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노회찬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다
노회찬 외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7월 / 230쪽 / 14,000원
노회찬을 만나다 (인터뷰)
노회찬과 삼성 X파일 - 노회찬ㆍ홍아미
2005년 8월 18일, 당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던 노회찬 대표는 삼성 X파일 녹취록을 입수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개원과 동시에 삼성에서 뇌물을 받은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으나 대부분 공소시효 만료로 무혐의 처분되었으며, 삼성 X파일을 폭로한 이상호 전 MBC 기자와 노회찬 의원만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때부터 이어져온 거대 권력과의 기나긴 사투는 결국 대법원 유죄판결로 씁쓸한 결과를 낳았다. 노회찬 대표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에 분개한 시민사회와 정치인들이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다(이 인터뷰는 2013년 3월 4일 노회찬 대표의 집무실에서 진행되었다).
삼성 X파일 사건에 대한 부당한 판결: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까지 한목소리로 성토했습니다. - 국회의원 159명이 서명했는데 민주통합당에는 모든 의원에게 서명 용지가 갔고, 대부분 서명해준 걸로 알고 있어요. 반면, 새누리당에는 전부 돌리지는 않았어요. 아마 다 돌렸다면 더 많은 의원이 서명에 참여해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만큼 이 사안에 대한 공감대가 상당히 넓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그만한 역사가 있는 거죠. 지금은 19대 국회지만 17대 국회 때에도 삼성 X파일 문제에 대해서 국회의원들의 입장은 비슷했어요. 당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부정 사건이다’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회의원 90퍼센트 이상인 280명 이상이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삼성 X파일도 특별법을 설치해서라도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법안을 공동 발의했을 정도로 인식이 비슷했어요.
덧붙여 통신비밀보호법 조항에서도 공익을 위한 불가피한 공개 행위임에도 과한 처벌을 하는 것이 애초에 법을 만들 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고, 벌금형이 없다 보니 과도하게 설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부득이 공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배려가 형벌에 반영이 안 되어 있어서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스스로 ‘이 법안에 문제가 있으므로 고치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런 판단을 한 사람이 여야 합해서 절반이 넘었고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공동발의자가 159명인데, 그만큼 공감대가 넓었던 것이죠.
벌써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삼성 X파일을 접하고 폭로를 결심했을 때 어느 정도의 후폭풍을 예상했나요? - 이렇게 길게 갈 줄은 몰랐지만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만만치 않은 후폭풍에 대해서는 각오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져야 할 부담이 생길 것이라고 느꼈죠. 왜냐하면 민주사회일수록 성역이 없어야 하겠지만,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는 성역이 존재하거든요. 처음 국회에 들어왔을 때 다른 당의 선배 의원이 저에게 조언을 해주었어요. 축하한다고 하면서 ‘앞으로 국회의원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삼성과 미국 문제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 그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려왔어요. 대략 짐작은 했지만 굳이 저한테 이야기를 해줄 정도라면 일반적인 정치인들에게는 정말 무겁게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농담 삼아 ‘그럼, 삼성 문제와 미국 문제만 건드리면 되겠네요’ 하고 대꾸하기도 했죠.(웃음)
그래서 일부러 삼성을 건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해 첫 국정감사를 할 때 삼성그룹 회장을 증인으로 신청했어요. 다음 날부터 제가 아는 모든 곳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뻔한 거죠.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저한테만 전화가 온 게 아니고 ‘받을 거냐 말 거냐’ 하고 표결 권한이 있는 의원들한테 연락이 갔더라고요.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자기한테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는데, ‘노회찬 의원의 증인 신청을 반드시 막아주세요’라고 되어 있었어요. 사실은 국회가 정당한 헌법과 국민의 권리로서 필요하면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채택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힘을 통해 제어되는 것을 보면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이미 그런 경험이 있었지만, 녹취록을 공개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 삼성 X파일 녹취록을 공개할 때도 그만한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저 자신에게 수십 번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후회하지 않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로 인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잖아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하지만 저는 배운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거든요. 국회의원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고 생각했을 때 당연히 공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대한민국에서 재벌, 특히 삼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공공연히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적당히 타협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 국민의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연초부터 소문이 있었고 녹취록이 돌기 시작한 지는 한 달쯤 지난 시점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부분이었어요. 저도 무조건 공개부터 한 게 아니고 처음에는 법제사법위원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늦어지고, 검찰 수사를 촉구했지만 수사도 안 되고……. 결국 임계점에 도달한 거죠. 삼성 X파일을 공개해서라도 떡값 검사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많았죠. ‘이 정보를 노회찬 의원 한 명만 알았겠느냐. 소속 정당도 군소 야당이라 정보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데, 정보력이 더 뛰어난 다른 당에서는 먼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공개하기는 했지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의원들을 비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법 정의를 위해 공수처를 설치해야 한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분이 실망한 부분이 바로 ‘사법 정의에 대한 불신’ 아닙니까? - 떡값 검사들을 아무리 수사하라고 해도 안 하잖아요.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이거나 고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검찰에서 수사하지 않고 독립적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만들어 수사하도록 할 생각입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라는 곳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편법적인 일을 해서 국민의 지탄을 받지 않았습니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해체하고 공수처를 만들면 특검을 별도로 만들지 않아도 되거든요(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013년 4월에 폐지되었다). 일종의 상설 특검이 되는 거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과 관련된 수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규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제가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주요 후보들이 공약으로 세워놓고 실천을 안 하는 것들이에요.
많은 정치인이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걸까요? - 대통령이 단임제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이 주기적으로 선출권 행사를 통해 검열을 하는 거죠. 대통령이 잘못하면 집권당이 바뀌잖아요.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다음에 낙선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판사들은 그것이 없어요. 판사들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해요. 그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렇다고 판사를 투표해서 뽑을 수도 없고……. 그래서 이것을 여러 가지 제도로 견제해야 합니다. 공수처와 같은 제도를 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등 국민적 감시의 강화, 정치권의 인사청문회 등을 확대해서 검열하는 시스템이 필요한 거죠. 근본적으로는 개혁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법부나 검찰 출신 사람들이 주된 구성원이다 보니 쉽지 않은 거죠.
진보정치의 위기, 현재를 진단하다: 진보정당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 2012년은 최악의 해였던 것 같아요. 제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애정을 갖고 오랜 기간 당을 책임져온 사람으로서는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때가 많았어요. 아무튼 정신적으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보다 더하지는 않지만 나아진 것도 없어요. 지금 제게 바람이 있다면 그거예요. 이 상황이 최악일 것. 더는 나빠질 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러나 이 상황은 남 탓할 게 별로 없다고 봅니다. 억울하게 이 꼴을 당한 게 아니라 진보세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초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책임인 거죠.
험난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도 많이 얻었을 텐데요. - 정말 없었으면 좋았을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진보세력은 다른 정치세력보다 작은 일에도 큰 상처를 받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숙명적인 거라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명제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세력에는 더 엄격하고 더 높은 수준의 잣대가 필요할 수밖에 없죠.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면 진보정치를 떠나야죠.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드는 시간은 무너지는 시간보다 훨씬 길거든요. 특히나 공직자들이나 당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높은 규율과 잣대를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처럼 정파니 뭐니 사적인 이유로 감싸는 일이 없도록 시스템도 개발해야 하고, 조직 문화 자체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지금도 다양하게 크고 작은 노력을 진척시키고 있습니다.
진보, 새로운 미래를 꿈꾸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고, 진보세력도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 사실 2012년 대통령 선거가 무척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년간의 대통령 선거 중에서 진보정치 세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후보가 가장 많이 출마했거든요. 많이 출마했다고 좋은 게 아니지만, 4명이나 나왔는데 이것은 상황이 무척이나 안 좋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나온 거거든요. 그만큼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고 개개인의 득표율을 보아도 제대로 지지를 받은 경우도 없었고요. 진보가 더 낯설던 시절보다 못 받았다고 볼 수 있죠. 최악의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대통령 선거를 통해 드러난 진보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진보적인 프로그램과 진보적인 공약이 난무했어요. 과거 진보세력이 상당히 생경하고 어색하게 선보인 공약들이 이제 보수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어요. 전체적으로 한국 사회는 왼쪽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원래 있던 왼쪽은 거의 망한 상태다.(웃음) 이것이 참 아이러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 요즘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원래 복지는 보수가 하는 거야.’ 10년 전에는 분명히 아니었거든요. 20년 전에는 복지 이야기하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였고, 10년 전에는 복지는 택도 없다고 주장하던 분들이 ‘복지를 진보 없이 보수가 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부족하나마 복지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과연 그분들에게 맡겨서 복지가 제대로 되냐 안 되냐는 세계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거든요. 그보다는 진보가 빨리 기력을 회복하고 신뢰를 받고 다시 역할을 맡게 된다면, 좀 더 우리 사회가 빠른 걸음으로 복지국가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사는 모습은 여전히 어둡지만, 저 먼 곳에서는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으니 남은 것은 이제 거기로 가기 위해 용기를 내서 체력을 다지는 일입니다.
노회찬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평생 노동자로 살다 - 강수돌
노동자로 살기로 하다: 1973년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노회찬은 박정희 유신ㆍ독재 반대 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용감했고 의식이 일찍 깼다. 그것은 “전쟁을 겪은 소년이 더 이상 소년이 아니듯, 저 역시 그 뒤로 더 이상 소년이 아니게 되었죠”라는 노회찬의 고백처럼, 내면의 느낌을 속이지 않고 정직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1980년 대학교 2학년인 노회찬은 5월의 광주를 보며, 사회의 다수인 노동자들이 조직화ㆍ세력화하여 앞장설 때만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깨달았다. 노회찬이 본격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이때다. 노회찬은 1982년 노동운동을 위해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노동자 신분으로 ‘존재 이전’을 한다. 첫 직장 삼아 경기도 광명 소하리 기아자동차 생산직(단순 조립공)에 합격했으나, “실수를 해서 예비군이 나오는 바람에” 대학생 출신, 즉 ‘위장 취업자’임이 탄로가 나서 해고를 당했다. 그러나 노회찬에게는 취업이나 돈벌이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별 충격은 없었다.
노회찬은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되어 평생 노동자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평생’ 쓸 수 있는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그것이 용접기술이었다. 그리하여 노회찬은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재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중졸자라고 속인 채 6개월간 열심히 용접을 배운 끝에 1983년 초,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다. 이 자격증을 갖고 노회찬은 서울, 부천, 인천 등(대림보일러, 금호실업, 금화공업사, 현대철구 등)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그와 동시에 비교적 조용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노회찬은 여러 공장에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비밀’ 독서 모임도 조직했다. 1985년 경 노회찬을 중심으로 ‘위장 취업자’ 약 150명이 모였다. 이런 곳곳의 모임이 나중에 정치적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다.
그러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영화 〈1987〉에도 잘 묘사되듯이 청와대, 경찰청, 보안사, 안기부 등이 때로는 협력적으로, 때로는 경쟁적으로 “극렬 좌경세력 척결”에 폭압적으로 나서며 ‘공안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노회찬은 이런 정국 속에서도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 문서”를 배포했기에 1982년부터 수배되었다. 그래서 늘 불안과 공포, 의심과 경계심을 갖고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깨어난 자들은 꿈틀거린다. 1985년에는 대우자동차투쟁(더불어민주당 홍영표)과 구로동맹파업(자유한국당 김문수, 정의당 심상정), 1987년 6월에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폭로되면서 불붙은 시민항쟁이 터진다. 특히 6월 9일 연세대학교 시위에서는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의식 불명에 빠져 결국 목숨을 잃는다.
그때 노회찬, 송영길, 신지호, 주대환, 조승수 등이 참여한 인민노련이 출범한다. 이어 1987년 7~9월에 전개된 ‘노동자 대투쟁’은 이승만과 박정희 치하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진보 노동운동이 거의 궤멸된 뒤 약 40년 이상 억눌려왔던 노동자들이 사회적 삶의 주체로 다시 서는 과정이었다. 이어 인민노련은 19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라는 구호 아래 백기완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으나, 백기완 후보가 ‘야권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
30대 초반의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격주간『사회주의자』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89년 12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다. 1990년 3월경, 총 18명에 대한 2심 재판 과정에서 인민노련 멤버 오동렬과 윤태호는 스스로 ‘적색 공포’에 사로잡혀 공안 통치에 혈안이었던 재판부를 향해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편 청주교도소에 있을 당시 고향 선배라는 현직 검사가 노회찬을 찾아와 “반성문 한 장 쓰면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가게 해보겠다”고 회유했으나 “제가 여기서 반성문을 쓰고 나가면 다시는 운동을 해선 안 된다. 저는 몇 년을 감옥에서 썩더라도 나가서 운동을 계속해야 할 사람이다. 호의는 고맙지만 제 뜻도 이해해 달라”며 정중히 거부했다. 결국 노회찬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가입 혐의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1992년 4월에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