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본실의 청개구리

표본실의 청개구리

저자: 염상섭
출판사: -
등록일: 2002-02-06
어린애 발가락을 유심히 바라보는 염상섭

「폐허」의 우두머리였던 염상섭은 「창조」의 우두머리였던 김동인과 아웅다웅 싸우기도 잘 싸웠고, 어울리기도 잘 어울렸다. 근대소설의 밭을 일구는 데 저마다 자신을 가졌던 두 사람은 맞수로서 서로의 거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출생부터 달랐다. 김동인이 평양 부호의 아들로 부유하게 생활한 데 비해 염상섭은 구한말에야 증조부와 아버지가 벼슬을 했던 서울의 중산층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서로 경계하고 자주 대립할 때 염상섭은 "너는 서울말을 모르지 않느냐."고 김동인을 비꼬았다. 언문일치가 형성되던 시기라 서울 일상어를 체득하고 있다는 것이 염상섭에게는 큰 자부심이었던 반면 서도 출신인 동인에게는 조금 꿀리는 일이었다. 또 이들은 집안에서 매우 다른 대우를 받았다. 김동인은 부유한 집안의 귀한 아들로 자랐지만 염상섭은 할아버지에게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둔하냐?"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나는 바보이거니와 신동이라는 너는 과연 얼마나 신동인가?"하는 약간의 오기, 혹은 냉정함이 김동인과의 관계에 작용했던 듯하다.



한 가문의 귀공자와 한 가문의 바보자식(?)은 문단에서 자주 부딪히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발가락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김동인이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하면서 일어났다. 문제는 염상섭이 이 소설의 모델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방탕하게 살다가 생식불능이 된 노총각이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결혼을 한다. 그리고 아내는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주인공은 아이와 자신의 닮은 점을 찾기 위해 천신만고 노력을 한 끝에 발가락이 닮은 것을 발견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염상섭이 이 소설의 주인공과 유사한 점은 서른두 살의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는 것밖에 없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도 될 소문에 염상섭은 「소위 모델문제」라는 글을 신문지상에 연재하면서 진지하게 반응했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염상섭이 김동인을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한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연재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김동인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그 부인이 여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동경으로 달아난 것이었다. 주변의 실제 모델들을 소설화하기를 즐겼던 염상섭은 자연스럽게 이 사건을 진지하게 소설로 다루었다. 물론 비난하거나 비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연재 두 번만에 중단했지만 아무튼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라이벌이 소설화한 사실은 김동인에게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발표한 것이다.



당시의 신문 문단산보란에는 김동인과 염상섭이 어린애 발가락을 유심히 보고 있는 캐리커쳐와 문단의 중견인 이들의 신경전을 비판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이는 삶과 문학 모두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평생을 서로의 거울이자 맞수로 지낸 두 사람에게 생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오히려 김동인과 인간적 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어 둘은 절친한 술친구가 됐다. 삶의 단편들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 위대한 산문정신

염상섭의 본명은 상섭(尙燮)이고, 필명은 상섭(想涉)이며, 자는 주상(周相), 호는 횡보(橫步)이며, 주로 상섭(想涉)이란 필명으로 활동했다. 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고가나무굴(현 소격동)에서 아버지 규환과 어머니 경주 김씨의 육남 이녀 중 삼남으로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였던 염인식이며, 아버지는 전주, 의성, 가평 등지에서 군수를 지냈다.



상섭은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웠고 할아버지를 여의고는 다음 해 9월에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학창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소학교를 두 번이나 옳기고, 중학교를 네 번이나 전학했으며, 대학은 예과에서 중퇴했다. 상섭은 우울하면서도 반항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보성소학교, 중학교를 다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지식을 배운다.

일본말 배우기를 거부했던 상섭은 일본에 도착하면서부터 곤경을 겪게 되고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도쿄경 마포중학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자금이 없어 계속 성학원(聖學院)과 교토부립 제2중학을 옮겨다녔다. 그는 1918년 교토부립 제2중학을 졸업하고 게이오대학 문학부 문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쓰루가에 있는 당시 일본 야당 헌정회(憲政會)에서 신문기자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은 해 게이오대학을 중퇴하고 교토 도나(敦賀)항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섭은 일본 오사카 천왕사 공원에서 조선노동자대회를 열어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3월 18일 밤에 검거되어 10개월간 투옥된다. 이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오사카 감옥에 있을 때 담당검사의 호의로 문학서적을 받아 볼 수 있어 문학학습에 도움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 그는 요코하마의 복음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취직했다가 3주만에 병으로 그만두고 봄에 귀국한다. 이때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그는 잠시나마 「동아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근무한다. 대학을 중퇴한 상섭이 사회인으로서 본격적인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후에 상섭은 오산학교 교사, 「동명」지 편집, 「시대일보」 사회부장 등을 거치면서도 문예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국내 최초의 동인지 「폐허」(1920. 7)의 창간호와 제2호의 탄생에 관여했고, 「폐허이후」도 편집했으며 소설도 15,6편이나 썼다. 문인이자 중견 신문인으로 활약하던 상섭은 1926년 야심을 품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가 2년 만에 돌아와서 결혼을 한다. 결혼한 후 그는 생활이 안정된 듯 창작에 전념하여 1931년에는 대표작 『삼대』를 집필하게 된다. 그후 4∼5년간 그의 창작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대표적인 장편들인 『삼대』『무화과』『백구』가 모두 이때 창작됐으며 상섭은 1936년 만주로 떠나기 직전까지 줄곧 붓을 놓지 않았다.



광복과 더불어 귀국한 상섭은 다시 편집일을 맡아보았다.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민족문학을 옹호하였고, 6·25가 일어나자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휴전 후에는 병이 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7,80매의 원고를 쓰는 무서운 정열을 보였다. 상섭은 장편 「취우」로 서울시문화상을, 1956년에는 「짓지 않는 개」로 아시아자유문학상을, 그리고 1957년에는 예술원공로상을, 1962년에는 정부로부터 문화훈장(대통령상)을 받았다. 한번도 자기의 집을 가져보지 못한 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 전세집에서 직장암으로 사망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나는 몇 개월간 불규칙한 생활로 피곤함과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 속에 계속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2학년 생물시간의 개구리 해부장면이다. 오장을 모두 빼앗기고 뾰족한 바늘 끝에 찔려 벌떡벌떡 고민하던 모양의 청개구리…. 그리고 실험하던 메스로 생각이 미치자 책상 서랍 속의 면도칼이 조심스러워졌고 급기야는 벌떡 일어나서 면도칼을 버렸다. 방을 떠나 여행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친구 H가 함께 평양에 가자고 잡아끌 때에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다.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한 후 우리는 대동강 주변을 거닐다가 장발을 한 신경질적인 하얀 얼굴의 남자를 만난다. 부벽루 근처에서 잠깐 잠이 든 '나'는 한 여인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는 꿈을 꾼다. 남포에 도착한 후 우리는 Y와 그의 동료인 A를 만났는데, 그들은 3원 50전에 3층 양옥집을 지은 어떤 미치광이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그 집을 구경하고 싶어서 친구들과 함께 그 미치광이를 방문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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