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아돌프 히틀러
박홍규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4월 / 156쪽 / 10,000원
히틀러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짧은 독일사 입문
고대에 여러 게르만족이 살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Germania)로 알려졌으나, 로마제국 때부터 훈족, 스웨덴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등의 침략을 받아왔고,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라 약 300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후진을 면치 못하고 지배층은 항상 프랑스를 모방하려고 했다. 그 후 프랑스혁명은 독일 지배층에게 민중에 대한 공포를 야기해 계몽적 이성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는 특히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 결과 이성까지 포기하고 민족주의가 다시 불타올랐다. 그것을 상징하는 책이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었다.
따라서 나치즘은 독일의 역사에서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부터 시작된 범게르만 민족주의의 연장이었다. 민족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국가권력은 확대되기 마련이다. 피히테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사상가였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잠정적으로 폭군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전권을 갖는 군주 1인에게 주권을 귀속시키는 전제정치가 이상적이라고 주장했다. 국가권력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 폭력과 전쟁도 비판할 수 없었다. 피히테가 민족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을 위시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긍정했다.
그런 사상사적 연관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독일이 지정학적으로 유럽 중앙에 있던 탓에 언제나 외부의 영향과 침략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의 정의와 정통성을 확실히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또 독일이 19세기 말까지 분열되어 다른 나라들보다 후진적이었다는 점도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킨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외세인 프랑스에 대한 적대감만이 아니라 내부의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비이성이 낳은 결과였다. 하지만 전쟁에 패배하자 유대인들에게 책임이 돌려지면서 반유대주의는 더욱 극심해졌고, 히틀러는 그러한 풍토 속에서 대두했다.
나쁜 혈통이나 성적 불량 탓만은 아니었다
1889년 4월 20일, 히틀러는 독일과 오스트리아(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접경지대인 브라우나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세관장이었던 아버지는 히틀러가 자신처럼 관리가 되기를 바랐지만, 히틀러는 관리를 혐오했다. 히틀러는 12세에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 낙제를 하고 15세에 슈타이어의 실업학교에 전학했다. 190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학교를 그만두고 희망하는 직업도 없이 바그너의 오페라에 사로잡혀 지냈다. 훗날 암흑 같은 어둠 속에 횃불이 타오르고 나치 깃발이 휘날리는 대집회장에서 광란의 히틀러 연설이 끝나면 바그너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히틀러는 화가가 되기 위해 1907년 빈으로 떠났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에 사로잡힌 그는 국립미술학교 시험에 2번이나 떨어졌다. 빈에서 실패한 히틀러는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뮌헨으로 갔다. 그러나 야수파,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혁신적인 화풍들이 인기를 끌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고 결국 화가의 꿈을 포기했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이주한 실리적 동기는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당하기 싫어서였고 뮌헨에 오면 징집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14년 1월 그는 뮌헨 경찰에 체포되고 잘츠부르크로 이송되어 병역 기피 혐의로 군법회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군대가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의 심신미약과 재정적 기반이 없음 등의 이유로 징집 면제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인 7월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거의 모든 독일인이 독일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 국민은 전쟁을 환영했고 특히 무직자인 히틀러에게는 직업을 제공해주는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독일 정부에 청원까지 해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25세의 히틀러는 2개월의 속성 훈련을 마치고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4년 11월 히틀러는 상병으로 진급해 연대 사령부의 연락병으로 활동했으나, 통솔력이 없다는 이유로 하사관으로 승진은 되지 않았다. 1918년 9월 말, 히틀러는 영국군의 독가스 공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병원에서 독일의 패배 소식을 들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히틀러는 뮌헨으로 돌아갔다. 히틀러는 군대에 계속 남아 있기를 희망했다. 군인으로서 사명감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이 점 역시 히틀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독재자가 되고 싶은 자는 쓸데없는 사명감 따위가 아니라 철저히 기회주의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히틀러는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기회주의자였다
1919년 4월 히틀러가 30세 생일을 맞았을 때, 지금까지 평범한 패잔병에 불과했던 히틀러의 삶이 별안간 바뀌었다. 즉, 부대 내 병사평의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부대마다 병사평의회가 설치되었고, 장병들도 혁명파에서 반혁명파까지 다양했다. 당시 뮌헨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했다. 그때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 휘하 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혁명 좌파에는 반감을 품고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가능한 한 군대에 오래 남고 싶은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5월이 되자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동원한 반혁명 우익 의용군에 의해 뮌헨의 공산주의 정권이 타도되고, 히틀러 부대에도 숙정위원회가 설치되자 히틀러는 그 위원으로 발탁되었다. 히틀러는 부대 내 혁명파들을 조사하고 적발해서 상부의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9월에는 반유대주의적 군소정당 중의 하나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했다. 당시 독일에서 군인이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히틀러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이 무렵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수락한 베르사유조약을 둘러싸고 나라 전체가 시끄러웠다. 조약의 내용은 독일에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독일은 이 조약으로 인해 제국 영토의 약 13퍼센트와 700여만 명의 인구를 상실하고 식민지와 해외 영토를 몰수당하는 등의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병력도 크게 제한되었다. 특히 배상금은 1,320억 마르크에 달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독일인들 중에는 조약 조인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전쟁이 재개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국민의 분노는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를 향했고, 국민의 지지를 잃은 좌파 대신 구체제 우파 세력이 대두했다. 그 우파의 하나인 독일노동자당은 국유 철도공장의 노동자인 안톤 드렉슬러 등이 창립했으나 상당 기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주도권을 잡은 후 점차 정당으로 자립해나갔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히틀러와 드렉슬러는 공개 집회를 열어 당명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꾸었다. 그 약칭이 NSDAP, 바로 나치당이었다.
나치는 25개조 강령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 2월 24일, 2,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맥줏집에서 나치당의 ‘25개조 강령’이 발표되었다. 강령의 첫 3개조는 베르사유조약이 새로 정한 독일 국경을 수정하고 국경 밖 독일인을 포함하는 대독일 국가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어 4~10조에서는 독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면서 독일인의 피를 갖지 않은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11~18조는 공익에 관해 불로소득 금지, 이자 노예제 타파, 트러스트기업의 국유화, 양로제도 확충, 건전한 중간층의 창설과 유지, 대백화점의 전시 공유화, 공익 목적의 토지 무상 몰수, 토지 투기의 방지 등이었다. 마지막 19~25조는 빈곤 아동 교육의 국가 부담, 모자 보호, 소년 노동 금지, 청소년 체육 장려, 국민보건 향상, 국민군 창설, 언론계의 유대인 배제, 강력한 중앙집권제 창설 등이었다.
나치당은 이 강령 4조에서 보듯이 혈통을 기준으로 국민을 정의하고 이에 근거해 유대인을 국민에서 배재했다. 동시에 11조 이하에서 보듯이 히틀러는 중하층의 위기의식에 호소해 중하층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명백히 보였다. ‘25개조 강령’에는 히틀러 정치 프로그램의 모든 것이 이미 분명히 드러나 있다. 나치당이 취한 행동은 그야말로 그때그때의 정세 판단에 따라 내려진 것으로, 언제나 기회주의적인 것에 불과했다. 순간순간마다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때마다 서슴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광신적 직관주의자의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만족할 줄 모르는 영원한 욕망 추구이기도 했다. 일관된 유일한 교의는 인종주의뿐이었다. 그것도 독일인이 최고 인종이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애국심에 근거한 미신적인 자민족 우월주의의 인종주의였다. 나치당의 민족주의적 정책이나 제국주의적 계획은 모두 그러한 인종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인종주의는 나치당에는 종교적 신념과 같은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 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에 의해 나치당은 무수한 극단주의 군소 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군대 퍼레이드를 모방해 대열을 짠 가두행진 등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당의 공개 집회도 매주 맥줏집에서 열었고, 입장객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히틀러의 연설이 압권이었다. 그의 연설에서 히틀러는 모든 악의 근원은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 바이마르공화국 의회정치가라고 주장했다. 유대인은 내부의 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이자 언론을 지배하고 도덕을 부패시키며 마르크스주의로 민족의 단결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대중에게 너무나 쉽게 먹혔다. 그래서 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었다. 나치당은 점차 히틀러 개인당으로 변하고, 1921년 중반 히틀러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힌다. 히틀러는 군대의 중요 인물들과 교류했다. 그에게 심취한 사업가나 자산가들도 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히틀러는 나치당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적인 법원과 감옥이 히틀러를 살렸다
1923년은 독일의 배상 거부에 분노한 프랑스ㆍ벨기에 연합군이 독일의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점령군에 대해 소극적으로 저항을 하자 독일 국민들은 극도로 격앙되었다. 점령 후 4개월 시점에 프로이센에서 점령군에 대해 무장투쟁을 시도한 청년이 프랑스 군법회의에 의해 처형되자 분노의 화살은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를 향했다. 그 청년은 당시 프로이센에서는 나치당이 금지 당해 생긴 나치당 위장 조직의 멤버였다. 히틀러는 그 청년을 민족의 영웅으로 내세우며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를 민족의 적으로 공격했다.
이로 인해 수상이 퇴진하고 새 수상은 소극적 저항의 중지를 선언했다. 이러한 엄청난 혼란 속에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군과 우익은 쿠데타를 통해 군부독재를 수립하고자 획책했다. 그 무렵 나치당은 단독으로 정권을 쥘 가능성은 없어서 우익 단체들과의 공동 투쟁을 도모해 쿠데타를 시도했다. 1923년 11월 8일 밤, 히틀러는 맥줏집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당수인 히틀러는 즉각 체포되고 나치당은 바이에른 주를 포함한 독일 전역에서 정당 금지 처분을 받았고 돌격대 등의 관련 조직도 해체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국가 반역죄를 관할하는 라이프치히 국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히틀러가 공화국방위법을 엄격히 적용하는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적어도 15년 이상의 중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 법무부 장관이 히틀러를 라이프치히에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뮌헨에서 재판받게 한 것이다. 1924년 2월부터 4월까지 열린 재판도 히틀러에게는 행운이었다. 바이에른 법원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반대로 좌익에는 엄격했지만 우익에는 관대했다. 쿠데타 관련자들이 쿠데타 관여를 부정한 반면, 히틀러는 쿠데타가 좌파들의 폭동과 달리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주장하면서 혼자 모든 책임을 진다고 하며 바이마르공화국 정부를 비난해 대중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히틀러는 반란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6개월 뒤 특사로 풀려났다.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사이 히틀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실업자 생활을 하던 요제프 괴벨스를 비롯해 수많은 히틀러의 추종자가 생긴 것도 바로 그때였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1925년 2월 말, 바이마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사망하고 3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히틀러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의 중심인 사회민주당 등 3당이 승리한 반면 나치당은 괴벨스를 포함해 12명이 당선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 전역에서 당과 돌격대의 지부가 세워졌다. 1928년 말에 당원 수는 약 17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시대는 다시 히틀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1929년 초부터 세계경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그해 초반 독일의 실업자 수는 다시 4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에 기업에서 임금을 낮추려고 하자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맞섰고 기업은 다시 직장폐쇄로 대응했다.
이런 가운데 1929년 7월, 미국의 은행가인 오언 D. 영이 독일 정부에 제안한 ‘배상 지불 감경안’을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수락하자 그 철회를 요구하는 국민청원 운동이 벌어졌고, 히틀러와 나치당도 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나치당은 독일의 배상 의무 자체를 폐기하고 독일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것도 거부하며 베르사유조약 등에 서명한 자들을 국가 반역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18.3퍼센트의 지지율을 얻어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했다. 이러한 도약은 나치당이 이제 국민의 다양한 이익을 서로 모순 없이 구현하는 정당이 되었음을 뜻했다.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와 달리 전몰 병사의 추도식을 거행하고 상이군경의 명예를 중시하는 것과 같이 민족의 명예를 내세운 정책도 나치당이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1929년 10월의 대공황 이후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우유부단과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상황은 더욱 비참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으로 경기를 활성화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나름으로 민주주의적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반민주주의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민주주의를 비롯한 현실주의적 근대사상은 독일 민족에 대한 음모로 여겨지고 의심받고 폐기되었다. 여기에서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만났다.
그 결과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힌덴부르크에 이어 히틀러가 36.7퍼센트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및 11월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원내 1당으로 등극하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총리로 임명됨으로써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어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된 이날부터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1945년 5월 8일까지의 12년 3개월을 나치 시대라고 한다.
히틀러, 완벽한 독재의 총통을 시작하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했다. 헌법에 의하면 차기 대통령 선거를 해야 했지만, 정부는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에 독일 국가원수에 관한 법을 제정해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합해 히틀러 총통에게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한다고 규정했다. 그 법은 힌덴부르크의 사후 즉시 발효되어 히틀러는 바로 그날, 총통이 되었다. 이튿날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전군 장병이 히틀러 총통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정부는 8월 19일에 독일 국가원수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결과는 투표율 95.7퍼센트에 찬성 89.9퍼 센트였다. 새로 임명된 각료의 얼굴을 보면 나치 당원이 9명, 보수파가 5명이었다. 신설된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는 요제프 괴벨스가 임명되었다. 국민계몽선전부의 설치 목적은 히틀러를 국민적 지도자로 숭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각료 회의를 소집하는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모든 정책은 개별적으로 히틀러의 재가를 얻어 실시되었다. 나치당도 히틀러 1인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