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정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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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
산산이 깨져버린 ‘표현의 자유’에 문단은 절망했다
1980년은 새로운 10년을 여는 희망 찬 첫해가 되지 못했다. 지난해의 12ㆍ12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이 나라의 미래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는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월에 접어들면서 계엄 해제와 민주화 등을 요구하는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격화됐고, 상대적으로 국가권력을 통째로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진행됐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황은 1970년대의 유신 시절보다 오히려 더 혹독한 측면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를 중심으로 반체제 저항운동을 벌여온 문인들도 정세의 흐름을 지켜보며 관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주화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그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동시에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터지면서 그 기대는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문단의 위기의식도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는 가운데, 그해 8월 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부터 이듬해인 1981년 2월 25일 다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까지 각종 매체에는 몇몇 문인들의 희한한 글들이 잇달아 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축하하고 그 지도자를 찬양하는 글들이었다. 누군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기도 어려웠겠지만 대개는 새 정치권력의 보이지 않는 압박에 못 이겨 쓴 글들이었다.
어지러운 시대, 문인들의 두 모습
스타트를 끊은 사람은 신진 여류 작가 강유일이었다. 강유일은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거행된 ‘전두환 대장 전역식’의 참관기를 한 신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전두환이 ‘두려운 절망의 늪으로부터 국민을 구해냈다’고 칭송하고 릴케의 글을 인용해 이 여름이야말로 ‘위대한 여름’이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뒤이어 중진 시인 조병화는 전두환 대통령 당선 경축시를 발표했고, 제도권 문단의 구심체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조연현은 전두환 대통령 취임사를 듣고 난 소감을 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연현은 취임사가운데 ‘문화예술인의 자주적이며 창의적인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대목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면서 제5공화국이 우리 민족문화 발전의 초석을 다질 것이라 기대했다.
이듬해인 1981년 초 제12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서정주는 투표 이전에 이미 당선이 확실했던 전두환 후보의 찬조연설에 ‘동원’됐고 당선 후에는 ‘당선 축시’를 발표했다. 서정주는 그 후에도 1987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이 회갑을 맞았을 때 한 신문에 ‘전두환 대통령 56회 생일 축시’를 헌정했는데 문단에서는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일흔두 살을 넘긴 한 나라의 최고 시인이 열여섯 살 아래인 젊은 사람의 생일에 축시를 써 바친 것은 모양새도 좋지 않을뿐더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이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이호철ㆍ고은 등 중견 문인들이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김현ㆍ김치수ㆍ염무웅을 비롯한 여러 교수 문인들이 까닭도 모른 채 강제해직됐고, 월문리에 살던 송기원의 노모가 자식을 기다리다 지쳐 대문의 문고리에 목을 매 자살하는 등 문인들의 시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문단을 이끌고 있는 몇몇 지도층 문인들이 보인 새 정치권력에 대한 그 같은 찬양 행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어지러운 시대에 우리 문인들이 보여준 상반된 두 모습이었다.
[ 저자 소개 ]
정규웅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문화부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앙일보사 재직 중 10년간 문학 기자로 일했고, 1980년대 초에는 약 2년에 걸쳐 계간문예지 《문예중앙》 편집책임을 졌다. MBC TV 〈독서토론〉 사회를 맡았으며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붉은 꽃 나혜석》《나혜석 평전》《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휴게실의 문학》《오늘의 문학현장》《글동네 사람들》《글동네에서 생긴 일》《추리소설의 세계》, 번역서로는 《애너벨 리》《지하철 정거장에서》《케네디가의 여인들》등이 있다. 《그림자놀이》《피의 연대기》《세 남자 세 여자》등 몇 편의 추리소설을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