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여인 허영숙과의 숙명적 사랑
이광수는 잦은 운명적인 만남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열한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운명적으로 동학교도가 되고, 그 인연으로 동경 유학을 떠났으며, 동경에서 벽초 홍명희와 호암 문일평을 만나 훗날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대륙 유랑의 길에서는 단재 신채호를, 오산학교로 돌아와서는 인촌 김성수를, 임시정부 활동 시기에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면서 거듭되는 운명적 변신을 했다. 그의 운명적 만남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운명의 여인 허영숙과의 만남이다.
이광수와 허영숙이 어떻게 만났는가는 확실치 않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연애사건은 당대로서 워낙 센세이션한 사건이었기에 그만큼 소문도 무성했다. 여러 일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여의전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소개한다.
당시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광수는《매일신보》로부터 소설연재 청탁을 받는 행운을 잡는다.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이것이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무정》창작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이광수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고에 쫓기면서 연재소설을 쓰다보니 무리가 되어 각혈을 하자 여의전 부속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단돈 60전이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려는데 한 여성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녀가 바로 허영숙이었다. 당시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를 꿈꾸며 여의전에서 유학 중이었고, 이광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타국에서 병을 앓는 조국 청년이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그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폐병 2기라는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이광수는《무정》을 집필했고, 무리한 작업으로 인해서 하숙방에 피를 쏟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하숙집 주인에게 이광수는 허영숙을 불러달라 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허영숙의 간호로 그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집필에 열중한다. 그러던 어느날 허영숙은 이상한 예감에 그의 하숙집을 방문하는데, 그때 이광수는 각혈을 하고 주인집의 밥 짓는 연기에 질식해 죽음 직전에 있었다. 허영숙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이광수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이 바로 나의 생명이라고.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당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무정》의 폭발적 인기로 이미 이광수는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문제는 당시 이광수가 이미 결혼해 처자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광수는 아내와 이혼을 하지만, 허영숙의 집안에서는 한사코 그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운명을 걸고 중국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이에 대해 여론은 들끓었다. 그 사이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한다. 그동안 허영숙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 이광수가 위독하다는 기사가 나가자 허영숙은 처녀의 몸으로 이광수를 찾아 단신 상해로 찾아간다. 일본의 폭압이 가중되고 곳곳에서 도적떼들이 난무하는 상황에 여자 혼자서 그 먼 거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상해는 발칵 뒤집히고 몇 가지 오해로 말미암아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백범 김구는 허영숙 체포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광수가 무사한 것을 본 허영숙은 먼저 귀국하고 뒤따라 귀국하던 이광수는 압록강에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파란만장했던 춘원의 생애
이광수는 1892년 음력 2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이종원과 충주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으로는 보경, 아호로는 호주, 외배, 올보리, 춘원 등이 있고, 필명으로는 경서학인, 장백산인 등이 더 있다. 1902년 콜레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8일 사이에 잃고 고아가 된 그는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동학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1909년《백금학보》에 일본어로 쓴〈사랑인가〉를 발표했고, 이후 단편〈어린 희생〉,〈무정〉등을 발표했다. 조부가 위독하다는 전보로 귀국했다가 오산학교 교원으로 눌러앉은 그는 대륙 유랑의 길을 떠났다가,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상과에 편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7년 한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랄 수 있는 장편 《무정》과 《개척자》를 차례로 연재하여 세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상해로 탈출하여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년 도산 안창호의 영향으로 흥사단에 입단했는데, 도산의 준비론 사상은 죽을 때까지 이광수의 뇌리 속에 남아 그의 운명적 결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허영숙과의 애정행각의 결과 변절자, 친일파로 매도된 그는 1922년 평론〈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우리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소박한 논지는 민족적 열등감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아부하는 내용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매도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의 배려로 1923년 《동아일보》를 통해 단편〈가실〉과 장편 《선도자》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나자 1932년 장편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3년 《조선일보》부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유정》, 《그 여자의 일생》등을 발표하고 1934년 《조선일보》를 사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며, 이후 이름을 일본식인 향산광랑(가야마 미쯔오: 香山光郞)으로 개명하고 배지황군위문단 등에 협력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파로서의 길을 걷는다. 1944년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던 그는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우두머리로 꼽혀 반민족행위 처벌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혈압과 폐렴으로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고, 그해 7월 납북되었다가 자강도 만포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세종대왕 23년 7월 23일, 큰 슬픔의 주인이 될 아기(단종)가 탄생한다. 세종대왕은 학사 신숙주와 정인지를 보며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한다. 아기를 낳은 현덕빈 권씨는 아기를 분만한 지 하루 만에 숨을 거둔다. 얼마 후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석 달 만에 그 역시 승하함으로써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른다. 문종대왕이 승하할 때, 수양대군에게는 한마디 고명도 하지 않았는데, 수양은 그것이 분하기만 하다. 때마침 찾아온 권람에게 수양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은근히 물어보는데 권람은 모략있는 사람으로 한명회를 추천하고 끌어들일 사람으로 정인지를 추천한다. 경덕궁직 한명회는 벼슬은 미미하지만 재주도 있고 엉큼스러웠다. 어느날 수양대군 궁으로 간 한명회는 수양의 내심을 떠보는 말을 하고 수양대군은 그를 붙잡고 계책을 묻는다. 한명회는 불평객들을 불러모아 힘을 기르라고 말하고, 그 후로 한명회와 수양대군 권람 등은 수시로 만나 비밀스러운 논의를 하기 시작하는데……
이광수는 잦은 운명적인 만남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열한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운명적으로 동학교도가 되고, 그 인연으로 동경 유학을 떠났으며, 동경에서 벽초 홍명희와 호암 문일평을 만나 훗날 민족주의자로 변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대륙 유랑의 길에서는 단재 신채호를, 오산학교로 돌아와서는 인촌 김성수를, 임시정부 활동 시기에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면서 거듭되는 운명적 변신을 했다. 그의 운명적 만남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운명의 여인 허영숙과의 만남이다.
이광수와 허영숙이 어떻게 만났는가는 확실치 않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연애사건은 당대로서 워낙 센세이션한 사건이었기에 그만큼 소문도 무성했다. 여러 일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여의전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소개한다.
당시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광수는《매일신보》로부터 소설연재 청탁을 받는 행운을 잡는다. 실로 파격적인 대우였는데, 이것이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무정》창작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이광수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고에 쫓기면서 연재소설을 쓰다보니 무리가 되어 각혈을 하자 여의전 부속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 갔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단돈 60전이 고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려는데 한 여성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녀가 바로 허영숙이었다. 당시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성 의사를 꿈꾸며 여의전에서 유학 중이었고, 이광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타국에서 병을 앓는 조국 청년이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그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폐병 2기라는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이광수는《무정》을 집필했고, 무리한 작업으로 인해서 하숙방에 피를 쏟을 수밖에 없었다. 놀란 하숙집 주인에게 이광수는 허영숙을 불러달라 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허영숙의 간호로 그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집필에 열중한다. 그러던 어느날 허영숙은 이상한 예감에 그의 하숙집을 방문하는데, 그때 이광수는 각혈을 하고 주인집의 밥 짓는 연기에 질식해 죽음 직전에 있었다. 허영숙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이광수는 비로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이 바로 나의 생명이라고.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당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무정》의 폭발적 인기로 이미 이광수는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문제는 당시 이광수가 이미 결혼해 처자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광수는 아내와 이혼을 하지만, 허영숙의 집안에서는 한사코 그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운명을 걸고 중국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이에 대해 여론은 들끓었다. 그 사이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한다. 그동안 허영숙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다. 일본 아사히 신문에 이광수가 위독하다는 기사가 나가자 허영숙은 처녀의 몸으로 이광수를 찾아 단신 상해로 찾아간다. 일본의 폭압이 가중되고 곳곳에서 도적떼들이 난무하는 상황에 여자 혼자서 그 먼 거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렇기에 상해는 발칵 뒤집히고 몇 가지 오해로 말미암아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백범 김구는 허영숙 체포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광수가 무사한 것을 본 허영숙은 먼저 귀국하고 뒤따라 귀국하던 이광수는 압록강에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하기에 이른다.
민족주의자에서 친일파로, 파란만장했던 춘원의 생애
이광수는 1892년 음력 2월 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이종원과 충주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으로는 보경, 아호로는 호주, 외배, 올보리, 춘원 등이 있고, 필명으로는 경서학인, 장백산인 등이 더 있다. 1902년 콜레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8일 사이에 잃고 고아가 된 그는 독학으로 일본어를 익히고, 동학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다. 1909년《백금학보》에 일본어로 쓴〈사랑인가〉를 발표했고, 이후 단편〈어린 희생〉,〈무정〉등을 발표했다. 조부가 위독하다는 전보로 귀국했다가 오산학교 교원으로 눌러앉은 그는 대륙 유랑의 길을 떠났다가,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다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상과에 편입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7년 한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랄 수 있는 장편 《무정》과 《개척자》를 차례로 연재하여 세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상해로 탈출하여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20년 도산 안창호의 영향으로 흥사단에 입단했는데, 도산의 준비론 사상은 죽을 때까지 이광수의 뇌리 속에 남아 그의 운명적 결단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허영숙과의 애정행각의 결과 변절자, 친일파로 매도된 그는 1922년 평론〈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우리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소박한 논지는 민족적 열등감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아부하는 내용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매도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의 배려로 1923년 《동아일보》를 통해 단편〈가실〉과 장편 《선도자》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나자 1932년 장편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3년 《조선일보》부사장으로 취임했으며, 《유정》, 《그 여자의 일생》등을 발표하고 1934년 《조선일보》를 사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며, 이후 이름을 일본식인 향산광랑(가야마 미쯔오: 香山光郞)으로 개명하고 배지황군위문단 등에 협력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파로서의 길을 걷는다. 1944년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던 그는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우두머리로 꼽혀 반민족행위 처벌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혈압과 폐렴으로 병상에 누운 상태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고, 그해 7월 납북되었다가 자강도 만포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세종대왕 23년 7월 23일, 큰 슬픔의 주인이 될 아기(단종)가 탄생한다. 세종대왕은 학사 신숙주와 정인지를 보며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말을 한다. 아기를 낳은 현덕빈 권씨는 아기를 분만한 지 하루 만에 숨을 거둔다. 얼마 후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3년 상을 치른 문종대왕이 왕위에 올랐지만 석 달 만에 그 역시 승하함으로써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른다. 문종대왕이 승하할 때, 수양대군에게는 한마디 고명도 하지 않았는데, 수양은 그것이 분하기만 하다. 때마침 찾아온 권람에게 수양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은근히 물어보는데 권람은 모략있는 사람으로 한명회를 추천하고 끌어들일 사람으로 정인지를 추천한다. 경덕궁직 한명회는 벼슬은 미미하지만 재주도 있고 엉큼스러웠다. 어느날 수양대군 궁으로 간 한명회는 수양의 내심을 떠보는 말을 하고 수양대군은 그를 붙잡고 계책을 묻는다. 한명회는 불평객들을 불러모아 힘을 기르라고 말하고, 그 후로 한명회와 수양대군 권람 등은 수시로 만나 비밀스러운 논의를 하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