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

붉은 산

저자: 김동인
출판사: 빛샘
등록일: 2001-07-25
김동인(金東仁, 1900∼1951)

평양의 갑부 김대윤의 차남으로 출생. 호는 금동(琴童). 어려서 일본 유학, 명치학원을 거쳐서,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최초의 동인지 『창조(創造)』를창간. 1926년 사업 실패, 51년 전쟁 중 병고로 쓸쓸히 사망.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혹은 김시어딤이라 불리던 소설가 김동인은 190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이며 대지주인 김대윤의 차남으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 환경 속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 평양 숭덕학교를 졸업하고 숭실학교 재학 중인 15세에 그는 일본으로 유학해 동경학원 및 명치학원 중학부를 거쳐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한다. 명치학원 재학시 그는 학생들끼리 내는 회람 잡지에 습작을 발표하기도 하면서 차츰 문학에 경도된다. 1917년 그는 부친의 별세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결혼을 하고 다시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지만 가와바다 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자비를 털어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조하다

학교를 중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창작에 몰두하여 1918년 말부터 동향이며 동년배인 유학생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동인지 발간을 준비하고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한다. 「창조」는 순수하게 자비로 출판된 동인지로 발간에 따른 상당수의 금액은 당시 집안이 부유했던 김동인으로부터 조달되었다. 어쨌든 일본의 복음인쇄소에서 찍어 낸 「창조」에는 그의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이 선명한 잉크색을 빛내며 새로운 소설의 길을 열어 보였다. 순 문예지 「창조」는 구어체 문장의 확립, 구체적 문예운동의 전개, 근대 사실주의의 도입을 시도하며 계몽주의의 문학과 문학의 공리성을 주장한 춘원 이광수에 대해 반기를 들고, 예술을 위한 문학과 문학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1919년 3월, 김동인은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된다. 1920년 이후 그는 본격적인 단편 소설로 일컬어지는 배따라기』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 등과 같은 작품을 발표함으로서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다.

문학 위해 가산을 탕진, 부인마저 동인을 버리고

1921년부터 그는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작품은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무렵부터 김동인의 생활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오만한 성격과 방탕한 생활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1926년에는 수리사업(水利事業)에도 관여하였다가 실패하였으며 부인마저 집을 나간다. 이런 어지러운 생활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집념은 여전하여 1924년에는 「창조」의 후신격인 「영대」지를 창간한다. 그의 창작열은 오히려 생활이 어려운 이 시기에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데 1923년에 첫 창작집인 「목숨」을 창조사에서 출간하였고,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발간하였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본격 역사소설 집필, 거듭되는 병마와의 싸움

1929년에 춘원의 계몽주의문학관에 대립되는 예술주의문학관을 바탕으로 『근대소설고』를 발표하였고, 이듬해에는 『광염소나타』 『광화사』와 같은 유미주의 계열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30년부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신문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대수양』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왕조의 낙부』 등이 대표작이다. 역사소설 중에서 특히 『대수양』과 『젊은 그들』 등에서는 세조와 대원군을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934년에는 이광수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 『춘원연구』를 「삼천리」에 연재하였다. 1935년에 월간잡지 「야담」을 창간하였으며, 1939년에는 박영희(朴英熙), 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북지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1개월간 만주를 돌아봄으로써 민족사에 오점을 남겼다.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결성을 주선하는 한편, 일제 말기에 벌어진 문학인의 친일행위, 특히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반역자』 『망국인기』 『속 망국인기』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1930년 김동인은 재혼도 하고 새 출발의 의욕도 보였으나 계속되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렸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새로운 거처에서 문필활동을 재개하였으나 뇌막염과 동맥경화증으로 자리에 누워 1951년 1월 5일 6.25전쟁이 한창이던 무렵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쓸쓸히 생애를 마쳤다. 1955년에 사상계사에서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김동인의 작품 세계는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맞선 사실주의, 신경향파 내지는 프로문학에 맞선 예술지상주의로 순수문학운동 전개로 볼 수 있다. 그는 소설의 예술성을 주장하여 다양한 문학 사조와 수법을 구사하고 자연주의적 수법(『약한 자의 슬픔』, 1919)에서 낭만주의(『배따라기』, 1921)로, 다시 자연주의(『감자』, 1925)를 거쳐 유미주의(『광화사』, 1935), 인도주의(『발가락이 닮았다』, 1932), 민족주의(『붉은 산』, 1932) 등 문학사조의 다양한 수용을 작품을 통해 드러낸 작가라 할 수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주인공 '나'는 의학 연구를 위해서 만주로 들어가 조선인(한국 사람)끼리 모여 살면서 소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한 마을에 이른다. 그 마을에는 어디에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포 청년 '정익호'가 있다. 삵은 동리에서 깡패로 소문난 사람으로, 동리 사람들의 미움과 저주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1년을 보낸다. 그는 괴팍하고 간교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나 행동거지가 모두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미움을 사게 만들었다. 그가 하는 일은 투전이 일쑤며, 싸움, 트집, 칼부림, 색시에게 덤벼들기 등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다녔다. 이런 삵을 동네 사람들이 쫓아내기로 합의하였지만 실현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 동네 주민인 송 첨지가 그 해의 소작료를 나귀에 싣고 만주인 지주에게 바치러 갔다가 부당하게 폭행을 당하여 죽자, 주민 모두가 원수를 갚자고 흥분하나 막상 지주와 맞서려는 사람이 없다. 삵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자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서린다. 다음날 아침, 그는 동구 밖의 밭고랑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된다. 그는 단신으로 못된 만주인 지주의 집에 가서 송 첨지를 죽인 분풀이를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불러 주는 애국가를 들으며 그는 죽어 간다.



*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 주제: 일제 치하 만주에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의 생활상

* 출전: 「삼천리」(1932)



「삼천리」, 193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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