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사와 T교수
유진오 지음 | -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김만필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 H과장의 소개로 S전문학교 강사 가 되지만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된다. T 교수 S전문학교 일본인 교수. 김만필에게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나 뒤에서는 약점을 이용해 그 의 파멸을 조종한다.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의 앞잡이로 위선적인 인물.H과장 조선에 와 있는 평민적이고 친절한 일본 관리인. 김만필을 S전문학교에 취직시켜준 장본인 이다. T교수의 술수로 김만필을 오해한다. 교 장 H과장의 밑에서 꼼짝 못하는 겉과 속이 추한 인물. H과장의 명령에 따라서 김만필을 강사로 취직시킨다. 조선 지식인에 대해서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취업을 위해 자기 모순을 감내하는 김강사인생의 모순의 축도를 자기 자신이 몸소 보이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지식계급이란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사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는 것이다.
문학사 김만필(金萬弼)은 동경제국대학 독일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학생 때 문화비판회의 멤버로 적지 않은 단련의 경력을 가졌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년 반 동안 실업자로 지내는 쓰라린 고통을 맛보았지만 아직도 책상물림의 도련님 티가 나는 청년이었다.
김만필이 탄 택시가 S전문학교 교문을 들어서 본관 현관 앞에 서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2학기 개학날인 오늘은 일년 반의 실업자 생활을 청산하고 전문학교의 강사로 새로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는 물어물어 교장실을 찾아갔다. 며칠 전 교장의 사택을 찾아갔을 때 교장은 김만필을 몹시 친절하게 대했다. 김만필은 그 때 교장을 시골집 행랑아범 대하듯 몹시 만만해했는데 지금 교장실에서 교장을 만나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거기다 교장은 전날과 달리 딴판으로 빳빳했다.
교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서너 번 울리자 옆방 문으로 뚱뚱한 모닝을 입은 친구가 허리를 굽실대며 들어왔다. 교장이 뚱뚱한 친구에게 종이조각을 가져오라고 했다. 교장이 김만필의 사령서를 주자 그는 공손히 받아들고 허리를 굽혔다. 그가 허리를 다 펴기도 전에 교장은 그의 머리 위에 대고 말을 퍼부었다. 학교의 직원이 되었으니 학교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조선 사람을 교원으로 쓰는 것은 처음이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김만필은 뚱뚱한 친구가 했듯이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교장이 뚱뚱한 친구를 T라고 소개하자 T는 아주 친절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김만필은 지금까지 그를 향하던 경멸의 눈을 거두고 도리어 황송해서 공손한 T에게 한층 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T교수는 김만필을 교무실로 안내했다. 김만필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취임식은 개학식이 끝난 뒤 간단하게 있었다. 위엄있게 보이기 위해 눈에 살기를 띈 교장이 김만필을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보기 드문 수재라고 소개했다. 김만필은 수백 명 학생들의 경례를 받자 정신이 아찔해 착잡한 심정으로 과거와 현재를 생각했다. 대학시절 문화비판회의 멤버로 활동한 일, 졸업 후 취업을 위해 평상시 멸시하던 N교수를 찾아갔던 일, N교수에게서 소개장을 받던 일, 서울에서 신문사에 독일 좌익문학운동을 소개했던 일, H과장의 소개로 작년 가을 S전문학교 교장을 찾던 일이 떠올랐다. 모두 모순된 일이었다.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계급의 수많은 인격과 자신이 가진 인격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취임식이 끝나고 강당을 나올 때 T교수가 김만필 옆으로 다가오면서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김만필은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색한 신참 김강사와 지나치게 친절한 T교수김만필은 T교수의 이외의 열변에 기가 막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충심으로부터 미움에 타고 있었다. 신참자인 김강사에게 들려주는 친절한 조언으로 듣기 에는 좀 정도가 지나치리라고 생각되리만치.
김만필은 처음 서는 교단이라 실수하지 않으려고 밤늦도록 기초 독일어 발음부터 다시 하나하나 연습해 보았다. 아침에 교원실은 요란스러웠다. 선생님들은 웃으며 의미없는 말을 끝없이 나누었다. 원래 말수가 적은 김만필은 조용히 신문실로 들어가 독일 신문을 펴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T교수가 나타나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T교수는 학생들이 젊은 선생을 시험하니까 잘 하라고 조언을 했다. 김만필은 일부러 귀띔해 주는 T교수가 몹시 고마웠다.
T교수가 뚱뚱한 몸을 흔들며 나갔다. 김만필이 문화비판 회원이었던 것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당할 것은 뻔하였다. 또 교장이 N교수와 알고 지낸 H과장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강의를 주었기 때문에 학교 안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T교수의 친절은 믿음직했다. 김만필은 T교수의 조언도 있고 해서 학생을 몹시 경계했으나 학생들은 예상보다 얌전했다. 질문을 하면 원수를 만난 듯 경계했으나 학생들은 오히려 호기심과 동정을 보냈다.
수업이 끝나자 T교수는 교단의 감상을 친절히 물어주었다. 김만필은 학생들의 테스트에 합격을 했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T교수는 흥분하면서 스즈키와 야마다, 김흥규라는 학생을 주의하라고 했다. 김만필은 신참에게 하는 조언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 T교수의 눈에 비친 미움을 보았다. 마침 급사가 와서 T교수가 교무계로 갔다. 김만필은 T교수의 인격상 결함 탓인지, 자신이 책상물림의 티를 못 벗은 탓인지 의아해하며 몹시 우울해했다. 그러면서 그는 T가 열변을 토한 스즈키란 학생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김강사의 약점을 소문내는 T교수김만필은 T교수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T교수가 배우는 조선말과 김만필과의 사이에 무슨 연락이 있단 말인가? T교수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김만필에게 친밀의 감정을 표시하기 위한 것 같았으나 김만필은 무슨 말이 또 나올는지 몰라 슬그머니 겁이 나는 것 이었다.
며칠 지나 토요일 밤에 김만필은 H과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찾아갔다. 조선에 와 있는 관리 중 퍽 평민적이고 친절한 신사인 H과장이 억지로 떼를 쓰지 않았으면 그는 S전문학교 강사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H과장의 집에 들어가는 골목에서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과자상자를 옆에 낀 T교수가 있었다. T교수는 김만필의 어깨를 툭 치면서 비밀이 서로 통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미소를 지었다. 김만필은 T교수의 과자상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날 밤 H과장 집에서 나온 후 T교수는 자꾸 어디든지 가서 차라도 마시자고 졸랐다. 김만필은 그를 따라갔다. 찻집에서 차를 시켰다. T교수는 김만필의 일을 작년부터 알고 있으며, H과장에게 말을 듣고 교장에게 자신이 직접 추천했다고 했다. 김만필은 T교수에게 몹시 야비한 느낌을 받았지만 고맙다고 인사했다. 적어도 T교수가 H과장의 명령을 교장에게 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T교수는 김만필이 작년에 쓴 「독일 신흥작가 군상」이라는 논문을 읽고 감복했다고 했다. 그는 T교수의 내심을 알 수 없어서 겁이 났다. 그 논문은 독일 좌익 작가의 활동을 소개한 것이어서 S전문학교에서 강사를 하려면 절대 비밀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T교수의 칭찬은 도리어 위협으로 들렸다. 도대체 T교수가 어떤 이유로 억지 친절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찻집을 나와 다른 술집에 들어갔다. 술을 마시고 나와 T교수는 택시를 잡았다. T교수는 그의 집도 이미 알고 있었다. T교수는 김만필에게 학교의 심술궂은 독일어 강사 C군을 조심하라고 했다. 김만필은 수수께끼 같은 T교수의 말이 악몽과 같아 빨리 T교수의 옆을 떠나고 싶었다.
이후 김만필은 일주일에 이틀 출근을 했다. 그는 외양과 맘씨 모두 추한 교장, 지나치게 친절한 T교수, 제 잘난 척에 떠드는 교원, T교수가 주의하라고 한 C군 모두가 보기 싫었다. 교실에서는 T교수가 조심하라고 한 스즈끼라는 학생과 대화해 보았다. 별로 문제 있는 학생 같지 않았다. 스즈끼가 찾아와 김만필이 문화비판회원으로 활동한 것을 물었다. 김만필이 그런 소문을 어디서 들었냐고 하자 T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다고 했다. 스즈끼가 학교의 독일문학 연구그룹에 참가해 달라고 진실되게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T교수의 현실 타협 권유에 고민하는 김강사그 날 밤에 김강사는 명치옥에 가서 서양과자를 한 상자 샀다. 윗덮개에 교장의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자기 명함을 붙였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종시 두 가지 의사가 싸우고 있었다. 창피하다. 아무리 자리를 위해서라 해도 차마 이 짓만은 할 수 없다. 이제 이왕 노염을 산 다음에야 이까짓 과자상자를 사다 주면 무얼 하느냐, 도리어 노염을 돋울 뿐이 다.
스즈끼가 간 후 김만필은 우울해졌다. S전문학교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은 강박관념에 쪼들리는 듯했다. 그는 점점 더 말을 하기 싫어져 교장도, T교수도, H과장까지도 영영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T교수는 가끔 스스로 김만필을 찾아와 말을 붙였다. 교장은 가을 이후 겨우 두서너 번 마주쳐 간단히 인사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차차 학교 분위기를 파악했다. 학교 안에는 교장과 T교수의 일파와 T교수가 조심하라고 한 C강사와 물리학의 S교수 일파가 대립하고 있는 듯 했다. 김만필은 어느 편에도 가담할 자격이 없었으나 교장과 T교수에 대한 반감으로 슬며시 C를 동정했다.
어느 날 김만필은 T교수와 마주쳤다. T교수는 연말이니 과자상자를 사들고 교장에게 인사를 가라고 했다. 김만필은 할 말이 없어 비뚤어진 웃음으로 대답했다. T교수가 대체 무슨 동기로 그런 말을 했는지, 조롱인지, 친절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T의 말로 보아 교장이 자신에 대해 몹시 불쾌하게 생각함을 짐작했다.
그 날 밤 김강사는 서양과자 한 상자를 샀다. 덮개에 교장 이름과 자신의 명함을 붙였다. 그러나 이런 짓까지 하면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창피한 마음과 이왕에 노염을 받았는데 과자상자를 가져다 준다고 무슨 소용이랴 하는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과자를 가져다 주면 등 뒤에서 T교수가 조소할 것 같았다. 또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받는 자의 인격의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김만필은 과자상자를 교장의 집에 가지고 갈 용기가 없었다. 가던 중 전차에서 내려 한참을 헤매다가 욕심쟁이로 일가 간에 따돌림을 당하는 아주머니에게 과자상자를 주었다. 아주머니는 영문도 모르는 뜻밖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T교수의 이중성과 김강사의 파멸"T 말이 과장께서 좀 만나자고 하신다기에…." "만나자고 해야만 만나겠나. 자네한테 긴 할 때는 자꾸 찾아오고 자네한테 일없이 되니까 발을 뚝 끊는 그런 실례의 경우가 어디에 있나! 그러기에 조선 사람은 배은망덕을 한다고들 하는 게야."
어느덧 겨울방학이 지나 새해가 되고 개학을 했다. 김만필은 그 동안 아무데도 찾아가지 않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피곤해졌다. 스스로 모순을 헤쳐나갈 방법과 용기를 찾지 못했다.
하루는 겨울 동안 더 뚱뚱해진 T교수가 웃음을 띠며 김만필을 찾아와 집으로 가는 길에 어디로 가자고 했다. 김만필은 지금까지 T교수와 접촉해서 유쾌한 기억이 없었지만 어쨌든 또 따라갔다. 두 사람은 예전의 찻집으로 갔다. T교수가 H과장이 좀 만나자고 한다면서, 요전 과자상자라도 사서 인사하라고 했는데 왜 실수를 했냐며, 잘만하면 시간도 더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동정을 했다. 김만필은 그럴 듯했지만 어쩌면 T교수가 뺨 치고 만져주는 수작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그 날 밤 H과장을 찾아갔다.
H과장 집 현관에는 손님의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H과장은 일상의 온후한 안색은 없이 화가 난 얼굴로 김만필을 노려보았다. 그는 김만필이 들어서자마자 무엇하러 왔냐며 쏘았다. 김만필은 T교수에게 H과장님이 만나고자 한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H과장은 만나자고 해야 만나고 발길을 뚝 끊으니 조선사람이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 했다. H과장은 취직을 청할 때 사상면으로는 절대로 관계가 없다고 속여 자신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며 화를 냈다. 김만필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적 없다고 버텨보았다. H과장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떠밀고 몸을 벌떡 젖혔다. 그 때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언제나 한결같이 벙글벙글 미소를 띤 얼굴의 T교수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지식인 소설로서의 「김강사와 T교수」가 가진 독특함「김강사와 T교수」는 소재적 차원에서나 주제적 차원에서나 전형적인 지식인 소설이라고 불린다. 우선 소재적 차원에서 볼 때, 주인공이 지식인이며, 배경이 학교이다. 또 주변인물 역시 교수나 교장, 학생 등의 지식인을 내세우고 있다. 주제적 차원에서 보면 「김강사와 T교수」는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모순에 대한 갈등을 포착해서 형상화했다. 또한 취업문제와 같은 경제적인 고민과 취업 후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해야 하는 처세술, 사회를 보는 시각을 은폐해야 하는 정치적 고뇌를 지식인의 입장에서 잘 묘사했다.
지식인에 대한 비판은 사고에 대한 실천력의 부재, 유약함 또는 회의적이라는 점에 집중되었다. 「김강사와 T교수」는 배운 것을 실천할 장을 마련해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고 사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판적, 냉소적, 회의적으로 보는 지식인 소설과는 다른 독특함을 가졌다. 「김강사와 T교수」는 현실과 자아의 갈등 양상과 현실의 승리과정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문제는 작가가 현실과 지식인의 대립양상이 취업 전이 아니라 취업 후로 옮겨왔다는 데 있다. 지식인의 취업과 실직의 문제 자체보다도 취업한 이후에 지식인이 어떤 고민을 하면서 자기 분열을 경험하고 현실과 괴리되어 가는가를 면밀히 분석한 것은 작가의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1930년대의 현실을 살아가는 지식인의 중첩된 인격「김강사와 T교수」에서 김만필은 과거 경력을 속여가며 취업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일제하 대학시절 사상활동을 해서 낙인이 찍힌 자이며, 식민지하에서 조선인이기 때문에 편견 속에 살아가야 했던 자이다. 그는 학창시절에는 문화비판회의 한 멤버로 사회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혈기에 찬 젊은이였지만 졸업 후에는 취직을 위해 평소에 멸시하던 교수를 찾아다녀야 했다. 교수의 소개장을 받고서도 한편으로는 신문사에 독일의 좌익운동을 소개하면서 사회 비판행위를 계속 이어나갔다. 이런 모순된 행동은 교장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김만필이 취업 전에 교장을 찾아갔을 때 교장은 김만필을 친절히 대했고, 김만필은 교장을 마치 행랑아범 대하듯 했다. 그러나 취업 후에는 교장은 김만필을 전과 아주 딴판으로 유세를 떨면서 대했고, 김만필은 일개 시간강사임을 자각하여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수재가 졸업 후에도 일년 반이나 취직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실력인정 사회가 아님을 보여준다. 취업은 힘이 있는 누군가의 부탁과 명령이라는 줄을 타야만 가능했다. 김만필의 취업은 인생의 모순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었다. 그는 지식계급이란 것이 사회에서 이중, 삼중, 아니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식계급은 사회의 모순을 통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회는 비판력과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의 모순은 지식인에게 지식이 이끄는 정의의 충동을 억제하고 떳떳해야 하는 과거 행적을 숨기게 한다. 거대한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개인은 삶의 기반을 상실당하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수많은 인격 중에 자기의 정말 인격을 명확히 쥐고 있지만 어떤 자는 자기 자신의 수많은 인격에 혼란을 겪다가 어떤 것이 자기 것인지 모르게 되어 파멸하고 만다. 김만필은 그 때문에 취업을 하면서 대학시절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진짜 인격을 저버리고 다른 인격을 중첩해 뒤집어 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인격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내 갈등하고 만다. 세상에 아부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자기의 세계관을 펼치지도 못 하고, 좌절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현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