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이 만난 세계의 주요 정치가들
김승일 지음 | 경지출판사
마오쩌둥이 만난 세계의 주요 정치가들
장시우쥐안 외 지음
경지출판사 / 2017년 4월 / 562쪽 / 18,800원
중미관계(中美關係)의 새로운 일막(一幕)을 열다 - 마오쩌둥과 닉슨
태평양을 넘어선 악수
닉슨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점점 공개적으로 북경에 우호적인 태도를 표시했다. 또 1970년 10월 하순 닉슨은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야 칸을 만나 그에게 ‘중개인’이 되어 중ㆍ미관계 정상화를 위해 도움을 주셨으면 하고 청했다. 그리고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키신저가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하며 저우언라이와 예지엔잉과 여섯 차례 회담을 했고, 이때 닉슨대통령이 북경방문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탄 ‘76년정신’호 항공기가 북경상공에 도착했고, 11시 27분 비행기는 평온하게 북경공항에 착륙했다.
닉슨이 트랩을 반쯤 걸어 나왔을 때 저우언라이가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닉슨도 중국의 관습에 따라 박수로 답했다. 아직 서너 계단이 남았을 때 닉슨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우언라이도 자신의 손을 내밀고 의미심장하게 닉슨에게 말했다. “대통령 선생, 당신의 손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해양을 넘어와 저와 악수를 하는 손입니다. 25년 동안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 마오쩌둥은 중남해에서 닉슨과 회견을 가졌다. 중ㆍ미 양국 최고 수뇌가 마침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역사는 우리를 함께 데려왔다”
닉슨이 북경을 방문하는 시간에 마오쩌둥은 중남해의 집 안에 있었다. 그는 공항 영접도 하지 않았고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닉슨이 북경에 도착한 첫날, 저우언라이가 거행한 연회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할 때, 마오쩌둥이 닉슨과의 회견을 결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마오쩌둥이 그렇게 빨리 닉슨 일행을 접견하려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닉슨 일행(닉슨, 키신저, 윈스턴 로드 등)이 마오쩌둥의 방에 들어섰을 때, 마오쩌둥은 수행원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 말했다. “나는 말이 조리정연하지 못합니다.” 그는 중얼중얼하면서 자신이 기관지염에 걸렸다고 말했다. 이때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하면서 마오쩌둥은 농담으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옛 친구인 장 위원장(장제스)은 이런 모습에 찬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농담은 매우 효과가 있어 이 말로 그들을 책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여 미국인들을 매우 낙관적이게 했다.
회담은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하여 점점 깊게 들어갔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어제 당신은 비행기 안에서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를 하나 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패한 몇 가지 문제가 철학적인 방면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닉슨이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주석의 시와 발언(연설)을 읽었기 때문인데, 저는 주석이 매우 깊은 사상을 가진 철학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키신저가 이때 말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반 학생을 지정하여 마오쩌둥의 저작을 연구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겸손하게 말했다. “내가 쓴 글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가르칠 만한 것도 아닙니다.” 닉슨이 말했다. “주석의 글은 전국을 감동시켰고,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세계를 변화시키진 못했습니다. 단지 북경 부근의 몇 곳을 변화시켰을 뿐입니다.”
중ㆍ미관계 정상화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마오쩌둥이 말했다. “미국 측의 침략으로 일어난 혹은 중국 측의 침략으로 일어난 문제는 비교적 작습니다. 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 양국 간에 서로 싸움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일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고 싶어 하고 있으며, 우리의 병사들도 출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양국은 과거 22년 동안 항상 의견이 달랐습니다. 탁구대회부터 지금까지 11개월, 만약 당신들이 바르샤바에서 제의한 건의까지 합하면 2년이 넘습니다. 우리가 일을 처리하는 것에도 관료주의가 있어 당신들의 사람들이 왕래해야 한다는 이 일은 작은 장사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죽어도 원하지 않습니다. 몇십 년 동안 말했습니다. 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작은 문제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 안에 있는 것을 포함하여 말입니다. 후에 당신들이 옳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탁구대회를 한 것입니다.” 닉슨이 말했다. “중국은 결코 미국의 영토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또한 일본과 남조선(한국)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어떤 국가도 위협하지 않습니다.”
마오쩌둥은 소파에 앉아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항상 이야기의 중심이었고, 그의 주도 아래 이 역사적인 첫 번째 회담은 보기에는 마치 전혀 사심이 없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처럼 보였으며, 약간의 엄숙한 원칙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마오쩌둥이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암시를 했다. 마오쩌둥은 특이한 방식으로 닉슨의 방문에 대한 그의 입장을 표시하여, 중미관계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키신저는 후에 이번 담화를 바그너 오페라의 서곡에 비유하면서 더욱 발전을 해야만 비로소 그들의 함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마오쩌둥과 닉슨의 이번 회담은 회담시간을 원래 15분 정도로 정했는데, 이후 연장하여 70분 정도 진행되었다. 마오쩌둥과 닉슨은 계속 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었지만, 마오쩌둥의 건강을 염려하여 부득이 아쉬움 속에서 회담을 끝냈다. 이번 회견의 의의는 매우 중요했다. 마오쩌둥과 닉슨의 의견이 일치한 사실은 그들 쌍방이 모두 세계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출현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볼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국가 내부의 정치철학이 아니라, 세계의 기타 국가에 대한 정책이었다. 비록 마오쩌둥 자신은 그들과 회담할 주요 내용이 중ㆍ미 간의 새로운 관계, 소위 ‘철학’ 방면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기타문제는 저우언라이 총리와 의논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회담 중에 쌍방이 곧 토론할 중대하고도 실질적인 문제를 꺼냈고, 중ㆍ미 연합성명의 윤곽을 그렸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막론하고, 중ㆍ미 양국 최고 지도자들의 이 회담은 거의 모든 세계를 들끓게 하였다. 미국 기자들은 마오쩌둥과 어제 오후에 한 회담이 이번 방문의 성과를 보증했다고 판단했는데, 이 판단은 정확했다. 이 회담의 우호적이고 가벼운 분위기는 닉슨과 저우언라이의 회담을 위해 양호한 조건을 만들어 내었으며, 그들의 회담이 경직되어 ‘각자 따로 놀지’ 않게 되었고, 우호적이며 선의로써 몇몇의 원칙에 대하여 공통의 답안을 모색하게 했다.
“나는 계속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
마오쩌둥은 중ㆍ미 관계의 발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72년 닉슨의 방문 이후, 그는 전심전력으로 반패권주의 통일 전선의 구축과 육성을 시작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하여 해임당한 후, 마오쩌둥은 움직이기도 말하기도 매우 곤란했지만, 계속 내방한 외국의 주요 정치가를 통해 전언을 전달하고 닉슨의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그리고 1976년 2월 21일부터 29일까지 닉슨은 두 번째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마오쩌둥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나 그는 병을 개의치 않고 2월 23일 중남해의 처소에서 그를 만났다. 그들은 집안의 일과 천하의 일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했다. 마오쩌둥과 닉슨은 거의 10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국제관계 문제를 이야기할 때 마오쩌둥이 말했다. “중국과 미국이 잘 지내야 한다는 것에 나는 동의를 합니다. 우리와 유럽도 잘 지내야 하고,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도 잘 지내야 합니다. 미국은 세계의 이익을 보호해야 합니다. 소련의 확장을 설득할 방법이 없습니다. 계급이 존재하는 시대에서 전쟁은 두 개의 평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전쟁은 정치의 지속이고 또 평화의 지속입니다. 평화는 바로 정치입니다.” 닉슨이 말했다. “러시아는 계급이 없는데 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마오쩌둥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계급이 있습니다. 중국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이에 닉슨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어 닉슨이 말했다. “미ㆍ중 양국은 비록 사회제도가 다르지만 우리 양국이 세계적 범위에서 공통의 노력을 하기만 하면, 나는 이 시기가 곧 평화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시기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일정기간 동안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다면 우리의 합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매우 잘 말했습니다.”
이는 마오쩌둥의 외국 수뇌와의 마지막 회견이었다. 이로부터 반년 뒤 마오쩌둥은 세상을 떠났고, 그날 닉슨은 성명을 발표하며 말했다. “1972년 북경에서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철학과 관념을 대표로 하는 지도자로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중ㆍ미 우의가 이미 우리 양국의 이익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세계정세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매우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중ㆍ미 양국은 그때부터 새로운 관계를 건립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에 공을 돌려야 했다.” 닉슨은 계속 성명 중에 마오쩌둥을 찬양하면서 한 명의 ‘남들보다 매우 특출한 사람’, ‘용기 있고 비범한 사람, 사상이 굳건한 사람’, ‘완전히 헌신적이고 현실을 중요시하는 공산당인’이라고 했다. 이는 바로 마오쩌둥과 왕래 후 닉슨의 마음속에 있는 그의 형상이었다.
얼음을 깨는 여행, 중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다 - 마오쩌둥과 다나카 가쿠에이
중일 국교정상화의 실현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다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미국은 오랫동안 추진하던 ‘중국에 반대하고 고립시키는 정책’을 포기했다. 그런데 중ㆍ미 관계의 개선은 미국을 추종하고 중국을 적대시하는 일본정부를 매우 당황하게 했다. 그래서 미국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일본의 사토우 에이사쿠 내각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서신을 보내 ‘중국 방문 요청’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이를 거절하고 중국과 일본의 담판은 사토우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1972년 6월 사토우 내각이 물러나고, 7월 다나카 가쿠에이가 일본의 신임 총리가 되었는데, 다나카는 중ㆍ일 국교정상화를 빨리 달성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고, 다나카의 적극적인 대중국 방침은 중국정부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양국 정부는 각종 정세를 고려하여 서로 대표를 파견하며 협상을 진행하고, ‘같은 것은 취하고 다른 것은 미뤄둔다’는 정신에 입각하여 중대한 원칙적 문제에 대하여 서로의 이해를 빠르게 얻었다. 그리고 7월 3일, 중일비망록무역사무소의 신임 주일 수석대표 샤오샹치엔이 동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7월 10일 저우언라이는 순핑화를 파견하여 다나카를 초청하게 했다.
그리고 1972년 7월 25일 다나카가 수상이 된 지 18일째 되는 날에 그의 막역한 친구이자 공명당 위원장 카케이리 요시카스가 파견되어 중국을 방문했다. 저우언라이는 7월 17일부터 29일까지 그와 세 차례 상담을 하여 중ㆍ일 관계정상화에 중요한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8월 11일 오오무라 외상이 샤오샹치엔을 만나, 중ㆍ일 국교건립문제에 대하여 회담을 진행했고, 쌍방은 이 회담에서 기본적으로 의견 충돌이 없었다. 그런데 사실 일본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수많은 우익세력들이 다나카에게 전화를 하여 중국에 가서는 안 되었다고 위협했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사누마 이네지로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임무를 반드시 이번 방문에 성공시켜야 했다”
어쨌든 1972년 9월 25일 다나카는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 도착했고 공항에서 저우언라이 총리 등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날 오후 인민대회당에서 쌍방은 제1차 회담을 진행하였다. 회담에서 다나카는 먼저 내각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기정사실로 만든다면, 일본 내 반대세력의 방해를 많이 감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의견에 찬성을 표시하고 ‘조약의 방식이 필요 없이 국교 후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날의 회담은 순조롭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저녁 6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인민대회당 연회실에서 환영연회를 열었다. 먼저 저우 총리가 환영사를 발표했고, 다음에 다나카의 발언이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동경에서 북경으로 왔습니다. 중ㆍ일 간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관계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는 양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동시에 2천 년이 넘는 다채로운 문화교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열렬한 박수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나카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과거 10년의 중ㆍ일관계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는 불행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일본은 중국인민에게 폐를 많이 끼치게 된 일에 대하여 나는 이번에 매우 깊은 반성을 표시합니다.”
그런데 26일에 두 번째 회담 중에 저우언라이 총리는 다나카가 연회에서 말한 “폐를 많이 끼쳤다”는 발언에 대하여 교정과 비판을 했다. “다나카 수상이 어제 저녁 연회에서 한 연설 중에 ‘폐를 많이 끼쳤다’라는 말은 중국인민의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침략전쟁은 결코 ‘폐를 끼치다’란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폐를 끼치다’는 단지 작은 사정에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우언라이의 교정과 비평에 초점을 맞추어 다나카가 만감이 교차했다는 듯이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다.
27일 오후 쌍방은 제3차 수뇌회담을 진행했다. 회담의 초점은 일본과 대만의 관계문제였다. 이날 중일 쌍방은 구동존이(求同存異) 원칙에 입각하여 기본적인 협의를 달성했고, 비교적 순조롭게 진전되었다. 참고로 다나카 수상은 저우언라이의 외교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를 ‘몸은 버드나무와 같이 여리지만, 마음이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마오쩌둥은 대국을 한 번에 결정하고, 중일관계 정상화를 서둘러 성사시키다
그날 저녁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수행하여 중남해 풍택원에서 다나카 수상, 오오무라 외상, 니카이도 관방장관 등 3인을 접견했다. 마오쩌둥은 다나카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마중을 나가 모두와 악수를 하고는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다나카에게 물었다. “다나카 선생, 당신들이 그 ‘폐를 끼쳤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우리는 중국의 관습에 따라 수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나카가 간결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훈계하듯이 말했다. “단지 ‘폐를 끼쳤다’고 말하면 젊은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이것은 물이 여인의 치마에 튈 때 하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지적한 후, 마오 주석은 화제를 다나카 수상의 중국 방문으로 전환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이번에 북경에서 어떤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까? 세계는 지금 걱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련과 미국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내심은 불안정합니다. 반드시 우리의 배후에서 무슨 비밀 모의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속내는 더욱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비록 올해 2월 중국에 왔지만 현재 아직도 국교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진심으로 해결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곧 며칠 내에 해결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오쩌둥의 말은 중ㆍ일 국교정상화의 시간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느끼게 하여, 며칠 동안 긴장상태에 있었던 다나카 카쿠에이의 정신을 편안하게 했다. 이어 마오쩌둥은 역사적인 시각에서 중ㆍ일관계의 우호가 대대로 이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마오쩌둥의 접견은 중ㆍ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성공을 더욱 촉진시켰다. 28일 오후 쌍방은 제4차 수뇌회담을 진행했고, 「중일연합성명」 발표 전에 모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29일 오전 인민대회당에서 중국정부의 수뇌 저우언라이 총리와 지펑페이 외무장관과 일본 정부의 수뇌 다나카 카쿠에이 수상과 오오무라 외상이 「중일연합성명」에 서명하고 성명서를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