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친일파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신친일파
호사카 유지 지음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 336쪽 / 18,000원
강제징용 문제에 있어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조선인들이 강제 연행된 일본 탄광의 실상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원(이하 이우연)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2000년을 기점으로 일본 우파가 주장하기 시작한 논리와 핵심 부분이 똑같다. 그 논리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 ‘임금 차별은 없었다’, ‘일부러 조선인을 어려운 노동에 배치하는 등의 민족차별은 없었다’, ‘식사 등의 차별은 없었다’ 등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인데도 그들이 거의 취급하지 않는 사안이 있다. 그것은 본래 일본의 탄광 노동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을 대신하기 위해 일제는 왜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기타 전쟁 포로 등을 탄광 노동자로 연행했는가 하는 점들이다. 그래야만 조선인 강제연행의 실태를 전체적인 틀에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항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시 동원 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주된 송출처였던 일본의 탄광 사정을 우선 알아보아야 한다. 특히 탄광에서 노무관리가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그와 같은 사실들을 살펴보기 위해 일본의 최대 탄광으로 알려진 규슈 미이케(三池) 탄광의 노무 정책을 중심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의 본질을 알아보기로 하자.
죄수를 광부로 사용한 일본 탄광: 미이케 탄광은 일본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탄광이다. 미이케 탄광의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873년에는 일본 정부의 관영 탄광이 되었다. 그때부터 미이케 탄광은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노동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참고로 사실상 광부라는 직업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하로 내려가 힘든 중노동을 해야 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사고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무직보다 임금이 훨씬 많지만 탄광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확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탄광 측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주변 형무소와 의논해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을 작업장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미이케 탄광은 사업 확장에 필요한 광부들을 확보했다. 그 이후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여러 대형 탄광까지 위험하고 힘든 노동에 죄수들을 투입했다. 결국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 등을 전시 동원 체제로 연행해 탄광에 투입한 것은 이와 같은 ‘죄수 노동’을 계승한 정책이었다. 『브리태니커국제백과사전 소항목사전』인터넷판은 ‘죄수 노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죄수 노동: 단순한 형벌로서의 징역과는 달리 자본주의 초기의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실시된 특수한 임노동 형태. 선진국에서는 식민지 노동, 개발도상국에서는 기간산업의 급속한 육성을 위한 노동으로써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관영 공장, 광산 등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또한 민간 부문에서의 헛간 제도, 감옥방 또는 제2차 세계대전하의 중국인과 조선인 강제 노동, 전후 외국인 포로를 노동력으로 사용한 일 등도 똑같은 성격으로 죄수 노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앞의 인용문을 보면 결국 조선인 강제연행은 죄수 노동의 한 형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우연 등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일본 탄광에서의 노무관리 실태: 당시 탄광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나야 제도’로 불리는 노무관리 제도를 도입했다. ‘나야’란 창고 같은 곳에 광부들을 거주시키면서 관리인에게 관리를 맡기는 제도를 말한다. 나야 제도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서 일본에서 볼 수 있었던 노무관리 제도로, 탄광 자본가는 노동자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 노동자의 고용이나 관리를 나야 관리자에게 모두 맡겼다. 덧붙이면 탄광 사업주는 나야 관리자를 고용하고, 나야 관리자는 광부의 ‘모집’과 ‘고용’, ‘탄광 노동’, ‘임금 배분’ 등을 담당한다. 결국 나야 관리자가 광부들의 탄광 생활을 전반적으로 책임지고, 광부는 회사가 아닌 나야 관리자에 소속된 일종의 간접 고용 형태가 나야 제도였다.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 제도를 도입해 일본 정부나 일본군은 포주를 선정해 포주들에게 여성들을 모집하게 했다. 또한 위안부의 해외 이송과 현지 위안소 경영 등을 책임지게 했다. 결과적으로 탄광 나야 제도의 관리자 역할과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포주 역할은 그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나야 관리자는 광부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 광부들을 갱내로 보냈다. 광부의 임금은 나야 관리자가 광부들의 실적에 따라 탄광 측으로부터 일괄적으로 받았고, 나야 관리자는 일괄적으로 받은 임금을 광부들에게 분배했는데, 그때 나야 관리자는 일정 비율을 공제한 뒤 광부들에게 임금을 나누어 주었다. 결국 광부를 많이 거느리고 광부들이 많이 일할수록 나야 관리자의 수입도 늘어나기 때문에, 나야 관리자는 광부들을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탄광 노동에 투입했다.
한편 나야 제도 하에서 일했던 광부들의 사망률은 대단히 높았는데, 탈출을 시도한 광부들에게는 무조건적인 폭행이 가해졌다. 결국, 메이지시대 일본 정부와 대규모 탄광들의 죄수 노동 정책이 나야 제도 하에서 광부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조선인, 중국인, 전쟁 포로들의 강제연행과 강제 노동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일본인들도 기피하는 노예 노동에 조선인 등 타민족을 강제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인들에게 노예 노역이었던 탄광에서의 지옥 같은 착취 중노동을 타민족에게 시켰다는 사실을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미이케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 1946년 일본 후생성 근로국에 의하면 1940년부터 미이케 탄광으로 잡혀간 조선인 연행자는 1945년까지 총 9,264명으로 조사되었다. 반면에 미이케 탄광으로 연행된 중국인은 총 2,480명 정도였고, 포로는 총 1,700명이었다. 그리고 미이케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의 여러 증언도 있다. 다음은 1943년 11월 일본으로 연행된 이종필 씨의 증언이다.
이종필 씨는 22세 때 고향 사람들 60여 명과 함께 미이케 탄광의 요쓰야마 갱으로 연행되었다. 그는 갱도를 500미터 정도 내려가 석탄 깨는 작업을 했는데, 하루 할당량은 2톤짜리 상자 15개, 임금은 하루에 70전에서 1엔 정도였다. 이종필 씨 그룹에서 사망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틀에 한 명은 부상을 당했다. 부상하거나 병을 앓아 쉬게 되면 양을 3분의 1로 줄인 결근식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도주 방지를 위해 임금의 30~40%가 강제로 저금되었지만, 도주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 1945년 2월에는 고향에서 함께 온 60명 중 4명을 뺀 인원이 도주했다. 나머지 4명 역시 후쿠오카에서 B29 폭격 소식을 듣고 “조만간 일본이 항복할 것이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함께 탈출했다. 앞에서와 같은 증언으로 집단적 연행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부상이 일상적이었고, 일을 쉬면 식사량이 줄어들었다는 점, 탄광 측이 조선인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폭력적으로 관리했다는 점, 조선인들은 강제로 저금해야 했다는 점, 장시간의 과중 노동으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주하는 조선인들이 속출했다는 점 역시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노예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강제연행설 허구론자’들은 위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노예 노동을 부정한다. 그들이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의 변호사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인데, 지금부터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 반박하고자 한다.
강제징용의 진실은 무엇인가강제연행을 자발적인 선택으로 왜곡하는 이우연: 이우연은 다음과 같이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온 기업체 사원들에게 조선인이 내가 가겠다고 의사를 표시하면 심사를 거쳐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졌습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집’했을 때 ‘감언’이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정청정 씨는 1924년생으로 경북 고령군 출신이다. 1941년 2월에 요시쿠마 탄광으로 연행되었다. 일본으로 가면 취업처가 있고 생활이 좋아진다는 소문이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 진짜인 것처럼 퍼져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을 사냥하기 위한 감언이었다. 1941년 1월 28일 면사무소로 불려갔고, 다음 날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했다. 다음 날 경찰서에는 150명 정도가 있었고, 호명된 후에 내지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감시를 받고 있어서 질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략) (탄광에서) 도시락 반찬은 단무지 3개, 물병은 하나였다. 중노동을 감당할 수 없어서 지하에서 나오는 거품 같은 물을 마셨다. 하루 정도 쉬고 싶다고 말하면 반죽음을 당하므로 휴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망치려고 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반죽음을 당했다.’
《특고월보》가 증명한 조선인 노무자 혹사와 학대: 이우연은 조선인 노동자의 노예 노동과 강제 노동을 계속 부정하는데, 그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많이 있다. 먼저 일본의 특별 고등경찰이 내부 자료로 발행한 《특고월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고월보》를 보면 작업장에서 조선인의 이직이나 자유 이탈은 경찰이 저지했고,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이 다반사였으며, 구타 정도의 폭력은 단속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우연이 ‘로망’으로 표현한 일본으로의 취업이 작업 현장에서는 ‘지옥’으로 바뀐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특고월보》의 복각본(1973)에는 1943년 10월 사할린의 가네야마(金山) 숙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지인(일본 본토인) 노무계원 등 5명이 도주하려 한 조선인 노동자 2명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한 뒤 대들보에 매달게 하는 등의 린치를 가했는데, 한 명은 죽었고 또 한 명은 중상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특고월보》의 1944년 4월호 기사에는 오미네 탄광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1944년 4월 조선인 노동자가 탄광 갱구로 들어가기 전, 지도원 5명이 절도와 도주 혐의가 있는 조선인 이산흥린을 발견하여 초소로 연행한 다음 구타하여 결국 숨지게 했다. 이때 조선인 노동자를 살해한 범인 중 한 사람이 “조선인 한 명 죽였다고 해도 별 죄의식이 없는데, 특고경찰이 왜 조사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 노동자를 살해해도 죄의식이 없었다는 일본인 지도원들의 끔찍한 진술은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단적인 증거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위안부 관련 문서의 중요 부분을 은폐하는 사람들미군의 ‘위안부’ 심문 보고서 원문의 중요 부분을 은폐해도 되는가: 이영훈은 1916년 이후 조선 내에서 ‘공창제가 대중화’되었다고 주장하며, “일본군 위안부로 나간 여인의 상당수가 기생 양성소인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의 기생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권번 출신이거나 요리옥의 기생 출신자가 일본군 ‘위안부’가 된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매춘에 대해 잘 모르는 보통 여성들이 업자의 말에 속아서 전선으로 끌려갔다.
참고로 그런 증거 기록은 1944년 10월의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이 작성한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가 대표적인데, 이 보고서에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속아서 버마(미얀마)까지 연행된 사실을 밝혀놓았다. 그런데 이영훈은 이 심문 보고서에서 아래와 같은 핵심 부분을 인용하면서도 매춘과 관계없는 여성들이 속아서 ‘위안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선의 ‘위안부’는 기생이나 조선의 공창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먼저 이영훈이 책 『반일 종족주의』에 게재한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군의 의뢰인이 위안 서비스를 할 여인을 모집하기 위해 조선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내용은 부상병 위문이나 간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장병을 즐겁게 해 주는 일로 소개되었다. 의뢰인들은 다액의 수입, 가족 부채의 면제, 고되지 않은 노동,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신생활을 미끼로 제공하였다. 그러자 많은 여성이 그 허위의 설명을 믿고 전차금을 받고 응모하였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매춘업에 종사해 왔지만, 대부분은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받은 전차금의 크기에 따라 6개월 또는 1년간 군의 규칙과 위안소 업주에 묶였다.’
이영훈은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의 이런 핵심 부분을 인용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을 왜곡했다. 그는 “이처럼 동남아 위안소의 개설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일본군과 총독부의 개입이 두드러졌다”고 그의 저서에 적었다. 이 말은 원래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과 총독부의 개입이 두드러졌다”라고 써야 할 것이다. 또 이영훈은 동남아 위안소의 개설은 “일본군과 총독부”가 주도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는 금방 다음과 같이 말을 바꾸었다.
즉 “그렇지만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라는 그 본질에 있어서 동남아 위안소는 다른 지역의 위안소와 하등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왜 갑자기 일본군의 위안소는 “군에 의해 편성된 공창제”라고 주장하는지 이영훈의 논리의 일관성을 볼 수 없다. 여성들이 취업 사기에 속아서 본인의 의사에 반해 매춘을 강요당했는데, 그런 일본군과 조선총독부의 범죄를 가리기 위해 이영훈이 ‘공창제’라는 말을 끌어들였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가 조선 공창제의 연장이라는 그의 주장은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가 완전히 부정한 내용이다. 버마에서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중 대부분이 기생이나 공창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이, 업자들이 보통 여성들을 속여서 해외로 연행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업자들이 마치 조선의 성매매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해외로 데려간 것처럼 주장하는 이영훈의 글은, 허위를 독자들의 마음에 심어놓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의 몇 가지 부분을 다음과 같이 짜깁기해서 인용했다. ‘위안부란 일본군에 부속된 직업적 창녀들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가지고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개인별로 독방에서 생활하고 영업하였다. 식사는 위안소의 업주가 제공하였다. 그녀들의 생활은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식료와 물자를 구입할 수 있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생활은 좋았다.’ 그런데 앞에 이영훈이 인용한 글은 사실 미군의 포로 심문 보고서 속 몇 군데에 있는 여러 문장들을 가져와서 마치 한 단락인 것처럼 만든 글이다.
그릇된 ‘위안부’ 논리를 해부하다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메시지 중 하나는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가 새롭게 군 위안소를 설치했다기보다 기존의 성매매 업소가 그대로 일본군의 군 위안소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메시지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원래부터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 성매매 여성들이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영훈의 두 번째 메시지는 일제강점기가 된 후 빈곤계층의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렸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또 이영훈의 세 번째 메시지는 조선 여성들이 업자들의 감언에 속아 ‘위안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흔히 있던 일이고, 일본 정부나 일본군의 책임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이영훈의 일본군 ‘위안부’, 특히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주된 세 가지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