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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본실의 청개구리

염상섭 지음 | -
평양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그 다음 날 각각 헤어졌다. 그 후 두 달쯤 지나 하얀 눈이 내린 북국의 어느 한가한 마을에서 나는 Y의 편지를 받았다. Y는 자신이 펜을 든 까닭은 무슨 새로운 의의를 발견하고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3원 50전에 삼층 양옥을 지은 철학자의 예술적인, 혹은 신비한 최후를 알리려는 것이라고 했다. 김창억은 옥좌에 올라앉아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치 않으면 안 될 시기라고 생각하고는 신의 뜻으로 만든 3원 50원짜리 궁전을 더러운 속세에 두고 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유곽 뒤의 원두막에 불을 놓았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왜 불을 놓았는가? "추위에 못 견디어서라고 세상 사람들은 웃고 말 것이오. 그리고 당신더러 말하라면 현실폭로라는 네 자로 설명할 것이오. 신의 뜻에 따라서만 살 수 있다는 신념을 확실히 한 그는 이제는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삼층 위에서 뛰어내려 온 것이오. 그리고 그 건축물은 신에게 돌린 것이오." Y는 편지에 그 위대한 건물이 타 들어갈 때 김창억이 느꼈을 환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네로가 불길 속의 로마를 바라보며 하프에 맞추어 시를 읊듯이 그도 할렐루야를 외쳤을 것이라고.



기뻐하리라고 보낸 Y의 편지를 받고 나는 무겁고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까닭 없이 울고 싶어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자주 다니던 R동 고개로 나섰다. 사람 하나가 다닐 만한 길 오른편 언덕에는 짓다가 둔 헛간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늘 보았건만 삼층 양옥의 방화사건을 편지로 받고는 새삼스럽게 눈여겨보게 되었다. 나는 멍석조각을 가만히 쳐들고 그 집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기둥 두 개가 나란히 있었고 그 위에 나무 관 같은 것과 칠이 된 목판이 있었다.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 같이 꺼림칙하여 침을 뱉고 나왔다. 둑 위를 오르자 귀신이 씌어서 죽었다던 무녀의 새 무덤이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아무것도 할 용기가 없어서 몇몇 청년들이 몰려와 떠드는 속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쩐지 울고 싶었다. 김창억의 운명에 대한 호기심은 별로 없었으나 그가 어디로 돌아다니나 하는 생각이 나는 동시에 작년 가을에 대동강가에서 잠깐 본 장발 남자의 신경질적인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결국 김창억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더구나 그가 그렇게 싫어하던 평양에 나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두 번째 아내의 본가가 있는 평양에 왔다. 일년 열두 달 열어보는 일이 없이 꼭 닫은 보통문 밖에 보금자리 같은 짚더미 속에서 우물우물하기도 하고, 혹은 그 앞 보통 강가로 돌아다니는 걸인은 오직 대동강가의 장발객과 형제이거나 다만 걸인으로 알 뿐이요, 동리에서도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주인공 X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은 중학교 때의 개구리 해부장면이다. 이 부분은 에밀 졸라와 유사한 자연주의적 의식과 계획을 가지고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연주의는 문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연주의에서 묘사는 매우 자세하면서도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어조로 행해진다. 이 소설에는 청개구리를 실험대에 놓고, 청개구리의 심장이며 폐를 해부하는 것과 같이 인생이나 현실을 그와 같이 해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서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서 자는 아기 누이듯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곧 냉혈동물인 개구리의 내장에서 무슨 김이 모락모락 나느냐 하는 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그 당시 염상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국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목이나 청개구리의 해부장면은 그 시대의 한국문단에서는 매우 새로운 발상법으로 충격적이었다. '흥미' 본위로, 그것도 환상적인 요소가 많았던 그 시대의 소설기법으로부터 크게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치더라도 본격적인 자연주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실험장면의 부정확함 외에도 여러 한계가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나'는 어떤 여인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꿈을 꾼다. 주인공이 느끼는 '나'의 현실에 대한 불안과 초조, 권태와 죽음에 대한 이런 생각은 전통적인 소설에서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서구적인 것이다. 소설 「죽음의 승리」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이 잠깐 거명되는 부분도 있지만 '나'가 가지고 있는 에로틱하면서도 허무적인 죽음에 대한 생각은 가브리엘 단눈치오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는 세기말의 '죽음' 및 허무사상을 소설에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꼭 그 소설가의 영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타나는 퇴폐와 허무의 분위기 - 예컨대 '나'가 계속해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일을 귀찮아하는 - 는 낭만적 색조를 계속 만들기 때문에 실험적이며 과학적인 소설 쓰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주의와는 다소 대치되는 면이 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라고 제목을 삼는 것이라든지, 또는 개구리 해부장면을 의식적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자연주의를 의식적으로 표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작품에서는 병적이고 주정적인(낭만적인) 색조가 있다는 점이 1920년대 한국 자연주의 소설의 한계이기도 하다.이 소설을 간단히 말하면 내가 남포로 가서 김창억을 만나고 다시 돌아와 그에 관한 후일담을 듣는 이야기이다. 집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던 내가 남포까지 가서 김창억을 만나고 돌아오기까지는 나의 여행담이지만 그 후에 김창억이 미치는 과정이 상당 분량 서술되면서 주인공은 곧 김창억으로 바뀐다. 나는 청개구리 해부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서랍 속의 면도칼에 조바심을 치고 급기야는 밤중에 벌떡 일어나 그것을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이런 행동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비정상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 정상인이다. 반면 김창억은 3원 50전에 까치집 같은 원두막을 지어 놓고도 서양인들의 삼층 양옥집 운운해서 사람들의 비웃움과 조롱을 당하는 미치광이다. 이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나와 김창억은 닮은 점이 많다.



나와 미치기 전의 김창억은 모두 지식인으로 현실의 불합리함에 대해 고민한다. 나의 현재 정신상황은 답답하고 무기력해서 술이 제일 위로가 된다. '광기'나 '신념'이 술 이상의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현실의 답답함과 무기력을 잊는 수단의 하나로 광기를 인정한다. 이런 생각이 김창억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를 만나러 가게 한다. 이것은 '나'에게는 보기 드문 적극적인 행동이다. 김창억은 고향의 초등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평소 가까이 했던 성서 대신에 동경의 어느 대학에서 나온 정경과 강의록을 공부한다. 그 역시 현실의 불만에 대해 나름대로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죽음의 승리」의 주인공 졸지오로 여기면서 현대인은 다 졸지오 같다고 친구 H에게 말한 부분도 나와 김창억의 유사점을 암시한다. 졸지오는 마음의 고향이나 진정한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오직 육체적인 향락에만 관심이 있는 애인과 갈등을 겪는 지식 청년이다. 졸지오의 암담한 현실과 정력적인 애인의 관계는 김창억과 그의 두 번째 부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현실세계에 갇혀 꼼짝하지 못한다. 나는 술과 담배로 권태롭고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낼 뿐이다. 김창억을 가두고 있는 세계는 이보다는 구체적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몇 가지 불운을 그런 대로 헤쳐간다. 그를 미치게 한 궁극적인 원인은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것인데 이것은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그가 감옥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작품에 매우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김창억이 구속된 시기와 그가 가지고 있던 사상과 관련해서 3·1운동이라고 보는 논의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렇게 못박아 생각하지 않아도 김창억과 같은 양심적인 인간이 죄인이 되는 불합리한 현실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거대하고 폭력적인 현실 앞에 김창억은 드디어 광인이 되고 나는 그런 광인을 십분 이해하면서 간신히 삶을 지탱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일인칭과 삼인칭으로 번갈아가며 서술되기는 하지만 그 심리적인 배경에 있어서는 통일성을 가진 작품이다.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오장육부를 모두 빼앗긴 채 벌럭벌럭 고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표본실이라는, 자신의 몸이 해부되는 폭력적인 공간에 갇힌 가련한 작은 동물 청개구리는 현실의 거대한 벽에 갇혀 있는 '나'와 그 분신 김창억의 모습이다. 그나마 광인인 김창억은 자신의 생각을 강연의 형식으로 마음껏 펼치지만 나는 오장육부가 모두 빼앗긴 개구리 마냥 끊임없는 죽음의 충동에 시달린다.

사실 '나'가 왜 이렇게 우울한 심사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나와 김창억의 유사성을 통해 넘지 못할 현실의 벽에서 오는 어떤 절망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는 있다. 이 소설이 창작되던 1921년은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관적인 생각이 만연해 있었던 때다. 3·1운동에 걸었던 다소 낭만적이고 순진했던 기대가 좌절되고 현실정치가 나아지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길을 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이런 막막함에 대한 암담한 인식은 소설의 결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나의 암울한 심정과 김창억의 광증은 종말에 가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될 뿐이다. 나는 여전히 부랑자로 객지를 떠돌며 죽음의 숙명성에 대해 생각하고, 김창억은 끝내 제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부인을 찾아 평양으로 간다. 해결책이 없는 결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부당한 힘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말한다. 이런 외부 현실의 문제를 발견하는 데 광인을 등장시킨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광인을 광인으로 계속 두면서 정상인이 정상성을 유지하지 못 하는 점을 광인에 의하여 발견하고 문제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20년대 가치가 좌절되고 혼돈에 빠지고 고뇌에 찬 인물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개인생활이나 민족의 삶에 있어서 가치를 찾는 것이 불가능할 때 외부의 부당한 힘이 있을 때 만들어진 불안한 인간풍경에 대한 보고서라고 하겠다.1897 8월 30일 서울 종로구 고가나무굴(현 소격동)에서 아버지 규환과 어머니 경주 김씨의 육남 이녀 중 삼남으로 출생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였던 염인식이며 아버지는 전 주, 의성, 가평 등지에서 군수를 지냈다.

1902 할아버지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웠다.

1907 9월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 입학

1909 보성소학교로 전학

1910 보성중학교 입학

1911 보성중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 도쿄 마포중학 2학년에 편입, 일본 성학원(聖學院)으로 전학. 침례교 세례를 받다.1915 교토부립 제2중학으로 전학

1918 일본 교토로 옮겨 경도부립 제2중학을 졸업하고 게이오대학 문학부 문과에 입학했다. 쓰루가에 있는 당시 일본 야당 헌정회(憲政會)계에서 신문기자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같은 해 게이오대학을 중퇴하고 교토 도나(敦賀) 항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1919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오사카 천왕사 공원에서 조선노동자대회를 열어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3월 18일 밤에 검거되어 10개월간 투옥된다. 학업을 중단하다.

오사카감옥에 있을 때 담당검사의 호의로 문학서적을 보고 문학공부를 한다.

1920 요코하마의 복음인쇄소에서 직공으로 취직했다가 3주만에 병으로 그만둔다.

봄에 귀국해서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곧 사퇴한다. 「폐허」 창간 동인으로 참가한다. 10월에는 정주 오산중학교 교사로 재직한다. 4월에 첫 소설 「박래묘」를, 7월에 첫 시 「법의」를 발표한다.

1921 상경해서 주간지 「동명」의 기자로 일한다.「표본실의 청개구리」를 「개벽」에 발표한 다.

1922 단편 「암야」, 「E선생」, 중편「제야」를 발표한다.

「신생활」에 장편 「묘지」연재(3회로 중단하고 이후에 「만세전」으로 제목을 바꿈) 1923 '조선문인회' 결성에 참여한다. 주간지 「동명」의 편집장이 된다.

「동아일보」에 「너희들이 무엇을 얻었느냐」연재 시작

「동아일보」에 「해바라기」발표 (이후에 「신혼기」로 제목을 바꿈)

1924 소설집 『남방처녀』 『해바라기』 『견우화』간행. 중편 「묘지」가 『만세전』으로 출간 1925 「동명」이 「시대일보」로 바뀌면서 사회부장직을 맡았다. 「조선문단」 5호에 「전화」 발표

1926 「신흥문학을 논하여 박영희군의 소론을 박함」으로 프로문학파와 논쟁을 벌였다. 다시 일본으로 감. 단편 「초연」 「조그만 일」 「유서」 등 발표. 작품집 『고독』발간1927 「사랑의 죄」를 「동아일보」에 연재. 단편 「남충서」「밥」「미해결」「두 출발」등을 발표

1928 귀국해서 장편 「이심」을 「매일신보」에 연재

1929 5월 숙명여고 출신의 김영옥과 결혼한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장편『광분』을 「조선일보」에 연재. 「출분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신생」에 발 표

1930 단편 「세 식구」, 「타락」 발표

1931 장남 재용 출생

장편소설 『삼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후속편 「무화과」는 「매일신보」에 연재 1933 장녀 희경 출생

1934 「매일신보」에 입사하고, 「모란꽃 필 때」 발표

1936 「만선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만주로 가다.

1938 가족들이 모두 장춘으로 이주. 셋째 딸 희영 출생. 「삼천리」에 「자살미수」 발표1939 『사랑의 죄』출간. 만주 안동으로 이사한다.

일본인 주간과의 의견 충돌로 만선일보사 사퇴한다.

대동항 건설국 홍보담당으로 해방 때까지 근무한다.

1941 『이심』출간

1942 차남 재현 출생

1945 광복 후 만주 안동 조선인회 부회장직을 맡았다가 귀국한다.

1946 10년만에 서울로 돌아와서 창간된 경향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낸다.

1947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사생활

1948 「효풍」을 「자유신문」에 연재. 작품집 『삼대』 『만세전』 『삼팔선』 간행

1949 단편집 『해방의 아들』간행

1950 장편 「난류」를 「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6·25로 중단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해군으로 종군

1951 3월 해군 소령으로 임관해 해군본부 정훈감실 과장으로 근무

1952 장편 「취우」를 「조선일보」에 발표

1953 휴전으로 해군복무를 끝내고 서울로 와서 북아현동에 기거한다.

1954 장편 「미망인」을 「한국일보」에 발표

「취우」로 서울시문화상 수상. 초대 서라벌예대학장. 예술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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