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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길

한승주 지음 | 올림



외교의 길

한승주 지음

올림 / 2017년 6월 / 415쪽 / 28,000원





학문의 길



500년 서울 토박이 - 나의 출생과 성장의 배경

나는 한씨 가문에서 가장 큰 종파인 양절공파의 창시자이자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한확(1403~1456)의 21대손이다. 한확은 세종으로부터 세조에 이르기까지 유능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한편 나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중소기업인이었다.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생활했으나, 기업 경영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기업보다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작정하게 되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열 살 때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이고, 두 번째는 195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에 2개월간 연수를 다녀온 것이고, 세 번째는 1960년 4ㆍ19혁명에 참여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생사의 고비를 넘다 - 대학 시절의 4ㆍ19혁명

나는 1958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입학한 다음 해에 정치학과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로 나뉘게 되었는데, 나는 국제 정치에 관심이 많아 외교학과를 택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나는 4월 19일 아침,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을 독려하여 문리대 정문을 나와 종로를 지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행진했다. 그곳으로부터 효자동 길을 지나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 도착하니 총을 든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무대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교우인 정종문 군과 함께 바리케이드 50미터 앞쯤까지 갔을 때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려 다른 사람 밑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나도 얼른 엎드렸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 나의 스무 살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잠시 후 나는 낮은 포복 자세로 골목길로 들어가 진명여고 담장을 넘어 학생들이 수업 중인 교실로 몸을 피했다. 얼마 뒤 총소리가 멎은 후 나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KBS 국제방송국에서 영어 방송을 맡았는데, 취재, 기사 작성, 뉴스와 해설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직접 해야 했기 때문에 훗날 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하기 쉽게 논문을 작성하는 데 좋은 훈련이 되었고, 미국 유학 갈 때 풀브라이트 장학생에 선발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다양한 세상을 만나다 - 미국 유학 시절

석사과정은 뉴햄프셔주립대학에서 마쳤다. 박사과정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간 후에는 강의 조교를 여러 번 했다. 박사과정 6년간 버클리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교수 중 한 분이 스칼라피노 박사다. 나는 그의 연구 조교로 일하면서 책 쓰시는 것도 많이 도와드리고 함께 여행도 했다. 그리고 버클리에서 자유언론운동이 한창이던 1965년, 나는 UNDP(유엔개발계획)의 하계 인턴으로 선발되어 2개월간 뉴욕의 UN본부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상당히 귀중한 경험이었다.

유대인과 한국인 - 뉴욕시립대 교수 시절의 견문

UC버클리에서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마친 나는 귀국할 것인가, 몇 년간이라도 교편을 잡으며 미국 대학에서 경험을 쌓고 인적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가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고, 결국 후자를 택해 1970년 뉴욕시립대학교 산하 브루클린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내가 뉴욕시립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황당한 일이 생겼다. 뉴욕시가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파산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시립대학 교수들을 포함한 모든 뉴욕시 고용원들의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나는 뉴욕시에서 일하면서 뉴저지 주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4개의 정부(뉴욕시, 뉴욕주, 뉴저지주, 미연방정부)에 세금을 내고 있었다. 봉급이 나오지 않자 나는 거주지인 뉴저지의 연방 실업 사무소에서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는데, 이는 불편한 일이었으나 미국의 제도나 시스템과 정책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부교수로 승진하고 종신교수직을 보장받았으나 한국으로 돌아가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한미관계 강의 - 고려대 교수 시절

그즈음에 나는 고려대학교로부터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리고 1987년 가을 학기에 고대에 부임하자마자 나는 강의 준비와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한편, 김준엽 선생이 이끄는 아연(아세아문제연구소)의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다. 아연의 활동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통일 문제, 한일ㆍ한미ㆍ한중ㆍ한소 관계의 연구와 교류 활동이었다.

한편 내가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 해인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후 김재익 박사를 경제 수석으로 등용했는데, 그는 나의 경기고, 서울대 외교학과 선배일 뿐만 아니라 손위 동서이기도 했다. 참고로 그는 간혹 군사 독재자를 보필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봉사는 전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편 김 박사는 전 대통령의 경제 수석이 되기 전후로 그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나도 김경원 비서실장의 천거로 미국 정치와 한미관계에 대해 사흘간 매일 2시간이 넘게 사적인 강의를 했다.

활동 무대를 넓히다 - 민간외교 참여

1982년 김준엽 선생이 고려대 총장에 취임하시면서 아연 소장의 직책을 나에게 맡겨주셨다. 나는 아연의 소장으로 또는 개인 자격으로 여러 개의 주요 회합과 프로젝트를 주관하거나 참여하면서 해외 학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우리나라 외교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중 하나가 일본과의 지적교류 사업이었다. 한일 지적교류 프로젝트는 경제, 무역, 청소년 교류 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영토 문제 등 다루기 어려운 정치적 문제까지 논의의 의제로 삼았다. 그 노력의 결실로 1988년 양국 정부 간 위원회인 한일21세기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한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후에 APEC 결성의 모태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회합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민간 회의였던 윌리엄스버그 회의이고, 또 하나는 반관반민 조직인 PECC였다. 나는 1980년대에 이 회의에 참여하면서 각국의 지도급 인사들, 특히 정부 인사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뉴스위크와의 인연 - 영어 칼럼을 통한 나의 정치 활동

이렇게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나는 외신 기자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84년 어느 날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동경지국장이던 트레이시 달비 기자(후에 뉴스위크 편집장 역임)가 나에게 뉴스위크에 칼럼을 써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때까지 뉴욕타임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금은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가 되었음) 등에 글을 쓴 일은 있으나, 어느 신문이나 잡지에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일단 한번 써보겠다고 대답하고 한일관계에 대한 칼럼을 집필했다. 그 글이 1984년 4월 30일 자 뉴스위크에 실린 ‘일본 정부의 한국 문제 대응’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칼럼이었다. 이로써 나는 당시 독일의 테오 좀머, 미국의 조지 윌 등 저명한 국제적 칼럼니스트들과 더불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스위크의 외부 국제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외교의 길



외무 장관을 맡아주시오 - 김영삼 대통령의 ‘깜짝 인사’

1992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한 달간은 ‘대통령의 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각국 대통령을 많이 만난 달이었다. 그달 중순에 나는 퇴임을 한 달여 앞둔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 그리고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을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쯤 지난 1월 중순,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정책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밤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갔다. 밤 10시 비행기로 알고 8시 반쯤 공항에 도착했는데, 비행기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항공권에 출발 시간이 20:00시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10시로 착각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떠나기로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늦은 시간에 당시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의 비서였던 김기섭 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당선인께서 저녁을 같이하고 싶어 하신다는 전언이었다. 1월 18일 저녁 6시 신라호텔 2209호라는 것도 확실히 전했다.

필리핀에서 귀국한 1월 18일 저녁 신라호텔 2209호실에서 김영삼 당선인을 만났다. TV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김 당선인의 선거운동에 참여하거나 그의 당선에 이바지한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떤 직책을 제안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김 당선인이 불쑥 “외무가 중요한데, 한 교수가 맡아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맡아달라는 이야기로 듣고 고사할 생각이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입니까?” “외무 장관을 맡아주세요.” “공무를 맡아본 경험도 없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다 알아서 부탁하는 것이니, 그러지 말고 맡아주세요. 단,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합니다. 부인에게도 말이지요.” 나는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영삼 당선인은 직업 외교관이 아닌 데다 관료 세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나를 전례 없이 외교 수장의 자리에 임명하여 임명권자로서 하나의 모험을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30여 년 동안 외교를 배우고 가르쳐온 사람으로서 외무부 장관이라는 뜻밖의 자리는 사명감을 갖고 도전해볼 만한 직책이었지만, 동시에 대단히 부담스러운 자리이기도 했다.

2월 26일 아침 9시에 내각 명단이 발표된다고 해서 TV를 지켜보았다. 청와대 측의 보안이 어찌나 철저했는지 발표 직전까지도 외무부 장관 예상 인물 후보에 내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언론사들은 내 사진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 TV에서는 신임 외무 장관인 내 자리에는 이름만 있고 사진은 없이 빈칸으로 남겨둔 채 내각 명단이 발표되었다. 발표가 난 지 한 시간쯤 후에 이상옥 장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취임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절차 등을 설명해주었다. 취임사는 이미 윤병세 보좌관(후에 외교부 장관)이 써둔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직접 작성한 취임사를 읽었다. 나는 첫째 북핵 문제, 둘째 대일관계, 셋째 UR, 이 세 가지의 중요성과 철저한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폭격을 막아라 ? 북한의 NPT 탈퇴 선언

장관으로 취임한 지 2주 만인 1993년 3월 12일, 나의 22개월 장관 재임 기간 중 가장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아침 10시 반경 정태익 미주 국장이 급히 장관실을 찾았다.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는 것이다.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대통령을 수행 중이던 박관용 비서실장과 통화가 되어 대통령이 귀경한 후에 보고하기로 약속한 후 외무부 간부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나는 먼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할 경우 어떠한 문제가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했다. 첫째, 그것을 방지하는 과정에서 무력행사와 충돌이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둘째,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는 경우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균형이 깨지는 것은 물론 북한의 도발과 공격적 행태로 이어질 수 있었다. 셋째,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경우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들이 핵무장을 할 동기를 제공하며, 이는 동북아에서의 핵확산을 의미했다. 넷째, 북한이 핵물질과 무기를 보유하는 경우 다른 나라나 위험 집단에 이전되어 핵 공격이나 테러에 악용될 소지가 있었다. 끝으로, 규제나 투명성 없는 북한의 핵개발은 핵으로 인한 사고의 가능성을 크게 증가시킬 위험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공조해야 하며,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국, 러시아 등의 동참과 협조를 확보하고, IAEA(국제원자력기구),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북핵 문제를 협상을 통해서 해결할 것이냐 압력을 통해서 해결할 것이냐를 두고 국내외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또한 협상을 하는 경우 한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는 협상을 우리가 허용하느냐 마느냐도 중요한 이슈였다. 아직 경수로 얘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협상을 할 경우 일방적으로 북한에 항복문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부처 간에 뚜렷한 의견 차이는 없는 편이었으나, 다만 통일부에서는 남북 간의 대화와 협상을 선호하는 입장이었고, 안기부와 청와대는 외무부보다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다. 대통령은 특히 협상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되고 미국과 북한이 직접 협상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결국 북핵 문제는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고 미국과 북한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동결을 약속한 1994년 10월의 제네바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우여곡절과 위기, 19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요구되었다. 북한은 미국과 협상하면서 핵 활동을 동결하고 핵시설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안보 보장, 핵발전을 위한 경수로 제공, 북한과의 국교 수립 등을 요구했다.

1994년 6월 ? 북핵 위기와 한국ㆍ미국ㆍ중국의 대응

북한의 도전적 행동에 대하여 한미 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제재결의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주한미군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동해에 항공모함을 파견하는 등 무력시위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6월 10일에는 IAEA에서 대북제재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은 이에 대응하여 6월 13일에 IAEA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시간적으로 보아 6월 13일 북한이 IAEA 탈퇴를 선언한 시점에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이미 결정된 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북한이 IAEA 탈퇴 선언을 하기는 했으나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오라고 했을 때는 어느 정도 후퇴한다는 각오를 한 상태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의도를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자기네들이 ‘후퇴하기 전에 공세적인 모습을 보인다.’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퇴하기 전에 한 번 공격을 하고 조금 후퇴를 하는, 펜싱 표현으로는 페인(feign)하기 전에 런지(lunge)를 하는, 그러한 공세적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후퇴를 하기 전에 IAEA 탈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놓겠다. 그리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6월 10일에는 이미 중국이 북한에 “이 문제가 안보리에서 토의될 때 거부권 행사를 안 하겠다.”라고 통고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북한이 ‘대처하고 반응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카터 방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고, 긍정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우리에게는 제일 중요하고 위험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서 필요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했다. 남북관계를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의 시각으로 보는 강경파 인사들은 북한과 미국과의 접촉의 레벨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손해라고 보고 카터의 방북을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고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에 갈 때 서울에 들렀다 갔고, 또 김일성 주석을 만난 다음에 다시 서울로 와서 우리에게 결과를 다 알려주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상당한 인풋(input)을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카터의 방북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튼 1994년 6월 카터의 방북 효과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에 고조되고 있었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된 것이고, 또 하나는 유엔 안보리의 제재로까지 가지 않고 미국과 북한 간에 근 1년 동안 진전이 없었던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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