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사와 T교수

김강사와 T교수

저자: 유진오
출판사: -
등록일: 2002-01-29
예술과 사상의 갈등과 정치가로서의 야망

유진오는 '식민지 현실의 지식인의 고뇌를 표현하는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이 표현의 타당성은 문인으로서의 활동과 소설 전부가 식민지 시대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그는 1920년 말에서 1930년대 전체에 해당하는 청춘을 숨막히는 식민지하에서 지냈고, 대부분을 대학 안에서 학생으로, 강사로, 교수로 지위를 수직상승시키며 살았다.



그는 이념적으로는 맑시즘적 경향을 보이지만 맑시스트 예술가 단체인 KAPF에는 가맹하지 않은 동반자 작가였다. 그는 대학시절 훗날 남로당의 예비 거물이 되는 이강국, 최용달과 사귀면서 좌익 서적을 윤독하고 논쟁했다. KAPF의 문인들은 가담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KAPF에 동조했지만 예술성에 관한 한 그렇지 않았다. 1928년 11월 「조선지광」에서 예술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고 선전의 목표로 쓰여서는 안 되며, 그렇지 못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의 사상과 고민을 담아 예술작품을 내던 그는 이강국 등의 친구들과 만든 비밀결사가 수색당하고 관련자가 연행되면서 시련을 겪는다. 비밀결사는 해체되고 그는 풀려났지만 그 충격으로 문단 데뷔 이후 처음으로 2년 동안 작품활동을 접는다. 자신의 무력감을 깨달은 그는 사상의 이상에서 벗어나 생활세계를 즉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아일보」 1939년 1월 13일자에서 주장했듯이 이상세계를 탈출하여 넓은 속물의 세계로 나서기로 결심한다. 미숙한 철학보다는 생활세계에 철저한 것이 위대하다고 고백한다. 지식계급의 현실적 무기력을 파악한 이 때부터 속물의 세계를 유심히 보고 작품화한다. 그는 머릿속에서 맑시즘 사상과 결별했다.



그리고 맑시스트에서 친일 작가로 대대적인 변모를 한다. 일제 말기 이광수와 함께 조선문단을 대표해서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서 개인주의를 버리고 동양주의적 문화를 확립하자고 강연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문학가로서의 면모를 버리고 정권이 바뀔 때 적극적으로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일조했다. 식민지 시대 경험했던 지식인의 무력감에 대한 보상을 정치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실제화했다. 유진오의 사상적 여정과 삶은 우리 역사의 한 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유진오는 비중 있는 식민지 지식인이 걸어야 했던 길을 그대로 보여준다.

유복한 유년기와 탄탄한 출세길

유진오의 호는 현민(玄民)이며, 문학가, 교육자, 정치가로 걸출한 업적을 쌓았다. 제1회 관비 일본 유학생 출신이며, 궁재부 제도국 참사관과 보성전문 법과 강사를 지내고, 한성은행 이사를 지낸 아버지 유치형과 어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1906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거기에 걸맞게 아버지를 따라 유년기부터 유명인을 만나는 유복한 생활을 한다. 또 어려서부터 수재의 기질을 다분히 발휘한다. 그는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떼고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일어와 산술공부를 가르쳤다. 8살이 되던 1910년에 폐위된 순종 황제에게 '축 성수무강'이란 붓글씨를 바쳐 지필묵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 부친을 따라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의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이 때의 기록이 나중의 『창랑정기』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추측된다.

유진오는 학장시절 내내 뛰어난 수재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1914년에는 제동공립보통학교에, 1919년에는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한다. 이 때에 절친한 문학 친구 이재학을 만나 문학에 대한 공감을 표출한다. 훗날 이재학과 함께 시잡지 「십자가」를 간행하게 된다. 1924년에 경성제일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 입학을 예비해서 치룬 '제1회 대학 예과 고등학교 입학 모의시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다. 대학시절에는 훗날의 거물들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했다. 남로당의 거물이 되는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와 이희승, 이효석 등의 친구를 만난다. 대학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동반자 작가로서의 바탕을 쌓기 시작한다. 또 그는 리더쉽을 발휘하여 대학예과 학생회 잡지 「청량」창간을 주도했다.



1926년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예과를 마치고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하고 '경제연구회'를 조직했다. 이 때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좌경파 교수는 유진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유복한 환경의 수재로 인정을 받아오던 유진오는 개인적인 불행을 경험한다. 그가 14살에 조혼했던 아내 성진순이 요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2년 후 박복례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안정된 가정을 꾸린다.



1927년은 유진오가 문학가로서 공식적으로 등단하는 해였다. 그는 「조선지광」에 「복수」, 「스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그룹 활동의 사회주의 경향이 작품 속에 녹아 있었다. 1929년 경성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형법연구실 조수로 일하면서 졸업생들과 학술잡지 「신흥」을 발간한다. 1930년에는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와 「마적」, 「귀향」, 「송군남매와 나」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당시 지식인들이라면 동조했던 사회주의 사상에 유진오 역시 동감했다. 때문에 KAPF로부터 가입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경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 전성기 때의 동반작가(同伴作家)로 「갑수의 연애」, 「빌딩과 여명(黎明)」 등의 작품을 썼고, 1938년 장편 「화상보(華想譜)」를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유진오는 문학가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한편으로 전공을 살려 교육자로서 두각을 서서히 나타냈다. 26살에 모교 예과 '법학통론'이란 과목으로 강사를 시작하고, 다음 해 보성전문학교 법과 강사로 출강한다. 이를 발판으로 훗날 보성(普成)전문학교 법학교수가 되었다.



1930년 후반은 유진오에게 사상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거친 풍파가 닥친다. 부모가 별세하고 자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진오의 사상적 동향은 일제 식민통치가 강화되면서 시련을 겪는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만든 '조선사회사정연구소' 일로 1932년 6월 새벽에 연행되었다가 곧 풀려난다. 이후 사상적 경향도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정치권력 속에서 근대사회를 엮어 나가려는 야망을 품고 적극적으로 정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1948년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면서 1951년 한일회담 대표로도 활약했다. 1952년 학계로 돌아가 고려대학 대학원장을 거쳐 총장에 취임하였는데, 1953년 국제법학회 회장에 피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이 해에 부인 박복례가 사망하고 2년 후 이용재와 결혼한다. 5.16 쿠테타 후에는 외교활동도 눈부셨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 유엔 한국협회장이 되었으며, 1964년 대한교육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 법전편찬위원에 선출되었다. 1966년에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다음 해 정계로 들어가 신민당(新民黨) 총재가 되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68년에 신민당 고문에 취임했다가 1970년에 병마로 사임했다. 1974년 고려중앙학원(고려대학 재단) 이사에 취임하고, 1980년 통일원 고문,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87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의 수재인 김만필은 일년 반 동안 실업자로 있다가 학창시절 사상운동을 한 것을 속이고 H과장에게 취업을 부탁한다. 평범하고 친절한 일본인 H과장은 S전문학교 교장에게 명령해 강사 자리를 얻어준다. 교장의 소개로 만난 일본인 T교수는 늘 웃으며 친절하게 그에게 조언을 해준다. 김만필은 T교수의 친절을 고맙게 생각한다. T교수는 김만필의 과거 행적을 소문 내기 시작하고 김만필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T교수가 김만필에게 연말에 과자상자를 사가지고 교장에게 인사를 가라고 조언해 준다. 김만필은 과자상자를 사고서 창피한 생각에 망설인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과자상자를 들고 전차에 오르는데….

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