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철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이철희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0년 2월 / 231쪽 / 14,000원
진보의 정치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정치의 성공과 실패: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수적 우세뿐이다. 그런데 이 다수가 뭉쳐서 정치적 다수를 이루면 권력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민주주의로 자본주의의 권력 관계를 교정하는 것이다. 한편 정치가 이처럼 작동하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의 삶이 더 힘들어진다. 한국에 정말 필요하다고 하는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의 성공과 다름없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집단들끼리 타협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중재하고 압박하는 정치가 있어야 비로소 대타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가 풀지 못하는 과제를 사회적 대타협의 틀로 넘기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물론 정치에서 진영 대결이 치열하고 정파 간 분열이 극심한 탓에 정치를 통한 타협이 더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대타협이 우회적이거나 대안적인 해법으로 제기되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치를 우회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사회적 대타협 해법은 실현 가능성도 적지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그리고 정치를 통하지 않은 대타협은 소수의 담합 거래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예로 자본과 노동자 간의 타협을 도모할 때 전체 기업과 전체 노동자 간의 상생이 아니라 대기업과 그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조합 간에 타협이 모색되고 실현되는데, 이를 대타협이라 할 수는 없다.
정치의 기본 역할은 시장의 불평등과 차별을 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강자들의 횡포를 막고, 약자들의 삶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다. 정치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는 데 기여할 때 그 사회는 좋아진다. 소수보다는 다수, 강자보다는 약자, 승자보다는 패자를 챙기는 사회 시스템이 작동한다.
한편 정치에는 2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시장에 개입하지 않거나 못하도록 하는 정치다. 정치는 나쁘고, 더럽고, 유해하다는 전제하에 정치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정치의 정치’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시장의 불합리성과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가 개입하는 것이다. ‘1인 1표’의 민주주의를 통해 ‘1원 1표’의 자본주의를 조절하는 정치다. 이는 ‘반시장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크게 보면 반정치의 정치가 득세하는 나라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어렵다. 반면 반시장의 정치가 득세하는 나라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편하다. 물론 ‘반’정치, ‘반’시장이라고 해서 이 ‘반’이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항우울, 항정신성 등의 단어에 쓰이는 ‘항(抗)’의 의미다.
세상을 바꾸는 힘: 반시장의 정치는 불가피하게 반정치의 정치와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정치가 보통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그 정치의 효능이 체감되지 않을 때 정치는 잊히거나 거부된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에 의한 민주정치가 자동적으로 변혁적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라, 진보세력과 진보 정치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수단으로 정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때 가능해진다.
민주정치와 선거의 경험이 쌓이면서 최근 정치를 ‘발견’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더불어 정치를 ‘은폐’하는 움직임 역시 커지고 있다. 따라서 진보가 치러야 할 첫 번째 싸움이 바로 대중이 정치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시장의 정치가 그 효용성을 사회경제적 약자들에게 체감시켜줄 때 정치가 그 본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정치를 발견하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주체적 자각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적극적 노력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진보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데 아주 둔하다. 유능이냐 무능이냐 잣대로 나누면 무능에 가깝다. 진보가 집권한 3번의 선거를 보면 모두 정치를 통해 집권했다고 보기 어렵다. 1997년 대선에서는 보수가 초래한 IMF 사태 때문에 진보가 반사이익을 누렸다. 2002년 대선에서도 진보는 보수에 밀리고 고전하다가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라는 극적 이벤트로 판을 뒤집었다. 후보단일화는 선거연합의 한 예이기 때문에 정치를 통한 집권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의 단일화는 연합의 명분, 정책, 운영 방안 등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 유럽에서 많이 보이는 연합과는 다른 것이었다. 2017년의 대선 승리도 촛불시위라는 시민봉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보는 상대방의 대형 실패나 시민의 대중적 저항 또는 필사적으로 시도해 얻은 스턴트 액션과 같은 예외적 요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에서 평소 실력으로 승리하는, 다시 말해 비전과 정책과 인물로 다수연합을 만들어냄으로써 선거에서 승리하고, 설사 운 좋게 승리했더라도 집권을 통해 진보적 가치와 정책이 대세를 이루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진보는 도전자나 저항 세력이 아니라 주류나 주도 세력으로서 그 위상을 명실상부하게 보여줄 때다. (2019년 3월 1일)
진보는 닫히면 죽고 열려야 산다멋진 이상과 거친 현실: 진보든 보수든 이념이란 세상을 이해하거나 살아가는, 또는 바꾸는 방법과 다름없다. 누구나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더 좋은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논리적 방편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념이라는 이야기다. 사상도 마찬가지다. 이념이든 사상이든, 또는 패러다임이든 결국에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거창한 이상이라도 그것이 현실에 발을 딛고 서지 않으면 허상이 된다. 그리고 또 아무리 정교하게 마련된 이상이나 비전이라도 현실의 무궁무진한 변화를 모두 담아낼 수 없다. 그 때문에 현실의 변화에 맞게 이상이나 비전을 조응시켜야 한다.
그런데 현실만 보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망이다. 소수의 강자가 늘 승자가 되고, 다수의 약자는 패자로서 낙오되고 배제되는 현실이기에 이상과 비전은 필요하다. 이념으로서 진보가 보수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모름지기 더 나은 세상을 그리고 추구해야 진보다. 여기까지는 쉽다. 난제는 지금부터다. 비전과 이상을 다소 수정하더라도 실현하는 데 치중할 것인지, 아니면 완강하게 애초의 비전과 이상을 고집할 것인지, 이 고민을 피할 수 없다. 이상과 현실 간의 관계를 딱 부러지게 규정할 수 없다. 때에 따라 다르고, 케이스마다 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열림과 닫힘: 대한민국의 진보정치 세력은 닫혀 있다. 진보는 본래 새로운 세상으로 열림(open)을 추구하기에 닫힘(close)은 진보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땅의 진보는 닫혀 있다. 낡은 교조에 매달려 습관적으로 변화를 거부한다. 뭐든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고 하면 ‘안 된다, 하지 마라’는 주문만 외운다. 오랫동안 저항 세력, 소수파, 비주류, 야당의 입장에 서 있었기에 수구세력의 온갖 악행을 막고자 이런 행동 양식이 생겨났고 마땅히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집권 세력, 다수파, 주류, 여당의 입장이 되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와는 다르다. 의회 의석에서는 여전히 과반에 못 미치지만,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세력이나 구도에서는 확연하게 다수파가 되었다. 권력을 잡고 국가 운영과 시대 경영의 키는 이제 진보가 쥐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수파 열등감에 긴박되어 있다. 다수파 자신감을 보여주지 못한다. 여전히 현실에서 생겨나는 혁신의 욕구를 받아들이기 주저한다. 단언컨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진보는 절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없다. 정치적 진보의 DNA는 담대한 혁신이다. 낡은 원칙에 집착해 어떤 변화든 ‘안 된다, 하지 마라’고 하면 더 나은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성공이든 실패든 도전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정치를 통해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정치 문법을 수용해야 한다. 정치는 수의 게임이다. 다수를 형성해야 집권할 수 있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다. 다수파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하고 타협해야 한다. 다수파가 되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치 문법이 아니라 운동 문법이다. 운동(movement)은 다수냐 소수냐 하는 것보다 옳고 그름의 차원이 중요하다. 당장 실현하기보다 안 되더라도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주창해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협이다. 주고받는 게임, 서로 양보해서 절충하는 게임이 바로 정치다. 내가 다 얻거나 큰 것을 얻고 상대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거나 조금 양보하는 것으로는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말 꼭 해야 하는 경우면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서라도 타협해야 한다. 단단한 정체의 벽을 뚫고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할 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 정치 문법은 진보든 보수든, 또는 새 정치든 헌 정치든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적대적 공존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데 집착하지 말고, 보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연연하지 말고 보통 사람의 삶을 보아야 한다. 더 크게 보고, 더 넓게 합치고,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보수를 이기기 위해 안달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진보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어떤 변화를 선택하거나 불가피하게 타협할 때 나중에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각오가 필수적이다. 그런 모험 없이 안전한 선택만으로 세상이 더 좋아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고 또 오만이다. 더 나은 세상은 진보에 더 많은 결단과 타협을 요구한다.
정치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진보에 맡겨져 있다. 그런데 그 진보를 표방한 정치세력은 여전히 닫혀 있다. 용기가 없다. 정치를 잘 모른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결단력은 모자란다. 낡은 교조에 빠져 현실에서 생겨나는 온갖 혁신의 움직임과 변화의 몸부림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다. 좋은 예가 있다.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을 둘러싼 더불어민주당 내 갈등이다.
2018년 10월 어렵사리 법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이 법의 내용을 놓고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갈등은 대한민국에서 진보를 표방한 정치세력의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금산분리 완화는 안 되며, 이 법이 자칫 특정 기업에 특혜를 줄 수 있으니 안 된다는 지적도 충분히 타당하다. 특정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화되는 것을 막는 것이 금산분리의 목적인데, 이 법에 따르면 그럴 가능성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수긍할 만하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다. 현실에서 인터넷전문은행을 활성화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합의 가능한 방법이 제한적이라면 타협할 용기를 내야 한다. 그 법에 따라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권력을 잡은 더불어민주당 하기 나름이다. 과정을 관리하고,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라고 국민이 준 것이 바로 권력 아닌가. 어떤 흐름이든 가능하면 물꼬를 터주어야지 무조건 막는 것은 하책이다. 철 지난 교조에 얽매여 무조건 ‘안 돼’라고 하는 완강한 태도에서 정체성 정치의 흔적을 느꼈다면 과민한 탓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진보가 열망했던 것 중에 일부 잘못 판단한 것으로 드러난 것도 없지 않다. 단적인 예가 로스쿨의 도입이다. 크게 보면 로스쿨의 도입은 득보다 실이 많다. 이런 사례를 통해 진보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다름 아닌, 우리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원칙이라도 현실의 요구에 따라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조주의는 안 된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넘어 수구일 뿐이다. 진보는 제자리걸음 하지 말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보는 최소한 정치에서 닫히면 죽는다. 열려야 산다. 결국 열린 진보만이 답이다. (2018년 11월 1일)
유능한 정치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좋은 정치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진보정치의 조건: 무엇이 유능한 정치를 가능하게 할까? 선거 때마다 수없이 반복해서 사람을 대거 바꾸는 물갈이 공천을 하고, 스펙이 좋거나 심성이 착하거나 잘 알려진 사람들을 발탁해도 정치의 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와 유권자 간에 만리장성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정치를 풀고 정치의 역동성을 열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가 유권자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에 반응하도록 하는 유일한 해답이라 할 수 있다. 또 사람만 볼 뿐 좋은 정당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것도 다른 이유다. 좋은 정당이 존재해야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 다수대표제에 의한 인물 중심의 정치보다 비례대표제에 의한 정당 중심의 정치에서 더 나은 사회가 가능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인된다. 정치의 기본단위를 인물보다 정당에 두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래서 선거제도가 중요하다.
고민해야 할 게 하나 있다. 착한 인물과 좋은 정치인의 상관관계다.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좋은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렵다. 선의와 신념을 말하는 정치인일수록 정치 문법에 약해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심성이 착할수록 타협에 주저하기 쉽다. 사과나무에 대한 평가는 사과의 맛으로 평가해야 하듯이, 정치인은 성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정성의 정치는 유능한 정치의 등장을 저해한다. 정치에서는 선의보다는 결과, 마음보다 실력이 핵심이다.
좋은 정치인은 지능지수나 스펙, 인격, 인지도 등과 상관없이 누구를 대표할 것인지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실천하는 정치인이다. 이런 정치인, 이런 정치 활동이 정치ㆍ사회적으로 보상받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또 대표되는 유권자들과 조직적ㆍ정책적 연계가 튼실해야 한다. 결국 추상적으로 말하면 유권자의 이해와 요구, 선호와 열정에 충실한 정치인이 유능해진다. 그런 정치인이 보상받는 시스템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프레임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진보는 사회경제적 프레임을 가동할 수 있을 때, 이 프레임 속에서 보수와 대비되는 ‘쉽고 간명한’ 이슈를 부각하면서 차별화할 수 있을 때 승리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패배한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정치ㆍ도덕적 프레임으로 승리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분단체제의 효과까지 있어 더더욱 그렇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진보가 패배하고, 2010년 지방선거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는 사회경제적 프레임에서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고, 후자는 그것을 보여주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무상급식이라는 쉽고 간명한 이슈로 복지에 대한 정당 간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복지 프레임이 천안함의 안보 프레임을 제압했다.
한편 정치의 소임은 갈등의 사회화에 있다. 사회화는 숱하게 많은 부분 갈등을 한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 제기하는 한편 그것을 개인적 부담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갈등ㆍ균열을 사회화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성격과 질, 힘의 관계 등이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누가 권력을 잡는지도 여기에 달려 있다. 어떤 갈등을 사회화해서 국가 의제로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 정치세력의 실력을 가늠하는 첫 번째 지표다.
등장한 갈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정치적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김용균의 죽음을 개인적 사고로 보느냐 사회적 참사로 보느냐에 따라 그 파장은 사뭇 다르다. 이렇듯 하나의 갈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정치세력 간의 경쟁이나 선거에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갈등을 대체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 정치세력이 A 갈등을 의제화하려고 하면, 다른 정치세력은 B 갈등을 의제화하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갈등을 의제화할 것인지를 두고 정치세력 간에는 치열한 다툼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선택된 갈등이 곧 누군가에게는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