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의 진화
허욱, 테런스 로릭 지음 | 에코리브르
한미동맹의 진화
허욱, 테런스 로릭 지음
에코리브르 / 2019년 7월 / 288쪽 / 17,000원
서론
2018년 한국과 미국은 한미동맹 65주년을 맞이했다. 한미동맹은 한국전쟁 후에 시작되었는데, 미국 지도자들은 남한을 방어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의도를 담은 신호를 좀 더 확고하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휴전 협정 체결 후, 미국은 남한에 네 가지 차원의 안보 공약을 실천했다. 첫째, 남한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3조에 포함되어 있는 안보 조항은 한 나라에 대한 무력 침공이 있을 경우 양국은 “공통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적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했다. 둘째, 미국은 남한의 전후 재건을 위해 대규모 군사적ㆍ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고, 남한이 스스로 방어할 능력을 개발하도록 도왔다.
셋째, 미국은 비무장 지대 인근에 있는 2개의 남침 가능성 있는 통로를 따라 2개의 전투사단을 배치했다. 이후 남한의 군사 능력이 증대하자 미국은 주한미군을 축소해 이 책을 집필하는 시점에는 남한에 2만 8500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넷째, 1958년 미국은 남한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고 남한을 미국의 핵우산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동맹국을 방어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미군 지도부는 핵무기를 남한에 배치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냉전의 종식과 북핵 위기의 확산으로 핵무기를 철수할 또 다른 동기가 발생했다. 결국 1991년 12월 미국은 한반도에서 모든 핵무기의 철수를 완료했다.
한미동맹은 과거에는 주로 지역 안보 관계였으나 변화를 거듭해 이제는 한반도 안보를 유일한 초점으로 삼는 관점을 넘어서고 있다. 양국은 지역과 세계적 안보 문제에 협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다. 그런데 양국의 관계가 60년 이상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국 사이에 변화가 있어왔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그 결과, 한미동맹은 광범위한 목적과 이익을 공유하는 동반자 관계에 더욱 가까워져서 한반도의 안보를 넘어섰고, 남한은 자국 방위에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 책은 이론적 틀로 동맹 이론과 억지 이론 그리고 발전 권력 이론을 활용하면서 한미동맹에서 발생한 변화, 그 변화의 원인과 동기 그리고 동맹의 미래 방향을 검토할 것이다.
이론과 한미동맹
한미동맹이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해왔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이 장에서는 동맹(同盟) 이론과 억지(抑止) 이론 그리고 발전 권력 이론에 관한 문헌에 바탕을 둔 이론적 토대를 제시한다. 억지 이론과 동맹 이론은 북한의 위협을 한미동맹을 통해 억지하는 비대칭적 동맹의 형성을 설명하는 기초를 제공하고, 발전 권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동맹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이론은 비대칭적 동맹인 한미동맹이 어떻게 그리고 왜 형성되고 진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비대칭적 동맹이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하는지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동맹의 유형
동맹은 회원국의 수와 힘, 동맹을 형성하는 목적, 동맹 공약의 세부 내용, 동맹이 존재하는 광범위한 안보 맥락 등의 요인들에 기초해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목적의 측면에서 보면, 동맹은 성격상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일 수 있다. 회원국의 역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맹은 대칭적이거나 비대칭적일 수 있다. 대칭적 동맹에서는 회원국의 힘이 비교적 유사한 반면, 비대칭적 동맹에서는 회원국의 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책은 방어적이고 비대칭적인 동맹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한미동맹은 이런 유형의 관계에 공통적인 모든 요소를 갖춘 전형적인 경우다.
한미동맹은 북한의 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탄생했고, 두 국가는 1953년 한국전쟁이 종결된 후 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부터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공약을 입증하기 위해 미군은 남한에 주둔해왔다. 미국 정부는 막대한 군사적ㆍ경제적 원조를 제공해 한국이 전쟁에서 복구하도록 도왔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해 남한을 미국의 핵우산 아래 두었다.
시간이 지나자 한미동맹에는 조정을 초래하는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 경제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민주주의로의 이행이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더욱 강력해졌고 그 뒤를 이어 정치 엘리트가 교체되었다. 민주화 이후 집권한 진보적 지도자들은 동맹 관계의 성격을 후원자와 고객 관계에서 전략적 관계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방어적인 비대칭적 동맹의 변화
존 미어샤이머에 따르면, 모든 동맹은 세 가지 잠재적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첫째, 회원국들의 행동을 조화시키기 어렵고, 그 때문에 동맹은 느리고 비효율적이 될 수 있다. 둘째, 부담의 분담 쟁점에 대한 마찰이 종종 있다.
셋째, 동맹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대해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특히 공동 전략을 개발할 때 그러하다. 만약 공동의 안보 위협에 대처할 필요성에 대한 합의를 유지하고 이런 문제를 극복한다면 동맹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동맹이 살아남더라도 위협 인식의 변화, 동맹 회원국과 국제 관계에서 권력 지형의 변동, 신뢰성 문제, 경제 발전, 민주화를 포함한 국내 정치의 변환, 엘리트 교체에 따른 국익 해석의 변화 등 때문에 동맹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화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요약과 결론
방어적인 비대칭적 동맹은 공동의 외부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오래 지속해온 동맹은 국가들 간의 차별적인 경제 성장으로 인해 달라진 정치적ㆍ군사적 환경에 직면하게 된다. 동맹의 약한 회원국은 자국의 강화된 군사력과 위험에 대한 전반적 평가로 인해 동일한 위협 인식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또 민주화 같은 국내 정치의 변화는 엘리트 교체를 가져올 수 있는 선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은 위협은 물론 동맹에 대해서도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아울러 강한 회원국에서 국내 정치의 변화도 역시 동맹에 파열음을 초래하는 동일한 쟁점을 수반할 수 있다. 그리고 동맹의 약한 회원국에서 국익의 확장과 국가 자부심의 고양은 비대칭적 동맹의 성격을 후원자와 고객 관계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변화시키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또, 군사적 역량의 증강 또한 동맹 회원국들이 수행하는 군사적 역할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초기 한미 관계와 한미동맹의 형성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전격적으로 침공을 감행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지만,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는 관심 대상의 목록에 즉각 올랐다. 왜냐하면 미국 지도자들은 남침이 소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냉전의 전선이 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남침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적대 행위의 중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의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안전보장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침략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는 두 번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치를 위해 유엔의 대응을 지휘할 유엔군 사령부(UNC)를 구성하고, 이 조직을 이끌 권한을 미국에 부여했다. 최종적으로 16개국이 유엔군에 합류해 다양한 형태의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한미동맹의 수립
1951년 7월이 되자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전투를 종결하기 위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이승만은 한미 관계의 미래와 대한민국 안보를 위한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특히, 이승만은 휴전 협정에 전쟁 재발을 유도할지도 모를 미국/유엔군의 철수가 포함될 수 있다는 점을 두려워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개입과 보호를 확보하는 방법은 상호방위조약이었다. 이승만은 양국의 국력 차이를 고려하면 자신이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한은 동맹에 기여할 것이 많지 않은 처지였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우리 두 국가의 상호안보조약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나는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승만은 미국 관리들에게 계속 로비했지만, 미국은 당분간은 망설이고 있었다.
한국전쟁 후 미국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는 투쟁에서, 그리고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한국이 중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남한과의 공식적인 동맹 구축에 착수해 잠재적인 분쟁을 억지하면서 남한을 방어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증명하는 공약을 제공했다. 한미동맹은 앞의 서론에서 언급한대로, 공식적인 안보 조약, 미국의 방대한 경제적ㆍ군사적 원조, 미군 전투 부대의 배치, 핵우산의 확장과 함께 미국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등 네 가지 주요 요소로 이뤄졌다. 한미동맹은 훗날 더 광범위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지만, 출범할 때의 주요 관심사는 억지와 안보였다.
한편 2009년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버락 오바마는 남한과 일본에 전화를 걸어 미국의 방위 공약을 재확인했다. 그 다음 달 오바마와 이명박의 정상 회담 때, 대한민국 관계자들은 대통령 수준에서 핵우산을 직접 확인해달라고 오바마를 압박했다. 오바마는 그 전 달 프라하에서 미국의 안보 계획과 관련해 핵무기의 역할을 줄이고 미국의 핵 무장력 감축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주저했다. 하지만 마침내 오바마는 한국의 요구에 승복하고, ‘한미동맹 공동 비전’을 정상 회담의 결론으로 발표했다. 공동 비전에는 “미국의 핵우산을 비롯한 확장 억지 공약의 지속”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남한이 추구해왔던 고위급 수준의 보장을 제공한 것이었다.
2009년 가을, 안보협의회의는 북한의 핵실험 이후 첫 회동을 가졌다. 안보협의회의 공동 성명은 핵우산 선언에서 중요한 변화를 담았다. 개정된 문구에 따르면, 미국은 “미국의 핵우산, 재래식 타격 능력, 미사일 방어 능력을 포함한 모든 범주의 군사 능력을 운용해서 대한민국을 위해 확장 억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러한 미국의 공약은 핵무기 이상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미국은 지적했다. 즉, 남한을 방어하는 데 핵무기에만 우선적으로 의존하지 않겠다는, 다방면의 공약을 제공한 것이다.
결론
한미 관계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지만 당시는 최소한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사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초기 미국의 행동은 한국을 일본의 지배 아래 넘기는 것이었다고 여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다시 미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관리들은 전후의 소란스러운 한국 정치에 대처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후 초기에 남한은 비교적 낮은 우선순위에 머물렀지만, 1950년 북한이 남침을 하자 최고 우선순위로 격상되었다. 미국 지도자들은 소련과 연계된 전쟁이 유럽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고, 이에 한국은 갑자기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남한과 미국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동맹을 형성했다. 이후 동맹은 진화를 거듭하며 장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압박과 긴장을 헤쳐 나왔다. 더욱이 동맹의 범위가 한반도 안보를 넘어 이제는 지역적ㆍ세계적 관심사를 포괄하는 동맹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에서 중요한 변수는 남한의 경제 발전 그리고 대한민국의 능력과 포부의 성장이었다.
한국의 민주화와 한미동맹
1987년 남한은 수십 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 후에 민주주의로 이행했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남한의 정치 발전뿐만 아니라 한미 관계에도 결정적이었다. 민주화로 남한과 미국의 더욱 긴밀한 정치적 결속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두 나라는 이제 유사한 정치 제도와 가치를 지니고, 안보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동반자 관계로 성장했다. 하지만 또한 민주화로 남한에서 새로운 엘리트들이 집권하게 됐고, 이들은 때로 한미 관계와 북핵 위기에 대해 미국과 다른 견해를 보이기도 해 동맹에 마찰을 더 많이 일으키기도 했다. 민주주의는 또한 더 많은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 남한에서 과거에는 억압당했던 반미주의가 부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한의 민주화와 한미 관계
1987년 12월 16일, 노태우는 과거의 선거인단 대신 직접 국민투표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여러 방식으로 한미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로 대한민국 경제의 성공 스토리는 미국이 안보 공약을 위해 수십 년간 남한에 제공한 자원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미국 관리들에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1982년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 연설에서 “이러한 경제적 성공을 가져온 여러분의 노력과 투지는 여러분의 자유가 지속되도록 돕고자 하는 미국의 결정이 유효하다는 것을 세계인들에게 입증했다”고 선언했다. 더욱이 남한은 미국이 구축한 세계 경제 체제 안에서 발전했다. 민주화는 한미동맹의 중요한 정치적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고, 한국과 미국 결속의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했다.
하지만 민주화는 또한 한미동맹에서 생겨나는 마찰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가장 일찍 나타난 마찰 중 하나는 반미 감정의 등장이었다. 민주주의로의 이행 후 반미주의의 등장은 3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의 속성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에 대중과 언론이 좀 더 용이하게 반미주의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선거와 정치 엘리트의 변화 때문이다. 1997년에 진보적인 야당으로 권력이 넘어갔는데, 새 지도자들은 보수적인 전임자들과는 다른 정책적 입장을 견지했고, 국익 또한 다르게 해석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정책에 기꺼이 역행하기도 했고, 이것이 한미동맹에 마찰을 초래하면서 반미주의를 가중시켰다.
세 번째 이유는 여러 사건이 누적되면서 미국이 한국의 우려를 살피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한국인들이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한국을 일제에 양도한 1905년의 태프트-가스라조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 미국의 한반도 분단 제안,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비롯한 광주 학살에서 미국의 역할 등 과거 미국의 행태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한국인은 그때마다 미국에 환멸을 느끼곤 했다. 이러한 인식이 반미주의의 기초를 놓는 데 일조했고, 반미주의는 불똥이 튀었을 때 거세게 타오를 수 있었다. 2002년 14세 한국 소녀 2명이 훈련 중인 미군 장갑차에 사고로 치여 사망한 후 반미주의는 최고조에 달했다. 미군 법정에서 장갑차를 운전한 미군들이 무죄로 석방되자 많은 한국인이 또다시 주한미군지위협정의 개정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과 반미주의의 주기적인 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반미 감정은 매우 낮다. 2015년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남한 사람의 84퍼센트는 미국에 우호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2016년의 다른 여론 조사에서는 거의 90퍼센트가 한미동맹을 지지한다. 하지만 2002년 단 34퍼센트만이 미국에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에 대한 시각은 최근에 꽤 유동적이었다. 따라서 다양한 요인이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를 변경시킬 수 있고, 또한 반미주의의 확산을 초래할 수도 있다.
민주화가 한미 관계에 미친 또 다른 영향은 한미 양국의 대통령과 여당의 정치적 지향이 양국 관계에 끼치는 파급 효과다. 두 나라의 지도자가 유사한 정치 지향을 가졌을 때 두 나라의 관계는 좋았고, 남한에 진보적인 지도자가 들어선 반면 미국의 대통령은 보수적일 때 두 나라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일 때 양국 관계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정치적 지향과 상관없이 좋았다. 이런 현상의 이유는 남한의 자유주의적/진보적 정치인들이 종종 대북 포용 정책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미국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은 대한민국의 정책적 선택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은 이런 접근법에 찬성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양국 간에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