려, 비국교도를 다루는 최상책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의 배경이 되는 영국국교회 고교회파의 편협성을 비판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글의 의도는 전혀 엉뚱하게 해석된다. 반어적 의도를 깨닫지 못한 고교회파와 비국교도는 공히 이 글을 심각히 받아들였다가, 비록 이유는 다르지만 이 글의 아이러니가 밝혀지자 양쪽이 다 격분했다. 결국 디포는 선동적인 중상모략죄로 감옥에 수감돼 형틀을 쓰고 대중 앞에 세 번이나 서는 모욕적인 형벌을 받았다. 이 필화 사건으로 그가 운영하던 벽돌 공장은 파산하고, 이를 계기로 디포는 상업에의 꿈을 포기하고 문필가의 길을 걷게 된다.
비국교도파 중산계급 출신의 중요성
디포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비국교도파 중산계급이라는 출신배경이다. 디포의 소설에는 경제력을 장악해가던 비국교도 중산층과, 그를 통한 사회적 신분상승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으며, 이는 당대에 새로 부각되던 중산층의 기호에 부합하는 소설이라는 근대적 문학 장르의 발생에 디포가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디포는 1660년에 네덜란드 계통의 제임스 포우의 세 번째 자녀로 런던에서 출생했다(30대 중반에 그는 자기의 성을 디포라고 부르고 있는데, 자신의 성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비국교도인 장로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 육류 등을 거래했던 성공한 상인이었다. 비국교도이기 때문에 디포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대신 비국교도인 찰스 모튼이 관장하던 뉴잉튼 그린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디포는 모튼에 의해 탁월한 교육을 받는다. 후에 하버드 대학 부총장이 된 모튼은, 디포의 호소력 있는 평이한 구어체 문장과 단순하고 명료한 문체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비록 성직자로서의 교육을 받았지만 디포는 성직을 택하지 않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디포는 상업을 '사랑하는 주제'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것은 일생에 걸쳐 그를 사로잡은 관심사였다. 그는 여러 종류의 물품을 다루었으며 시대를 앞선 경제에 관한 예리한 이론가였다.
그러나 사업가로서의 인생은 결코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1692년에 그는 1만 7천 파운드의 빚을 지고 첫번째 파산을 경험한다. 디포는 부주의하기는 했으나 불명예스러운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향후 10년간 5천 파운드를 제외한 나머지 빚을 성실히 갚아나간다. 파산 2년 뒤 습지에 차린 벽돌과 기와 공장은 번창하여 100여 명의 일꾼이 동원돼 연간 6백 파운드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불운은 그를 다시 찾아와 필화사건에 휘말려 투옥되고 이로 인해 사업도 엉망이 되었다. 이후로 디포는 더 이상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문필가로서 생을 영위한다.
정치가로서의 디포
디포의 경제적 삶과 정치, 종교적 삶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이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 런던의 상권을 비국교도들이 장악했던 이유는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첩경이 바로 경제적인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당대에 대두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물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편의적 국교신봉을 주장한 이면에는 사회의 중심으로 진출하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디포가 작품에서 근대 자본주의를 열광적으로 수용하고 정치적으로 휘그주의를 지지했던 것은 신분상승을 원했던 비국교도파 중산층들의 전형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1685년에 디포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정치의 장에 뛰어든다. 가톨릭이었던 제임스 2세의 즉위에 위협을 느낀 비국교도들은 몬머스 공작의 반란을 지지했고 디포도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 반란은 몬머스 공작이 처형되면서 실패로 돌아가는데 1687년에 발표된 반란 연루자들의 사면대상 명단에는 디포의 이름도 있다. 디포는 영국에 신교도왕 윌리엄 3세를 불러들이는 1688년의 명예혁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며, 1689년에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을 호위하는 시민자원친위대가 구성되었을 때도 당당히 가입한다. 명예혁명을 옹호한 그의 입장은 그가 쓴 일련의 정치적 팜플렛에서 잘 드러나는 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윌리엄 3세가 네덜란드인인 것을 비꼰 존 터친의 《외국인 The Foreigners》이라는 작품을 반박한 풍자시 《진정한 영국인 The True-Born Englishmen》이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 건너온 정복자(단적인 예로 노르망디공 윌리엄)와 그 후손이 통치한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국인이 누구인지를 반문한 것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근대적 문필가로서의 삶
디포는 필화사건으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하원 국회의장이던 로버트 할리의 도움으로 출감하게 된다. 할리는 휘그 성향에도 불구하고 디포의 재능을 사 그를 첩보원이자 토리 정책을 옹호하는 문필가로 이용할 속셈이었다. 디포는 이후 영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경제 여건과 여론의 기류를 파악해 할리에게 보고하고 또한 그의 후원으로 《리뷰》지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문필가의 길을 걷는다. 1704년에 창간돼 1713년까지 주 3회씩 발간된 이 잡지에 실린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문제에 대한 다방면의 논평을 혼자 집필함으로써 디포는 문필가로서의 재능과 다산성을 한껏 과시한다. 1714년에 앤 여왕이 서거하고 조지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휘그당이 집권하자, 디포는 휘그당의 편에서 친정부적인 글을 발표한다.
디포를 근대적인 문필가라고 칭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 그가 후원자의 호의를 위해 글을 쓰지 않고 당대에 대두하기 시작한 출판물 시장을 근거로 문필활동을 했으며, 둘째, 군주제하의 농업경제 사회에서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쌍두마차로 대변되는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저작활동은 그가 영국소설의 발흥에 일조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즉 이러한 근대적 면모와 신조는 사실적인 묘사, 평범한 삶의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그리고 일반 독서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산문이야기 양식의 형태로 대두되기 시작한 소설의 발흥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디포의 소설가로서의 완성은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를 통해 이루어진다. 언뜻 보면 단순한 모험담 같은 이야기에 디포는 자본주의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개인의 경제적 발흥, 그것을 신의 은총으로 해석하는 청교주의적 교훈, 그리고 허구적인 사실의 사실적인 묘사 등을 가미하여 근대적 의미에서의 최초의 소설로 완성했다. 다음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에서는 뉴게이트 감옥에서 태어난 몰 플란더즈라는 하층민 여성의 무자비한 사회적 신분상승 욕구와 그에 대한 회개를 통해 당대 사회의 관심사, 그리고 자신의 관심사이기도 했던 사회적 유동성 문제를 다루면서 근대적인 면모를 다시 과시했다.
변모하는 사회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작품 속에 투영하려 했던 디포는 실제로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사업가로서 성공하지 못했으며 또한 문필가로서도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말년까지 빚에 시달렸으며 1731년 4월 26일 빚에 몰려 피신생활을 하던 중 하숙집에서 숨을 거둔다. 작품 속에서는 새로운 경제와 경제적 인간의 도래를 예견하고 찬양했지만, 자신은 그러한 경제적 인간이 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영국에 정착한 독일 상인의 아들 로빈슨 크루소는 장사를 권유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모험을 찾아 나선다. 첫번째 항해는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두 번째 항해에서 그는 성공을 이루는 듯하나 모로코 해안 근처에서 터키해적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겨우 탈출에 성공해서 포르투갈 배에 구조된 그는 브라질로 가 거기에서 농장주로 성공한다. 그러나 다시 모험에의 충동에 사로잡힌 그는 아프리카로 출발하고, 그 여행에서 배가 난파해 동료들은 다 죽고 그만 홀로 살아남아 남아메리카 오리노코강 근처의 무인도에 상륙한다.
그렇게 시작한 무인도 생활. 홀로 여러 해를 보낸 그는 어느날 식인제를 지낸 흔적을 발견하고 공포에 떨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