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미국, 무역과 외교 전쟁의 역사
왕위안총 지음 | 행성B
중국과 미국, 무역과 외교 전쟁의 역사
왕위안총 지음
행성B / 2022년 4월 / 539쪽 / 25,000원
서문19세기에 세계는 유럽의 산업 혁명,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확장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국제 정치도 격렬한 변동에 휩싸이면서 오래된 제국이 붕괴하고 신흥 제국이 성장했다. 한편 세계사적으로 19세기 국가적 경쟁은 이후 민족 국가가 번성했던 20세기 중후반 세계 정치와 경제의 토대가 됐는데, 많은 역사학자가 19세기를 “아주 긴 19세기”로 설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이 시기 중국과 미국 역시 격렬한 변화를 경험한다. 두 나라는 정식으로 무역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오늘날 양국 관계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기반한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긴 굴욕의 시기였던 그때, 식민주의, 제국주의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근대적 외교 시스템, 근대화의 기본 방향과 틀이 정해졌다. 이 책에서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그 기나긴 19세기에 어떻게 서로 만나고 부딪쳤는지 세밀하게 살펴본다.
천조와 외번 - 청대 중국의 세계 질서
19세기 중반, 중미의 ‘중흥’
중미가 만났을 때의 중국 질서와 그 변천: 미국은 건국 직후부터 중국과 교역을 시작했다. 1784년 2월 22일 미국 상선 중국황후호가 뉴욕을 출발하여 8월에 광저우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교역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부터 1844년 양국 사이에 최초로 체결된 왕샤 조약 때까지 60년간을 ‘구 중국 무역(Old China Trade)’ 시대로 부른다. 당시 교역은 정부 주도가 아니었으며, 민간 상인들이 목숨을 걸고 부를 좇아 중국에 갔고, 광저우에 도착한 미국 상선은 제도와 운영 등 여러 면에서 잘 정비된 중국의 대외 무역 시스템을 체감했다. 당시 중국은 이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의 상인들과 수십 년간 거래해 오고 있었다. 참고로 명ㆍ청 시대 대외 무역 시스템을 연구한 중국 및 해외 학자들은 과거 중국이 무역과 외교 제도를 보완하면서 종번-조공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중국의 조공 무역 규정은 시기와 나라에 따라 달리 적용됐다. 청나라 초기에는 베이징에 와서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신하국임을 인정하면 교역할 수 있었다. 다만 서양에 대해서만은 지역, 시간, 방법 등을 상세하게 나누어 엄격하게 적용했다. 1757년 영국 상인 제임스 플린트가 닝보항에 무단 침입한 사건 이후로 서양 상인들은 오직 광저우 한곳에서 ‘십삼행(나라에서 지정한 상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상인 단체 13개)’과만 거래할 수 있었으며, 그곳에 머물 수도 없었다. 이런 외교 시스템 속에서 다른 나라들이 중국과 교류하려면 외번 속국으로 인정받아야 했으며 베이징 예부에서 이를 관리했다. 아편 전쟁 이전에는 조선, 류큐, 베트남, 란쌍, 시암(태국), 미얀마, 네덜란드 등과 ‘서양 여러 나라(1727년 대표를 파견했던 포르투갈과 1793년 사신을 파견했던 영국)’가 조공국에 포함됐다.
서양 상인은 광저우에만 머물러야 했기에 량광 총독과 광둥 순무(巡撫)가 베이징을 대표하여 외교 절차를 진행했다. 영국과 미국은 2차 아편 전쟁이 끝난 1860년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베이징에 갈 수 있었다. 그들은 1873년 동치제가 친정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중국 황제를 알현하며 천자의 용안을 보았다. 미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교역 규칙을 지키며 십삼행 상인들과 무역을 시작했고, 미국 선교사들도 광저우 외의 다른 지역은 갈 수 없었다. 아편 전쟁 이후 다섯 군데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가 개방됐고, 1844년 중국과 미국은 왕샤 조약을 체결하여 무역을 확대했다. 한편 2차 아편 전쟁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타이완의 타이난ㆍ단수이ㆍ가오슝ㆍ지룽과 본토 화난 지역의 충저우ㆍ차오저우ㆍ화둥 지역의 전장, 화중 지역의 한커우ㆍ주장, 화베이 지역의 덩저우ㆍ톈진, 둥베이 지역의 뉴좡까지 무역 항구를 확대했다.
1861년까지 유럽 국가들은 엄청난 속도로 중국 내 교역망을 넓혀 갔다. 동북 지역에서 출발해 창장강(長江) 중하류를 거쳐 하이커우까지, 이어 동남부 주요 항구를 아우르면서 동-서에 이르는 중국 연해 지역을 반월형으로 에워쌌다. 이 교역망은 항구를 중심으로 했는데 이들은 모두 불평등 조약에 의해 개방됐다. 학계에서는 아편 전쟁 이후의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이전의 종번-조공 체제와 구분하여 ‘조약 체제’ 혹은 ‘통상 항구 체제’라고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종번-조공 체제를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여전히 조선, 류큐, 베트남 등과 19세기 말까지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 시스템은 상업 무역이라는 경제적 기능 외에 국제 정치와 외교적 역할까지 수행했다.
반월형 교역망의 핵심은 상하이였다. 영국ㆍ프랑스ㆍ미국 3국은 1854년 상하이에 외국인 거주 지역인 조계(租界)를 설치하고, 연합으로 ‘상하이 공무국’을 세워 도시를 관리했다. 1863년에 이를 다시 ‘공공조계’와 ‘프랑스 조계’로 분리했는데, 조계는 중국 내에 있으면서도 중국 사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나라 속의 나라’였고,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은 조계를 대중국 무역의 교두보로 삼았다.
참고로 1854년에 미국 등은 상하이에서 중국의 세무 시스템을 바꾸는 대변혁을 일으켰다. 서양인이 중국의 세관 업무를 총괄하며 관세를 걷는 제도를 신설하고 이를 다른 통상 항구로 확대했다. 새로운 서양식 세관 제도로 인해 청나라 말기의 재정 상태가 악화됐고, 주된 세수인 농지세까지 줄면서 청은 관세를 담보로 유럽 국가로부터 엄청난 차관을 들여와야 했다.
19세기 중미 양국의 내부 중흥: 1844년에 중미 양국은 왕샤 조약에 서명하고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얼마 후 중국과 미국은 각각 태평천국 운동(1851~64)과 남북 전쟁(1861~65)이라는 격렬한 내홍에 휩싸이고, 전쟁이 끝나자 양국은 새로운 에너지로 ‘중흥’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동치제가 실시한 개혁 ‘동치중흥’은 중국으로서는 절박한 자구책이었다. 태평천국이 평정되고 2차 아편 전쟁이 끝난 후 청은 행정ㆍ관료ㆍ군사ㆍ세무ㆍ사법ㆍ교육 제도 등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특히 사상적 측면에서 서학 도입과 기술적 측면에서 양무(洋務) 사업이라는 전대미문의 대변화를 겪었다.
참고로 청 조정은 외교를 담당할 임시 행정 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여러 외국 관련 사무를 총괄하는 곳이라는 의미)’을 설치했다. 원래는 2차 아편 전쟁 이후 밀려드는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임시 조직이었으나, 전쟁 후 외국 공사들이 베이징에 머물게 되자 이들을 담당하는 가장 중요한 외교 조직이 되며, 1901년 외무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시기 거국적으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시작됐다. 무기 제작 공장과 군사 학교가 설립됐고, 서양식 선박과 대포로 무장한 근대 해군이 창설됐다. 베이징, 광저우에 통ㆍ번역과 외교 인재를 양성하는 동문관을 열어 개혁적인 지식인을 다수 배출했다. 그리고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세제 개편도 실시하여 내륙 지역에서 ‘상품 통과세’를 징수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주도하에 근대 서양식 세관인 총세무사가 상하이에 신설됐다.
한편 미국은 건국 당시 대서양 연안 13개 주의 연합에 불과했으나 1800년도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03년 프랑스에서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 서부로 영토를 넓힌다. 1845년에는 텍사스를 편입시켰는데, 이는 단순히 지리적 확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종교적 색채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점 운동’ 혹은 ‘서부 개척’으로 불리는 이 시기를 미국 역사 교과서는 ‘명백한 운명’으로 표현한다. 즉 미국식 문명과 제도의 전파가 하늘이 내린 사명이라는 것이다.
한편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서부 개척은 더욱 힘을 얻었다. 캘리포니아는 1850년 미연방 서른한 번째 주로 편입됐고, 1859년에는 인접한 오리건주도 연방에 가입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내전(남북 전쟁)이 발발했는데, 1861~65년까지 사회, 경제 분위기가 전혀 다른 남부와 북부는 전쟁을 벌였고, 북부의 승리로 뉴잉글랜드의 정치 이념이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면서 전후 미국은 더욱 큰 공간에서 발전 기회를 얻었다. 또한 미국 헌법 13ㆍ14ㆍ15조 수정 법안으로 노예제가 폐지되고 노예들도 선거권을 가지면서 이른바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로 진입할 에너지를 얻었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 이후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지자 개방적인 이민 정책이 대대적으로 실시됐다. 이민 활성화로 중국과 아일랜드 등지에서 많은 노동력이 유입되어 동부의 매사추세츠에서 서부의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원화된 미국에 견고한 인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울러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철로가 건설되어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켰다. 다양한 천연자원은 물론 풍부한 인적 자원이 국내 시장에 공급됐으며 이는 다시 국제 시장과 연결됐다. 미국은 지리, 경제, 사상, 문화, 사회 각 측면에서 약진하는 이른바 ‘황금시대(golden age)’를 맞아, 공업이 발달하고 산업 기반 시설이 확충됐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해외 진출에 필요한 자본이 마련됐다.
그리고 20세기 전후 미국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상태에서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미국은 중국과 일본에 진출했으며 하와이를 합병하고,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제도, 사모아 제도 일부를 점령하며 지구의 절반을 무대로 활동했고, 격렬한 논쟁 끝에 제국주의라는 무기를 손에 들기로 했는데, 이는 ‘미국 유일주의’ 혹은 전통 유럽 제국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로 해석됐다.
한편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흔들리던 청 왕조는 1912년 초 결국 역사의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청이 멸망하자 미국은 일본 등 제국주의 나라들과 경쟁하다가 1949년 중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1784년 상선 도착 후 1949년 퇴출 때까지 165년 동안 대중국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또한 그들은 문명을 중국에 전파했다고 자평했지만, 중국을 개종시키려던 몽상만큼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이후 1972년 마오쩌둥-닉슨 회담으로 중미 관계가 정상화됐을 때 양국은 한반도에서 이미 한 번의 전쟁을 치른 후 중국 남쪽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양국은 서로에게 낯선 존재가 됐다. 아무튼 마오쩌둥 주석과 닉슨 대통령은 새로운 역사 속에서 조우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은 어떤가? 최근의 무역 마찰은 일시적인 파도일 뿐이며 양국 관계의 발전이라는 큰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양국이 협력하면 서로 이익이지만 다투면 모두 피해를 입는다고 강조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중미 양국이 처음 만났을 때를 복기하는 작업은 오늘날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혼과 은(銀) - ‘중국풍’, 차와 아편
중국의 아편과 미국의 꿈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는 2차 대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네 차례 연임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미국 관리들은 그가 중국에 특별히 관심을 두었으며 중국에서 사업을 했던 외조부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 사업이 바로 아편 장사였고 이 아편이 미국의 꿈을 현실화했다는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의 중간 이름 ‘델라노(Delano)’는 외가 쪽 성을 이어받은 것이고, 이 집안은 중국 아편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가족 중 하나였다.
18세기 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중국 무역 적자를 만회하고자 아편 판매를 시작했다. 아편은 국적을 묻지 않고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으며 미국 상인들도 기꺼이 여기에 동참했다. 초창기 아편 무역에는 존퍼킨스 쿠싱, 새뮤얼 워즈워스 러셀, 앞서 말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조부 워런 델라노 주니어 등이 참여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중국에 온 그들은 광저우 십삼행의 거부(巨富) 오병감의 보호를 받으며, 아편 무역으로 큰돈을 벌어들인 후 예외 없이 모두 조국인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곳에서 국가 번영에 견실한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고, 부에 대한 정신적 가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편 윤리, 자본주의 정신: 청나라 말기 아편 무역은 근대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긴밀하게 엮이면서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 정신’을 짓밟았다. 아편은 중국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은화 유출, 무역 적자, 사회 빈곤, 퇴폐한 국민정신…. 결과적으로 아편에 중독된 수많은 영혼이 마시고 뿜어낸 연기가 미국 근대화와 미국의 백만장자를 도왔다. 이와 함께 자신의 육체, 가정, 사회, 국가도 허공에 날려 버렸다. 중국은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아편이 체제에 미치는 독성을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했다. 이후 중국은 수십 년간 연전연패하여 수습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한편 쿠싱, 러셀, 포브스, 델라노 등 미국 상인들이 대부로 추앙했던 오병감은 어떻게 됐을까? 아편 전쟁 전후로 오병감의 재력은 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나 오병감과 십삼행 상인들은 인문 교육, 의료, 건설, 전기 같은 근대 사업에 투자하지 않았다. 중국의 교육은 과거 시험을 위한 공맹 윤리와 사서오경에 함몰되어 있었다. 청나라 말, 중국의 진정한 실패는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상업 정신에 맞서 자본을 개인이 아닌 사회로 회귀시켜 민생 복리를 꾀한다는 인문주의 정신을 출현시키지 못한 데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더 많은 오병감과 거부들이 있었다 한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체제와 체면 - 조약, 친구, 예의
곽량(郭梁)의 죽음
사건 - 갑판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재앙: 1821년 9월 23일, 광저우성 외곽 주장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광저우의 여성 곽량은 작은 배로 서양 선박 주변에서 과일을 팔았다. 미국의 에밀리호는 볼티모어 선박으로 터키 아편을 싣고 왔는데, 선장은 윌리엄 코플랜드였다. 선원 프랜시스 테라노바는 곽량에게 과일을 사려고 했다. 곽량의 작은 배가 에밀리호에 접근하자 선원 테라노바는 습관처럼 돈을 물통에 넣어 내려보내는 듯했다. 그때 갑자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고 곽량이 바다로 떨어졌다. 얼마 후 곽량을 건져 올렸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시신을 확인하니 곽량의 머리에 큰 상처가 보였고, 배에는 항아리 파편이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선원이 던진 항아리에 머리를 맞은 곽량이 물에 빠져 숨진 것이라고 수군댔다.
조사 - 누가 범인인가?: 사건이 발생한 판위현의 지현 왕운임은 부두에 나가 와일리 영사, 에밀리호 선장, 미국 상인 그리핀 스티스와 함께 현장을 둘러보고 시신을 살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중미 양측은 각자 증거를 찾는 작업을 계속했다. 에밀리호의 보증을 섰던 십삼행 상인 여광원과 오병감이 통역과 중재를 담당했다. 그런데 쌍방은 피의자, 목격자, 증거 등에 관해 각자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왕 지현의 법정 - 에밀리호 선상의 판결: 10월 6일, 왕운임이 도착해서 목격자들의 증언과 검시 당시 상황이 부합하고 증인ㆍ증거가 확실하니 테라노바를 압송하여 처벌하겠노라고 통보했다. 미국 측은 남은 의혹이 많다고 반박했지만 소용없었다. 대치가 계속되자 중국 측은 범인을 내놓지 않으면 배에 올라 체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 측은 막지는 않겠지만 직접 내줄 수 없다고 맞섰다.
배를 봉쇄하다 - 무역 제재와 테라노바의 죽음: 다음 날 중국 측은 미국 선박에 엄격한 무역 제재를 내렸다. 항구에 있는 모든 미국 선박을 봉쇄했고, 무역은 중지되고 에밀리호는 발이 묶였다. 그리고 10월 24일 중국 병사들은 에밀리호에서 테라노바를 압송하여 광저우성에 있는 한 무역상 건물에 구금하고 면회를 금지시켰다. 다음 날 테라노바에 대한 심리는 외국인 참석자 없이 진행됐다. 량광 총독 완원은 도광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테라노바가 혐의를 부인하다가 진려가 영어로 질책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앞선 진술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고 기술했다. 사법 관리인 안찰사와 관리 등은 모두 “자백이 명확하니 교수형에 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