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들로부터 얻은 삶의 진실
톨스토이는 살아 생전에 예술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마칠 무렵 정신적 위기를 맞았다. 청년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삶의 진실에 대한 탐구가 해결되지 않고 정신적 위기로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때 겪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참회록》에 털어놓는 등 평생 삶의 진실한 의미를 추구했다. 그의 위기 의식은 1879년 무렵 최고의 절정에 달해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그때까지 공부해온 철학·신학·과학 같은 학문이 아니라 농부들의 삶으로부터였다. 인간은 신을 섬기며 살아야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농부들이 깨우쳐 준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확실한 해답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신앙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톨스토이는 스스로 5계명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 체계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돼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 때문에 그는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이와 같은 비판정신은 단순히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압과 억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정부형태를 반대했고, 소유가 힘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 보고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했다.
정신적 위기를 넘긴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 자신의 종교관·예술관·도덕관에 대한 여러 가지 글을 썼는데, 개인적 일보다는 공적인 일에 더 큰 비중을 뒀다. 이에 따라 러시아정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 교조신학에 대한 글, 모스크바 빈민가의 체험 등을 썼다. 어떤 글은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관행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의 글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났다.
톨스토이는 1897년 《예술이란 무엇인가 Chto takoe iskusstvo?》라는 저술에서 자신의 종교관·도덕관·사회관을 기초로 미학체계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만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 감동이나 감화가 없다면, 즉, 상호 교감이 없다면 그 예술작품은 실패한 것이다. 또한 민중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예술이야말로 참예술이며, 인간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불안하게 하는 예술, 혹은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은 저급예술, 거짓예술이라고 했다. 나아가 예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작품은 종교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종교예술은 인간을 감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 뒤 톨스토이는 도덕적 목적을 갖고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체험에서 소재 구해
1890년대에 톨스토이는 창작보다 사회 현실의 모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주로 빈민구제 활동을 했다. 그는 모든 정부는 부자 귀족들을 위해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는 부도덕한 기관이며, 재판소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걷는 세금도 죄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 대해서는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군대를 악으로 보는 톨스토이의 견해는 분리파 교도의 일파인 두호보르 교인들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호보르 교도들은 집단으로 병역을 거부해 정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부활》은 바로 두호보르 교도들의 캐나다 이주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쓴 소설이다.
톨스토이는 두 가지 실제 사건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다. 한 가지는 사회활동가이며 검사 친구 코니가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코니에게 찾아와 자신이 배심원으로 법정에 참석해 겪은 일을 코니에게 들려줬고,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다른 한 가지 소재는 자신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에 저지른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젊어서 자기 영지의 농노의 딸을 건드린 적이 있었고, 얼마 후에는 숙모의 집에 놀러갔다가 하녀인 청순한 소녀 '마샤'의 순결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 후 마샤는 평생 타락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티프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부활》을 쓰기로 결심했다.
《부활》은 정신적으로 거듭나는 두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불행한 삶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타락한 현실을 폭넓고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영혼의 부활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는다. 톨스토이 최후의 장편소설 《부활》은 이처럼 도덕적인 목소리가 너무 강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즉 작가의 교훈적 의도가 너무 강해서 독자들에게는 문학작품으로서 매력이 덜하다는 것이다. 사실 회개하는 귀족과 창녀의 사랑은 진부한 테마일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적 깊이나 발전에 대한 통찰력이 거의 없다는 게 독자나 평자의 일관된 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 전체에서 나타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적 목소리와 서정적 묘사, 적절한 상징의 사용은 소설에 흥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도덕적 훈계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사회사상가로서의 비판적 목소리도 흥미롭게 들린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세계
톨스토이는 툴라시 근방에 있는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출생했다.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 양육됐다.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들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1841년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형식적인 교과과정에 흥미를 잃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골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카프카스에 주둔한 포병부대의 장교로 입대했다. 그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군대에서 시작됐다. 1854년에는 다뉴브강 전선으로 배속돼 크림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가 투르크제국 내에 있는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크림전쟁은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연합군인 영국, 프랑스, 오스만 터키 제국과 벌인 전쟁이었다. 크림전쟁 중에서도 톨스토이가 참가한 세바스토폴 전투는 가장 치열했던 격전으로 유명하다. 그때의 전쟁 경험은 전쟁을 테마로 한 여러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1856년, 톨스토이는 유럽여행을 마치고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농노들과 일하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농노 자녀들의 교육, 영지관리에 전념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했으나 1878년을 기점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아 자기 자신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면서 삶과 죽음의 진실한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 그의 신념은 기독교적 무정부주의로 볼 수 있는데, 일체의 정부형태나 사유재산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부정했다. 특히 그가 추구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전세계로 유포돼 그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영지로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인류의 양심으로 추앙 받으면서 러시아 정부와 교회의 탄압을 받아 190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 종교, 교육, 예술을 논할 때 도덕적 사상가로서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 수입 때문에 가족과의 마찰과 불화는 계속됐고, 부인 소냐와의 갈등은 노령의 톨스토이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어느 날 밤, 괴로움에 몰래 집을 나와 정처 없이 헤매던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 20일, 아스타포보의 작은 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누가 뭐래도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인 톨스토이는 대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 1865-69》,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1875-77》, 《부활 Voskreseniye, 1899》 등을 남겼는데, 그 외에도 주요 작품으로 《유년시대 Detstvo》, 《소년시대 Otrochestvo》, 《청년시대Ynost'》,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skie rasskazy》, 《세 죽음 Tri smerti》, 《카자크 사람들 Kazaki》, 《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icha》, 《크로이체르 소나타Kreytserova Sonata》, 《하지 무라트 Khadzhi Murat》, 《어둠의 힘 Vlast' t'my》, 《산송장 Zhivoy trup》 등이 있다. 또한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단편소설, 교훈적인 민담, 희곡 등을 남겼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날 네흘류도프 공작은 지방법원의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석한다. 그날 재판은 살인 강도 사건으로, 매춘부가 독약으로 손님을 죽이고 돈과 반지를 훔쳤다는 것이다. 그는 피고의 자리에 선 카튜샤가 자신이 청년시절 고모의 집에서 유혹하고 버린 청순한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그녀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사창가의 매춘부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불행한 삶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은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카튜샤는 형을 받게 되고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죄를 고백한 후 그녀를 쫓아 시베리아로 가는 죄수 행렬을 따른다.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카튜샤에게 프로포즈하는데.....
톨스토이는 살아 생전에 예술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마칠 무렵 정신적 위기를 맞았다. 청년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삶의 진실에 대한 탐구가 해결되지 않고 정신적 위기로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때 겪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참회록》에 털어놓는 등 평생 삶의 진실한 의미를 추구했다. 그의 위기 의식은 1879년 무렵 최고의 절정에 달해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은 그때까지 공부해온 철학·신학·과학 같은 학문이 아니라 농부들의 삶으로부터였다. 인간은 신을 섬기며 살아야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농부들이 깨우쳐 준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확실한 해답이었다. 그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신앙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톨스토이는 스스로 5계명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 체계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돼 교회의 권위를 부정했다. 그 때문에 그는 1901년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이와 같은 비판정신은 단순히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강압과 억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정부형태를 반대했고, 소유가 힘에 의해 확보된 것이라 보고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했다.
정신적 위기를 넘긴 톨스토이는 1880년 이후 자신의 종교관·예술관·도덕관에 대한 여러 가지 글을 썼는데, 개인적 일보다는 공적인 일에 더 큰 비중을 뒀다. 이에 따라 러시아정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 교조신학에 대한 글, 모스크바 빈민가의 체험 등을 썼다. 어떤 글은 특정한 사회적·정치적 관행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그의 글은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뛰어났다.
톨스토이는 1897년 《예술이란 무엇인가 Chto takoe iskusstvo?》라는 저술에서 자신의 종교관·도덕관·사회관을 기초로 미학체계를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만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예술가와 독자 사이에 감동이나 감화가 없다면, 즉, 상호 교감이 없다면 그 예술작품은 실패한 것이다. 또한 민중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예술이야말로 참예술이며, 인간의 감정을 흥분시키거나 불안하게 하는 예술, 혹은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은 저급예술, 거짓예술이라고 했다. 나아가 예술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작품은 종교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종교예술은 인간을 감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 뒤 톨스토이는 도덕적 목적을 갖고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체험에서 소재 구해
1890년대에 톨스토이는 창작보다 사회 현실의 모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주로 빈민구제 활동을 했다. 그는 모든 정부는 부자 귀족들을 위해 가난한 민중을 억압하는 부도덕한 기관이며, 재판소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걷는 세금도 죄악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 대해서는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군대를 악으로 보는 톨스토이의 견해는 분리파 교도의 일파인 두호보르 교인들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호보르 교도들은 집단으로 병역을 거부해 정부의 탄압을 받았는데, 《부활》은 바로 두호보르 교도들의 캐나다 이주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쓴 소설이다.
톨스토이는 두 가지 실제 사건에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다. 한 가지는 사회활동가이며 검사 친구 코니가 들려준 이야기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찾아와 코니에게 찾아와 자신이 배심원으로 법정에 참석해 겪은 일을 코니에게 들려줬고, 톨스토이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다른 한 가지 소재는 자신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에 저지른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젊어서 자기 영지의 농노의 딸을 건드린 적이 있었고, 얼마 후에는 숙모의 집에 놀러갔다가 하녀인 청순한 소녀 '마샤'의 순결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 후 마샤는 평생 타락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티프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부활》을 쓰기로 결심했다.
《부활》은 정신적으로 거듭나는 두 주인공 네흘류도프와 카튜샤의 불행한 삶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타락한 현실을 폭넓고 날카롭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영혼의 부활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는다. 톨스토이 최후의 장편소설 《부활》은 이처럼 도덕적인 목소리가 너무 강해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즉 작가의 교훈적 의도가 너무 강해서 독자들에게는 문학작품으로서 매력이 덜하다는 것이다. 사실 회개하는 귀족과 창녀의 사랑은 진부한 테마일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심리적 깊이나 발전에 대한 통찰력이 거의 없다는 게 독자나 평자의 일관된 평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텍스트 전체에서 나타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적 목소리와 서정적 묘사, 적절한 상징의 사용은 소설에 흥미를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는 작가의 도덕적 훈계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사회사상가로서의 비판적 목소리도 흥미롭게 들린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세계
톨스토이는 툴라시 근방에 있는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출생했다.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 양육됐다. 프랑스인과 독일인 가정교사들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다. 1841년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형식적인 교과과정에 흥미를 잃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 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골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카프카스에 주둔한 포병부대의 장교로 입대했다. 그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은 군대에서 시작됐다. 1854년에는 다뉴브강 전선으로 배속돼 크림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가 투르크제국 내에 있는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크림전쟁은 크림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연합군인 영국, 프랑스, 오스만 터키 제국과 벌인 전쟁이었다. 크림전쟁 중에서도 톨스토이가 참가한 세바스토폴 전투는 가장 치열했던 격전으로 유명하다. 그때의 전쟁 경험은 전쟁을 테마로 한 여러 작품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1856년, 톨스토이는 유럽여행을 마치고 야스나야 폴라냐에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농노들과 일하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농노 자녀들의 교육, 영지관리에 전념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했으나 1878년을 기점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아 자기 자신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면서 삶과 죽음의 진실한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 그의 신념은 기독교적 무정부주의로 볼 수 있는데, 일체의 정부형태나 사유재산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부정했다. 특히 그가 추구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전세계로 유포돼 그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영지로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인류의 양심으로 추앙 받으면서 러시아 정부와 교회의 탄압을 받아 1901년에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역사, 종교, 교육, 예술을 논할 때 도덕적 사상가로서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 수입 때문에 가족과의 마찰과 불화는 계속됐고, 부인 소냐와의 갈등은 노령의 톨스토이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어느 날 밤, 괴로움에 몰래 집을 나와 정처 없이 헤매던 톨스토이는 1910년 11월 20일, 아스타포보의 작은 역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누가 뭐래도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인 톨스토이는 대작 《전쟁과 평화 Voyna I mir, 1865-69》,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1875-77》, 《부활 Voskreseniye, 1899》 등을 남겼는데, 그 외에도 주요 작품으로 《유년시대 Detstvo》, 《소년시대 Otrochestvo》, 《청년시대Ynost'》,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skie rasskazy》, 《세 죽음 Tri smerti》, 《카자크 사람들 Kazaki》, 《이반 일리치의 죽음 Smert' Ivana Ilicha》, 《크로이체르 소나타Kreytserova Sonata》, 《하지 무라트 Khadzhi Murat》, 《어둠의 힘 Vlast' t'my》, 《산송장 Zhivoy trup》 등이 있다. 또한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단편소설, 교훈적인 민담, 희곡 등을 남겼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느 날 네흘류도프 공작은 지방법원의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석한다. 그날 재판은 살인 강도 사건으로, 매춘부가 독약으로 손님을 죽이고 돈과 반지를 훔쳤다는 것이다. 그는 피고의 자리에 선 카튜샤가 자신이 청년시절 고모의 집에서 유혹하고 버린 청순한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그녀는 타락의 길을 걸었고, 결국 사창가의 매춘부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불행한 삶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은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하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카튜샤는 형을 받게 되고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리고 죄를 고백한 후 그녀를 쫓아 시베리아로 가는 죄수 행렬을 따른다.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카튜샤에게 프로포즈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