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 명저)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
윌리엄 J. 라이딩스, 스튜어트 매기버 지음 | 한국언론자료간행회
위대한 대통령 끔찍한 대통령
윌리엄 J. 라이딩스, 스튜어트 매기버 지음
한국언론자료간행회 / 2000년 9월 / 448쪽 / 9,800원
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재임 기간: 1789-1797년(8년)훈련받지 않은 민병대로 구성된 대륙군을 이끌고 독립전쟁을 지휘한 워싱턴은 부대원들의 전의가 상실되지 않도록 강한 의지력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부대원들의 사기를 끊임없이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조지 워싱턴이 롱아일랜드 전투를 앞두고 부대원들에게 했던 감동적인 연설은 그의 지도력의 일단을 보여준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노예가 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앞으로 태어날 수백만 미국인의 운명이 우리의 용기와 행동에 달려 있다. 이 상황을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하여 죽임을 당할 것인가를 이 자리에서 선택하자!”
1788년 워싱턴은 대통령 선거인단의 만장일치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워싱턴이 지역과 당파를 초월해서 전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은 일찍부터 도덕적 행동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에게는 정치적인 문제든 개인적인 문제든 구체적 근거를 제시한 부정의 폭로 기사가 한 건도 없다.
워싱턴은 리더십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신중함을 보였다. 항상 자신의 권한을 앞세우기보다는 입법부에 중대한 결정을 맡겼다. 그는 1794년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현재 매우 제한적이다. 그리고 내 목표는 이러한 상태가 계속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나는 대통령이 직접 법안을 만드는 행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워싱턴은 일을 하는 데 있어 늘 합의점을 찾고자 했고, 파당에 의한 정략적 음모나 파당 정치를 몹시 싫어했다. 또한, 정부 형태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외교 부문에서는 중립 선언을 통해 유럽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대통령직을 마치면서도 워싱턴은 국민들에게 “외교적 동맹 관계를 피하라. 그리고 20세기가 되기까지 고립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남겼다.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재임 기간: 1801-1809(8년)토머스 제퍼슨은 거쳤던 공직만으로도 충분히 비범한 사람이다. 버지니아주 의원, 연방의회 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 장관, 부통령을 거쳐 미국 대통령에 이른다.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는 농부이자 법률가였으며, 작가, 음악가, 철학자, 건축가, 과학자, 발명가로서의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확연하고 인상적인 그의 공적 명성과는 달리 제퍼슨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수줍음을 타고 나서기를 삼가는 겸손한 성격의 그는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히 차단하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아서 아주 행복하다.”라고 말하곤 했다.
제퍼슨은 한 개인적인 인물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적 신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정치적 신념 중 으뜸은 국민에 대한 확신이었다. “국민은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는 유일하고 확실한 신뢰의 바탕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한 세대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세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는 균형 잡힌 국가 예산을 지지했다. 또한 작은 정부론은 그의 또 다른 정치적 신념이었다. 그가 일생을 통해 염려한 것은 중앙정부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제퍼슨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1803년 루이지애나의 획득이다. 1에이커당 3센트 가격으로 프랑스에게 총 1천 5백만 달러를 주고 이 지역을 구입했다. “그는 루이지애나 획득 하나만으로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제퍼슨은 대통령의 행정적 특권을 주장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아론 버의 반역 행위를 증언하기 위해 소환됐을 때, 그는 증언대에 서기를 거절하며 준비한 서류들을 건네주어 행정부를 입법부와 사법부의 간섭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선례를 남겼다.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재임 기간: 1817-1825(8년)먼로는 동시대인들에게서 대단히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정직, 성실, 예의 바름, 겸양지덕, 그리고 감정을 자제하는 자세는 그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퍼슨은 먼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잘못된 외부 모습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영혼을 가졌으며, 그곳에 작은 얼룩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외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먼로는 다른 대통령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먼로는 미국과 영국 간에 러시·배것 협정을 체결하여 양국의 오대호 내 해군 수를 제한하였으며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서 군사력을 제한함으로써 대캐나다 관계를 돈독하게 발전시켜 나갔다. 그 외에도 스페인으로부터 동부 플로리다를 인수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국경 지역에서 유럽의 잔재 세력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먼로는 그 유명한 ‘먼로 독트린’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유럽에 대해서 서반구에 음모와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경고인 동시에, 미국이 유럽의 분쟁이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먼로 독트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평화적 외교 정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단 한 발의 총도 사용하지 않고서 서반구에 대한 유럽의 간섭과 더 이상의 식민지화를 차단하는 데 미국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정치면에 있어서 먼로의 예의 바른 인품은 그로 하여금 산적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게 했고, 협상과 협정이라는 카드를 용이하게 사용하도록 했다. 그는 원칙주의자였지만 의견의 일치를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를 반대한 세력도 수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의견의 일치를 끌어내는 데 탁월하고 성공적이어서 그의 반대 세력이었던 연방파는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시기에 소멸되어, 그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미 헌정사상 유일하게 반대적인 정당이나 당파가 사라진 상태였다.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K. 포크(James K. Polk), 재임 기간: 1845-1849(4년)제임스 포크는 대통령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현재 미국 영토의 윤곽을 거의 완성시켰다. 독립 후 75년 만에, 그에 의해 48개 주로 형성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크는 사실 우리들의 귀에 그리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는 이룬 업적과 재능에 비해 가장 알려지지 못한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포크는 “대통령은 대외 문제를 이끌고 의회는 국내 문제를 이끄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국내 문제에 있어서 대통령의 권한을 한정시키고자 노력했다. 포크는 1848년 의회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단지 소극적인 차원에 불과하지, 결코 단정적이거나 확언적인 의견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포크는 위기관리 영역에서 위대한 대통령임을 입증해 보였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독립한 텍사스 공화국의 병합을 의회가 승인하자,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심각한 외교 마찰이 빚어지면서 위기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러자 포크는 즉시 멕시코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숨 돌릴 틈 없이 멕시코를 밀어붙여서 항복을 받아냈다. 그 결과, 텍사스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역까지도 미국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제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재임 기간: 1857-1861(4년)뷰캐넌은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악평을 받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관료적 형식주의자로서 헌법이 용인하는 행동만을 취했다. 그는 대통령의 직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대통령은 단지 정부의 최고 행정관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의 직분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뷰캐넌의 견해에 따르면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시킬 권한도 없고, 강제적으로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해당 주에 군대를 파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뷰캐넌이 대통령이 되고 이틀이 지난 후 대법원은 ‘드레드 스콧 판결’을 발표했다. “노예제는 합법적이며, 조상이 노예의 신분으로 미국에 온 흑인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시민의 권한이 없고, 자유 주로 도망간 노예는 원래의 소유주에 되돌려져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이틀 만에 엄청난 폭풍을 일으킬 사안과 맞닥뜨린 것이다.
위의 사안에 대한 갈등의 시기와 맞물려 뷰캐넌 행정부는 또 다른 난관에 직면한다. 오하이오 생명보험사와 신시내티 신용조합이 파산함에 따라 예금자들이 예금 인출 사태를 초래했고, 이것이 공황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뷰캐넌은 이에 대해 어떠한 정책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861년 2월에는 미국 최남단 주인 텍사스가 연방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엄격한 헌법주의자인 뷰캐넌은 헌법이 자신에게 탈퇴 선언을 강제적으로 막을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다고 믿었다.
후세 사람들은 뷰캐넌 대통령을 위기 상황에서 우유부단하고, 고조되는 위기를 헤쳐 나아갈 용기가 부족하며 궁극적으로 지도력이 요구되는 시기에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못 박고 있다. 뷰캐넌은 결국 분열된 연방을 링컨에게 물려주었으며 대통령직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남북전쟁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재임 기간: 1861-1865(4년)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1860년 링컨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예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평화적인 협상을 통해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는 현실적인 조치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먼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으며, 앨라배마,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이 연달아 연방을 탈퇴하였다.
링컨은 1861년 4월까지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섬터 요새에 물자를 공급하려는 시도를 빌미로 남부연합이 요새를 공격하자, 지원병을 모집하고 4월 19일에 남부 여러 항구에 봉쇄령을 내림으로써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링컨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했다. “만약 노예 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링컨은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그의 비유법은 매우 돋보인다. 한번은 상원의원이 남북전쟁에서 링컨의 군사적 실수를 지적하면서 링컨이 고작 1마일 밖에 생지옥이 있어도 그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다고 불평하자, 링컨은 “의원님, 그 1마일은 여기 백악관에서 의사당까지 가는 바로 그 거리이군요.”라고 답변했다.
한 여인이 곤궁한 가정을 부양하도록 남편을 군에서 제대시켜 달라고 링컨에게 요청한 일이 있었다. 링컨은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었다.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인정 많은 사람이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시기에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연방군은 7월에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드디어 남북전쟁의 변곡점을 그리는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다. 1863년 11월에는 게티즈버그에서 전사한 영웅들에 대한 추도식이 있었다. 유명한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의 두 시간에 걸친 연설 뒤 링컨이 연설대에 올랐다. 링컨은 단 몇 분간의 짧은 연설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토록 간결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미국의 연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은 …… 이들의 영광스런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숭고하게 결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링컨은 남부에 대해 징벌의 차원보다 치료를 강조하면서 남부의 재건을 계획했다. 그는 “나는 항상 자비가, 엄격한 정의보다 더욱 풍성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다.”라며 자신의 접근 방법을 요약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지도자로서 링컨의 위대함은 승리에 대한 관대함, 즉 승리 후 그가 보여 주었던 자비롭고 지혜로운 행동에 있다. 그는 관대함과 자비가 가장 빠르고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치료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재임 기간: 1865-1869(4년)존슨에 대한 비난과 악평의 대부분은 의회와의 공개 전쟁에서 비롯된다. 대통령은 의회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했고, 의회는 그 반대를 저지하고자 대통령의 권한을 잠식하고 탄핵으로 그를 추방하고자 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대통령의 비상 권한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자 의회는 정부 구성에서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언했고, 존슨은 이런 의회를 헌법적 권한을 넘어선 것으로 보았다.
한 달 동안 부통령으로 일했던 존슨은 갑작스러운 링컨의 죽음으로 1865년 4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존슨은 링컨의 정책을 이어받아 남부에 대한 온건한 재건 정책을 실시하였다. 남부연합 시민 중 연방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는 자는 모두 시민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공화당 급진파가 지배하고 있던 의회는 연방을 탈퇴했던 남부의 여러 주를 징계하자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존슨과 공화당 급진파들은 날카롭게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는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 없이는 연방 내각과 관료들을 해임시킬 수 없음을 규정하는 ‘공직보장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존슨은 이 법이 위헌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상원의 해임 동의안 거부에도 불구하고 국방 장관 에드윈 스탠턴을 해임시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존슨은 하원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 앤드류 존슨은 미국 역사상 탄핵을 당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1868년 탄핵안은 상원으로 넘어갔다. 최종 투표 결과 찬성 35표, 반대 19표로 존슨 대통령은 단 1표에 의해 구제받았다(탄핵에 필요한 찬성표는 36표였다). 60년이 지난 후, 1926년에 연방 대법원은 공직보장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재임 기간: 1913-1921(8년)1917년 4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대한 전쟁 선포를 의회에 요청했다. 독일 잠수함이 교전 지역에서 3척의 비무장 미국 상선을 격침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평화주의자인 윌슨은 마지못해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참전 후에는 독일과 그 동맹국들을 격파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노력했다.
그 후 열린 평화회담에서 윌슨은 세계 평화를 위해 국제연맹 창설을 주창하였다. 1920년 윌슨은 국제 평화를 실현하는 데 충실히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윌슨은 존 애덤스 행정부 이래로 처음으로 스스로 의회의 특별 회기에 나가 연설함으로써 선례를 파기했다. 이때부터 대통령 국정 연설은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관세 인하를 위해 하원을 설득했고, 하원은 즉시 관세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상원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 윌슨 대통령은 이 법안을 반대하는 기업들의 로비 활동을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자신을 도와 달라고 직접 요청하였다. 그 결과 여러 상원 의원들이 윌슨의 의견에 찬성표를 던졌고 결국 상원을 통과하여 25%의 관세 인하를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