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기인, 비트겐슈타인
"정신과학클럽 모임에서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됐을 때 누군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그는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논리철학논고》(앞으로는 《논고》)의 그 유명한 저자가 ...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르고 갈색이었으며, 독수리형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옆모습과 숱이 많은 갈색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서두가 잘 안 풀리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마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갑작스런 손짓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기대에 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이러한 진풍경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으며, 나중엔 거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됐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말콤이 그를 처음 만난 광경을 기술한 이 말은 생애와 철학 둘 다에서 보여준 그의 비범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거대 강철 회사 주인의 5남 3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정교한 기계를 잘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 비행기나 재봉틀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7살 때 그는 볼츠만 밑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려고 그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헤르츠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그 다음에 그는 영국의 맨체스트 공과대학에서 항공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때 그가 만든 정교한 제트 엔진 모형은 현재 제트 헬리콥터의 선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은 기계엔진에서 유체역학으로 그리고 순수수학으로, 점차 근본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자네는 절대 비행기 조종사가 되면 안돼!
1910년경 수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러셀의 《수학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책을 접하게 됐다. 그는 이 책에서 찬양하고 있는 수학자며 철학자인 독일의 프레게를 먼저 찾아가 공부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러셀에게 배우라고 권했다. 러셀은 프레게 철학의 기본 개념인 집합 개념에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프레게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 사람이었다. 러셀이 동료 교수인 무어에게 새로 들어온 이 학생이 천재냐 바보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어는 천재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에 찬 표정을 나타내는 친구는 그 뿐이니까."
1912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찾아갔다.
"제가 완전히 백치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백치라면 저는 비행기 조종사나 돼야겠습니다. 백치가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이에 러셀은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써오라고 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 논문의 첫 구절을 읽고 큰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안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되네."
케임브리지에서 다섯 학기를 수강한 후 노르웨이의 시골에 자기 손으로 오막살이를 하나 짓고 혼자 은거하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이 면제됐음에도 포병장교가 돼 군에 참여했다가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포로가 됐을 때 그의 배낭 속에는 《논고》의 원고가 들어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논고》의 핵심 사상, 즉 '한 문장은 하나의 그림이다'란 생각을 군에 있으면서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서 어디선가 어떤 자동차 사건이 발생한 것을 도형인가 지도인가로 묘사해 놓은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이때 그에게 이 지도는 문장이고, 그 안에 문장의 본질, 즉 실재를 그려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 포로에서 풀려 돌아온 그에게는 전쟁 직전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릴케 등에게 익명으로 돈을 희사하는 등,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극히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옷차림은 극히 소박하여 넥타이나 모자를 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그의 가구란 고작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몇 개의 딱딱한 나무의자가 전부였다.《논고》의 완성과 지극히 멋진 삶
그에게 《논고》의 완성은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고》는 적어도 그에게는 2,500년에 걸친 서양 철학의 미로로부터 탈출을 의미했다. 이제 더 골치를 썩혀야 할 철학적 문제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는 일 뿐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선생의 길을 택했다. 교사 양성교육을 받고 1920년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됐지만 그 삶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교육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되지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6년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고 다음으로 택한 일은 손발을 움직여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가 됐다.
그 후 그는 건축설계사가 돼 비엔나에 있는 그의 누나 집을 2년여에 걸쳐 설계했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비엔나 대학의 슐리크를 만나게 된다. 슐리크는 20세기초 영미철학을 풍미한 논리실증주의를 제창한 비엔나 서클의 영도자였는데, 1921년 출판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고 감동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들의 접촉으로 《논고》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1929년 초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풍문에 의하면 그가 다시 철학을 시작하는데 자극을 준 것은 1928년 3월에 있었던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의 강연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논고》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후기 철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출판을 극히 꺼려 그 사색의 결과는 다만 그가 써 놓은 노트로만 남아있다. 이 노트는 나중에 그가 죽은 후 책으로 출간됐는데, 《철학적 고찰》, 《철학적 문법》, 《청색본》, 《갈색본》,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등이 그것이다.
1936년 그는 노르웨이의 오막살이로 가 약 1년간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를 집필했다. 이 책은 그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했던 두 권 중 다른 하나인데, 1949년에야 집필이 완료돼 결국 사후에나 출간됐다. 1939년 그는 마침내 무어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그의 강의는 독특했다. 강의는 그의 방이나 친구 방에서 했고, 청중은 엄격히 제한했는데, 그것도 몇 년 동안 계속 듣는 사람에 한했고, 시간은 엄수해야 했다. 강의는 노트도 원고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해 논의를 전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지만 대학사회 역시 그에겐 맞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고 높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식당 분위기를 못 참아 자기 방에서만 식사를 했다. 마침내 1947년 사직서를 내고 아일랜드의 시골 농촌과 해안 가에서 은거하며 철학적 사유의 투쟁을 계속했다. 1951년 그는 2년여의 암과의 투쟁 끝에 그는 삶을 마감했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의사가 2-3일 밖에 더 못 살겠다고 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을 남겼다. "좋습니다. 나는 멋진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내 친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논고》는 약 2만여 자로 이뤄진 짧은 책이다. 서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스스로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생각에가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긋고자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조차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는 언어 속에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논고》의 목적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눠 줄 어떤 한계선을 그어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바로 언어비판이다. 그 선을 그어줌으로써 우리는 그 선 안에 있는 언어 표현들은 의미있는 것으로, 그 선 너머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분명히 구분한 후에는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선을 긋는 기준이 무엇이냐?'다. 그 대답이 바로 그의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다.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진이 실재의 모습을 색깔의 조합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언어도 실재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그려낸다는 것, 이것이 그의 그림이론의 핵심이다. 《논고》는 바로 그런 그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언어는 바로 이렇게 실재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다. 그렇지 않은 언어, 예컨대 신, 옳고 그름, 가치 등을 다루는 언어는 경계 너머의 말들 즉, 의미 없는 말이다. 그것들은 '신비스러운 것들'이다. 이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정신과학클럽 모임에서 발표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됐을 때 누군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그는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놀랐다. 《논리철학논고》(앞으로는 《논고》)의 그 유명한 저자가 ...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르고 갈색이었으며, 독수리형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옆모습과 숱이 많은 갈색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서두가 잘 안 풀리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으나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시선을 한 곳에 모으고, 마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갑작스런 손짓을 하기도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진지하고 기대에 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이러한 진풍경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으며, 나중엔 거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됐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 말콤이 그를 처음 만난 광경을 기술한 이 말은 생애와 철학 둘 다에서 보여준 그의 비범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보여준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 거대 강철 회사 주인의 5남 3녀 중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어 정교한 기계를 잘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 비행기나 재봉틀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17살 때 그는 볼츠만 밑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려고 그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가 자살하는 바람에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헤르츠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그 다음에 그는 영국의 맨체스트 공과대학에서 항공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때 그가 만든 정교한 제트 엔진 모형은 현재 제트 헬리콥터의 선구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관심은 기계엔진에서 유체역학으로 그리고 순수수학으로, 점차 근본적인 문제로 옮아갔다.
자네는 절대 비행기 조종사가 되면 안돼!
1910년경 수학의 기초에 관한 책으로 러셀의 《수학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 책을 접하게 됐다. 그는 이 책에서 찬양하고 있는 수학자며 철학자인 독일의 프레게를 먼저 찾아가 공부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러셀에게 배우라고 권했다. 러셀은 프레게 철학의 기본 개념인 집합 개념에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 프레게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 사람이었다. 러셀이 동료 교수인 무어에게 새로 들어온 이 학생이 천재냐 바보냐고 물었다. 그러자 무어는 천재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무어는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에 찬 표정을 나타내는 친구는 그 뿐이니까."
1912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을 찾아갔다.
"제가 완전히 백치입니까, 아닙니까? 만일 백치라면 저는 비행기 조종사나 돼야겠습니다. 백치가 아니면 철학자가 되겠습니다."
이에 러셀은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써오라고 했다. 그리고 러셀은 그 논문의 첫 구절을 읽고 큰소리로 말했다고 한다.
"안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서는 안되네."
케임브리지에서 다섯 학기를 수강한 후 노르웨이의 시골에 자기 손으로 오막살이를 하나 짓고 혼자 은거하는 동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탈장으로 병역이 면제됐음에도 포병장교가 돼 군에 참여했다가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됐다. 그가 포로가 됐을 때 그의 배낭 속에는 《논고》의 원고가 들어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논고》의 핵심 사상, 즉 '한 문장은 하나의 그림이다'란 생각을 군에 있으면서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서 어디선가 어떤 자동차 사건이 발생한 것을 도형인가 지도인가로 묘사해 놓은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이때 그에게 이 지도는 문장이고, 그 안에 문장의 본질, 즉 실재를 그려 보이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 포로에서 풀려 돌아온 그에게는 전쟁 직전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유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릴케 등에게 익명으로 돈을 희사하는 등,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지극히 단순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그의 옷차림은 극히 소박하여 넥타이나 모자를 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그의 가구란 고작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그리고 몇 개의 딱딱한 나무의자가 전부였다.《논고》의 완성과 지극히 멋진 삶
그에게 《논고》의 완성은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논고》는 적어도 그에게는 2,500년에 걸친 서양 철학의 미로로부터 탈출을 의미했다. 이제 더 골치를 썩혀야 할 철학적 문제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단순하게 사는 일 뿐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선생의 길을 택했다. 교사 양성교육을 받고 1920년 그는 초등학교 교사가 됐지만 그 삶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교육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영받는 교사가 되지 못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 같다. 6년만에 교사직을 포기하고 다음으로 택한 일은 손발을 움직여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원의 정원사가 됐다.
그 후 그는 건축설계사가 돼 비엔나에 있는 그의 누나 집을 2년여에 걸쳐 설계했다. 비엔나에 있는 동안 그는 비엔나 대학의 슐리크를 만나게 된다. 슐리크는 20세기초 영미철학을 풍미한 논리실증주의를 제창한 비엔나 서클의 영도자였는데, 1921년 출판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읽고 감동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들의 접촉으로 《논고》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의 뼈대를 형성하게 된다.
1929년 초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풍문에 의하면 그가 다시 철학을 시작하는데 자극을 준 것은 1928년 3월에 있었던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의 강연이라고 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논고》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후기 철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출판을 극히 꺼려 그 사색의 결과는 다만 그가 써 놓은 노트로만 남아있다. 이 노트는 나중에 그가 죽은 후 책으로 출간됐는데, 《철학적 고찰》, 《철학적 문법》, 《청색본》, 《갈색본》,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등이 그것이다.
1936년 그는 노르웨이의 오막살이로 가 약 1년간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를 집필했다. 이 책은 그가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했던 두 권 중 다른 하나인데, 1949년에야 집필이 완료돼 결국 사후에나 출간됐다. 1939년 그는 마침내 무어 후임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다. 그의 강의는 독특했다. 강의는 그의 방이나 친구 방에서 했고, 청중은 엄격히 제한했는데, 그것도 몇 년 동안 계속 듣는 사람에 한했고, 시간은 엄수해야 했다. 강의는 노트도 원고도 없이 온 정신을 집중해 논의를 전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다시 새로운 질문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렇지만 대학사회 역시 그에겐 맞지 않았다. 넥타이를 매고 높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식당 분위기를 못 참아 자기 방에서만 식사를 했다. 마침내 1947년 사직서를 내고 아일랜드의 시골 농촌과 해안 가에서 은거하며 철학적 사유의 투쟁을 계속했다. 1951년 그는 2년여의 암과의 투쟁 끝에 그는 삶을 마감했다. 그가 의식을 잃기 전 의사가 2-3일 밖에 더 못 살겠다고 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의 말을 남겼다. "좋습니다. 나는 멋진 한 세상을 살고 간다고 내 친구들에게 전해주십시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논고》는 약 2만여 자로 이뤄진 짧은 책이다. 서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면서 스스로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생각에, 아니 생각에가 아니라 생각들의 표현에 한계를 긋고자 한다. 왜냐하면 생각에 한계를 긋기 위해서 우리는 이 한계의 양쪽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다시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조차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는 언어 속에만 그어질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있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논고》의 목적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눠 줄 어떤 한계선을 그어주겠다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바로 언어비판이다. 그 선을 그어줌으로써 우리는 그 선 안에 있는 언어 표현들은 의미있는 것으로, 그 선 너머에 있는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다. 이렇게 분명히 구분한 후에는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의미 없는 것,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선을 긋는 기준이 무엇이냐?'다. 그 대답이 바로 그의 언어의 '그림이론'(picture theory)다.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다. 사진이 실재의 모습을 색깔의 조합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언어도 실재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그려낸다는 것, 이것이 그의 그림이론의 핵심이다. 《논고》는 바로 그런 그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언어는 바로 이렇게 실재의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언어, 즉 자연과학의 언어다. 그렇지 않은 언어, 예컨대 신, 옳고 그름, 가치 등을 다루는 언어는 경계 너머의 말들 즉, 의미 없는 말이다. 그것들은 '신비스러운 것들'이다. 이 신비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