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흔들리지 않는 원칙
임종성 지음 | 모아북스
이재명, 흔들리지 않는 원칙
임종성 지음
모아북스 / 2025년 4월 / 312쪽 / 20,000원
서문 - 저들은 이재명을 왜 이토록 두려워할까요?국민의힘 원내대표실이 지난 3월에 펴낸 『이재명 망언집 : 이재명의 138가지 그림자』는 173쪽에 걸쳐 ‘이재명의 망언’을 138색으로 수록했더군요. 국민의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홍보자료실에 PDF 파일로 갈무리해놔서 클릭만 하면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재명 스토커들 아닌가요? 자기들 할 일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면 될 텐데 왜 이토록 이재명한테 집착해서 괴롭히는 짓을 일삼을까요? 이재명이 두려워서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두려운 걸까요? 이 책을 쓰다 보니 하나는 알겠더군요. 그 이유를.
“방을 옮깁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바로 이 한마디에 이재명의 공직자로서의 마음가짐과 면모가 다 들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 저들이 두려워하는 면모이기도 하고요. 자기들은 죽었다 깨도 갖지 못한 바를 이재명은 갖고 있거든요. 가장 낮은 데에 몸을 두고 시민을, 국민을 섬기는 정치.
이재명이 2010년에 첫 공직으로 성남시장에 취임하고 보니, 시장실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청 제일 꼭대기 9층에 있는데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거예요. 그래서 취임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시장실을 업무 층으로는 가장 낮은 2층으로 내린 겁니다. 넓이도 반의반으로 줄여서요. 그래서 시장실이 제1민원실이 되고 만 거죠. 이재명은 그걸 좋아했어요. 바빠서 민원인 찾아다닐 시간도 없는데, 마침 직접 찾아들 와주시니 고맙다고요. 이재명의 다음 말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왜 지금 대한민국에 이재명이 꼭 필요한지 말입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재명을 찾기 위해서 저 높은 곳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이재명이 없습니다. 이재명은 바로 여러분들의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높은 자리에서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국민에게 고용되어서 국민이 맡긴 권한으로 국민을 위해 일할 의무를 진 국민의 공복, 즉 머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01 밟혀도 밟혀도 끝내 일어서는 풀처럼 _이재명의 출발
산촌의 가난에 갇힌 유년의 비애(경북 안동화전민촌 벽돌집 1963~1975)
가난이 무슨 죄라고 선생님들은 어린 것들을 모질게도 체벌했다: 이재명이 태어나 자란 집은 경북 안동 산촌의 두 칸짜리 벽돌집이다. 그나마도 셋집이었다. 일곱 남매가 그 집에서 복작대며 자랐다. 원래는 위로 형이 셋, 누나가 셋,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여동생이 하나로 아홉 남매였는데, 누나 둘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산을 개간하여 일군 밭에 약초를 길렀지만, 별 돈벌이가 되진 못했다. 아버지는 급기야 산전마저 팔고는 자리 잡으면 기별한다며 맏아들 재국이와 맏딸 재순이를 데리고 서울 어디로 떠나버렸다. 재명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이후 어머니는 남의 집 밭일을 하고 술을 빚어 팔거나 점방을 차려 다섯 아이를 키웠다.
마을에서 초등학교까지는 시오리나 떨어져 오가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학교가 멀어서 결석이 잦고, 가난해서 학습 준비물을 가져갈 수 없어서 화장실 청소나 매로 때웠다. 가난이 무슨 죄라고 선생님들은 어린 것들을 모질게도 체벌했다. 어느 날은, 집안일을 돕느라 방과 후 꽃 심기 미화 작업을 빼먹은 재명은 담임선생님한테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뺨을 맞았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명색이 학교 선생님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치욕을 안겼다.
아찔한 비탈에 선 소년공의 하루살이(경기 성남 상대원공단 1976~1981)1976년 2월, 아버지는 재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남은 식구를 다 성남으로 불러올렸다. 비 내리는 저녁 안동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탔다. 일행은 새벽 청량리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고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갔다. 진눈깨비에 진창이 된 비탈길을 따라 끝없이 올라갔다. 가서 보니 서울 밑 성남 달동네다. 가파른 비탈길 꼭대기에 지어진 집 두 칸짜리 월세방이 재명이네 아홉 식구가 살 곳이었다.
재명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공장에 취직했다. 만 열두 살의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재명은 연탄가스와 납 연기가 자욱한 공장에서 납땜하는 일을 했다. 수은과 카드뮴 냄새까지 뒤섞여 숨쉬기조차 힘겨운 작업장은 그야말로 불지옥이었다. 목숨을 갉아먹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해 받는 월급이 3,000원, 당시 쌀 한 가마니가 3만 5,000원이니 일 년을 꼬박 일해야 겨우 쌀 한 가마니 값 버는 거였다.
부패한 군대나 감옥보다 나을 게 없는 사회였다: 소년 노동자 재명은 여러 공장들을 거친 후 스키 장갑과 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대양실업 공장에서 프레스 반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프레스 기술자가 되면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재명은 어깨너머로 작업 공정을 익히고 쉬는 시간에도 몰래 연습했다. 그렇게 남달리 노력한 덕분에 재명은 프레스 기술자가 되었고. 월급이 1만 8,000원까지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재명은 왼쪽 손목이 프레스에 눌려 으깨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후로 왼손으로는 짐을 들거나 힘을 줄 수 없었다.
재명이 가는 공장마다 작업 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열악하고 험악했다. 게다가 반장이나 선임들의 폭력이 만연하고 비리가 판을 쳤다. 그런데 무지막지한 반장이나 선임들도 공장 사무실 직원 홍 대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굴었다. 게다가 홍 대리는 자유롭게 공장 밖으로 나다닐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재명은 그가 어떻게 대리가 되었는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졸’이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재명은 홍 대리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속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심정운을 만나 둘도 없는 공부 친구가 되었다: 홍 대리처럼 살려면 우선 고등학교부터 나오고 볼 일이었다. 고입 검정고시에 대해 알아보고 학원도 알아보았다. 8월에 있는 시험까지는 석 달의 시간이 있었다. 아버지도 석 달 학원 공부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때 학원에서 소년공 심정운을 만나 둘도 없는 공부 친구가 되었다.
마침내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렸다. 평균 60점 이상에 과락(40점 미만)이 없어야 합격이었다. 영어는 중학 3년 과정을 석 달 벼락치기로 공부하기엔 무리여서 거의 포기하고 다른 과목에 집중한 터라 과락이 걱정되었다. 평균 70점에 영어가 45점으로 과락을 면해 합격 통지를 받았다. 영어는 거의 찍었는데 45점을 받다니 하늘이 도운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싶었다. 눈물과 땀으로 받아낸 합격 성적표였다. 절박한 의지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재명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취를 뿌듯해하면서도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들이 취직 생각은 않고 학원만 드나들자 마뜩잖아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상대원 시장 청소를 하러 나가는 길에 재명을 깨워 앞세웠다. 쓰레기더미와 씨름하기 싫은 재명은 공부한다며 그만둔 공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다시 들어간 대양실업에서 폭력은 전보다 더 심해지고 교묘해졌다. 견디다 못한 재명은 대양실업을 그만두고 들어간 오리엔트(시계 공장)에서 공부 친구 심정운과 재회했다. 꼭 대학에 가자고 맹세한 두 소년공은 대입 검정고시 학원에 나란히 등록했다.
생산부 도금실은 밀폐된 공간이라서 맡은 일만 제대로 하면 눈치 보지 않고 틈틈이 공부 짬을 낼 수 있었다. 독성 화공약품 냄새가 지독해서 다들 회피하는 곳이지만, 재명과 정운은 공부 욕심에 자원해 들어갔다. 그런 도금실도 반장이 불시에 들어오는 바람에 틈틈이나마 공부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재명은 락카실로 자원해 들어갔다. 도금작업의 최종 공정을 진행하는 락카실은 이중으로 밀폐된 데다가 누구도 작업시간에 문을 열 수 없었다. 그제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틈틈이 공부할 수 있었지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계속 독성 화공약품에 노출되어 코가 헐고 후각을 잃어갔다.
영수 이상의 것을 가르쳐주신 김창구 선생님: 영수 단과학원인 성일학원에 두 달을 다니던 재명은 학원비 낼 돈이 없어 그만 다니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창구 원장선생님은 돈 내지 않아도 좋으니 공부나 잘하라면서 격려해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재명이 말고도 여럿이 원장 선생님 배려로 무료 수강을 하고 있었다.
1980년 4월 19~20일, 이틀에 걸친 대입 검정고시를 재명은 셋째 형 재선과 나란히 치렀다. 시험 결과 발표는 5월 중순이고, 대입 예비고사는 11월에 있을 예정이었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나서 대입 학원에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시험 결과나 보고 가라며 우선은 다시 취직부터 하라고 몰아세웠다. 재명은 그날 일기에 죽고 싶다고 썼다. 재명은 취직하는 대신 날마다 아버지의 새벽 일을 따라다녀야 했고, 가파른 언덕길로 손수레를 끌며 연탄을 날라야 했다. 5월 15일, 합격자 발표가 났다. 형제가 나란히 합격하고, 재명의 친구 심정운도 합격했다.
“재명인 자기 할 말은 했지요”: 아버지는 재명이에게 학원 다니지 않아도 갈 만한 전문대에 가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재명은 꼭 4년제 대학에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명문대라면 더 좋았다. 그러면 입주 과외를 해서 대학을 마칠 수 있다는 걸 성일학원 김창구 선생님이 알려주었다.
대입 예비고사까지는 6개월이 남았다. 재명은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4년제 대학을 가고야 말겠다고 정식으로 선언했다. 재명이 한번 작정하고 나서면 아무도 그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아버지는 책값이랑 학원비를 내주는 대신 5월이 가기 전에 다시 취직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일단 학원에 다니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 여긴 재명은 취직자리를 알아보았다. 마침 오리엔트에서 직공을 구했다. 취업서류를 써 들고 공장 문 앞까지 간 재명은 한참을 망설였다. 대입 예비고사가 5개월 앞인데, 공장에 다니면서 무슨 수로 고등학교 3년 과정을 공부하여 예비고사를 통과하고 본고사까지 대처할지 막연했다. 재명은 결국 공장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한테는 면접 잘 보고 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학원 시간 외에는 재명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학원 마치고 와서 복습하려는 재명을 밤중에 불러내 쓰레기 치우는 데 앞세웠다. 아버지가 아들 공부를 막으려고 작정한 성싶었다. 쓰레기를 치우는 중에 이럴 것이면 차라리 수면제를 먹고 죽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루는 몸살이 나서 아침에 자고 있는데, 아버지랑 어머니가 하는 얘기가 잠결에 희미하게 들렸다. 재명이 팔 병신 될 거라며 어머니가 “집 사려고 모아놓은 돈을 헐어 재명이 팔부터 고쳐줘요”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진 “그 돈엔 절대 손 못 댄다”며 잘라 말했다. 재명의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깨어나 보니 연탄불은 꺼졌고 정신은 말짱했다: 재명에게 대학 입시도, 팔 치료도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한 움큼 사다 놓았다. 재명은 날을 잡아 다락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사놓은 수면제를 한입에 털어넣었다. ‘이제 영영 떠나는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잠이 쉬 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연탄불은 꺼져있고 정신은 말짱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은 약사가 눈치를 채고 수면제 대신 영양제를 준 거였다.
단어장을 든 채로 졸다가 종점까지 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오리엔트 수위장에게 3,000원이나 바치고 취업 면접을 성사시켜 재명은 다시 오리엔트에 취직했다. 재명은 공부에 의욕을 잃고 퇴근 후에는 TV나 보며 빈둥거렸다. 과외 금지령으로 대학 공부 길이 막혀버린 상황에서 입시 공부를 할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재명은 답답한 마음에 성일학원 김창구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했다. 내년 1981년부터는 본고사를 없애고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군인들이 과외를 금지한 대신 인심을 얻으려고 뭔가 획기적인 후속 대책을 내놓을 테니 공부에 손 놓지 말고 기다려보라 했다.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된 재명은 다시 공부에 열중했다.
1981년, 성적이 우수하고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한 특별장학금 제도가 전국 대학에 도입되었다. 군인들이 대학 입학정원을 대폭 늘려주는 대신 파격적인 장학금 제도를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유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치군인들은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고, 프로스포츠 리그를 개설하는 등 국민의 관심을 정치가 아닌 딴 데로 돌릴 여러 가시적인 정책들을 쏟아냈다. 망국병으로 불리던 과외의 전면 금지로 민심을 사는 한편 파격적인 장학금 제도로 대학생들의 원성을 눌렀다.
그러는 중에 재명의 집은 월세에서 전세로 이사했다. 이제 다달이 4만 원을 집값으로 내지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는 재명이 계속 공장에 다니는 조건으로 대입 학원 등록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월급에서 2만 원만 집에 가져오고 나머지는 학원비와 책값 등으로 쓰도록 했다. 성남에는 종합반을 운영하는 학원이 없어 재명은 멀리 서울 답십리학원에 등록했다. 퇴근하자마자 시외버스를 타고 답십리 학원으로 달려가 밤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 강의를 들었다. 오가는 버스에서는 영어 단어를 외웠다. 돌아오는 길에 단어장을 든 채로 졸다가 종점까지 가기도 했다.
나의 어린 시절처럼 약한 사람을 돕겠다: 재명은 학원 다닌 지 두 달이 지나고부터 아버지가 학원비를 주지 않아서 5월부터는 TV 과외를 시청하며 독학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 월급은 이제부터 순전히 대입 공부에 쓰겠다며 아버지한테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을 모은 월급을 쥐고 학원에 복귀한 재명은 공장을 그만두고 야간반이 아닌 주간반에 등록했다. 남은 4개월을 온전히 공부에 집중해도 뜻한 바를 이룰지 장담할 수 없는데, 이대로 공장을 더 다녔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성싶었다.
1981년 11월 24일, 대입 학력고사의 날이 밝았다. 이윽고 학력고사 점수가 발표되었다. 285점으로, 전국 2,500등 안이었다. 서울대만 6,350명을 뽑았으니 전국 어느 대학이든 갈 점수였지만, 재명에게는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갈 대학이 필요했다. 중앙대학교 법과대학이 재명의 필요를 충족했다. 등록금 전액 면제에 다달이 20만 원의 생활비까지 지원되었다. 20만 원은 당시 공장 직공 월급의 3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대기업 초봉 수준의 월급을 받아 가며 학교에 다니는 셈이다. 친구 정운은 중앙대 공대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재명과 정운은 검정고시부터 대학까지 깊은 우정을 이어갔다. 수어지교, 지란지교의 우정이다.
군사 독재 시대, 인식의 전환과 부채의식(꿈에 그리던 대학 그리고 사시 합격 1982~1986)
“나는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어요”: 대학에 와서도 재명의 공부는 전쟁이었다. 중고등 과정을 건너뛰고 검정고시와 벼락공부로 대학에 왔으니 학습 전반의 기초가 부족한 건 당연했다. 특히 한자를 몰라 애를 먹었다. 대학생이 된 재명은 이제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정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경찰이 대학 경내에 상주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학생들은 “광주 학살 원흉 전두환을 처단하고 군부 독재 타도하자!”고 외치며 교정 여기저기서 기습 시위를 벌였다. “학원 사찰 중지하고 경찰은 물러가라!”거나 “노동운동탄압 중지하고 노동삼권 보장하라!”고도 외쳤다. 사복 경찰들이 들이닥쳐 최루탄을 터뜨리고 곤봉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하고 주동자를 끌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