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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리더십

이창호 지음 | 벗나래



시진핑 리더십

이창호 지음

벗나래 / 2017년 3월 / 294쪽 / 15,000원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리더십



마오쩌둥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마오쩌둥은 중국 후난에 있는 농촌마을 출신이다. 고향에서 저작 활동과 잡지 발간을 비롯한 계몽운동에 매달리던 마오쩌둥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ㆍ레닌주의 혁명이론이 중국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인식을 하면서 농민으로 눈을 돌려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는 혁명전략을 세웠다. 그는 국민당에 쫓겨 대장정에 들어가는 숱한 어려움을 겪은 끝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에 성공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체계화한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워 1단계로 반식민지ㆍ반봉건 상태에 놓여 있는 중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개조한 뒤, 2단계로 혁명을 더욱 발전시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건국 초기부터 토지개혁과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조운동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계속해서 혁명론을 내세우며 사상개조운동도 지속적으로 벌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식 독자경제 모델로 추진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때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에게 경제조정정책을 펴면서 실패를 만회하게 했지만, 사회주의의 근저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이러한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문화대혁명을 전개했다. 그렇지만 ‘문화’ 혁명이라는 구호와 달리 유능한 지식인들을 반동으로 몰아 박해하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 오히려 문화 암흑기를 초래하는 역효과를 낳았고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졌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마오쩌둥의 리더십은 전형적인 혁명 리더십이면서, 업무형태로 보면 그는 창업자형에 가까운 지도자로 분류할 수 있다.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프랑스로 유학 가기 전까지는 그다지 혁명가로서의 기질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 유학을 거쳐 중국에 돌아온 덩샤오핑은 1927년부터 상하이에서 지하당 활동에 동참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계급투쟁 대신 경제재건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좌경 노선과 결별하고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변신했다. 덩샤오핑은 ‘하나의 중심(경제 건설), 두 개의 기본점(개혁개방과 네 개 기본 원칙의 견지)’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안으로는 도시와 농촌의 경제개혁에 나서고, 밖으로는 항구도시에 대외경제특구를 설치해 외국자본, 기술,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대외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선부론(先富論)으로 상징되는 불균형발전정책과 각종 인센티브 제공 등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등 다양한 문제점을 양산했다. 덩샤오핑은 비혁명적 수단으로 중국 사회를 변혁한 개혁 리더십의 소유자로 분류할 수 있으며, 승부사형 리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리더십을 행사하는 방식도 ‘자신이 정치무대 전면에 나서서 직접 통치하기보다 항상 배후에서 조정자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장쩌민

장쩌민은 중학생 때 공산주의청년단에 몰래 입단해 지하 학생운동을 벌인 경력이 있다. 여기에 항일운동을 하다 숨진 숙부 장상칭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혁명가 가문’의 후예라는 배경까지 갖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식품회사에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공업계 엘리트로 부상했고, 상하이 인민대표회의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이후 양아버지의 혁명 동지였던 왕다오한 등의 후원에 힘입어 1980년대에는 전자공업부부장에 이어 상하이 시장을 지냈다. 당시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덩샤오핑은 톈안먼 사태 후 혼란에 빠진 중국의 정치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구원투수로 그를 선택했고,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더욱 확대해 추진했다.

기업 자주권의 확대와 상품시장과 금융시장 육성 등 경제개혁조치를 잇따라 시행했고, 대외개방에도 가속도를 내 초기 동부 연해 지역을 우선 개방하는 전략에서 4연(沿) 개방 등으로 상징되는 내륙으로 개방 범위를 넓혀 이들 지역에 중앙정부 재정지원과 건설투자를 집중했다. 장쩌민 집권기에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3개 대표론이다. 중국공산당은 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선진문화의 발전 방향을 대표하며, 광대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의미로, 중국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기업가 등 새로운 사회계층에도 당을 개방해야 한다는 내용의 획기적인 선언이었다.

장쩌민은 전형적인 과도기 지도자이다. 리더십 유형으로 보면 개혁적 리더십에 가까운 모델이며, 동시에 조정자형 리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국가나 정부조직 안팎의 갈등이나 긴장관계 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종의 과업 지향 리더였는데, 덩샤오핑이 물려준 경제유산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이에 걸맞은 정치적 발전을 이끌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심화하는 성과를 냈다.

후진타오

1942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후진타오는 명문 칭화 대학교 수리공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 궁칭퇀에 입당해 미래 정치행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고, 하방운동이 전개되자 1968년 중서부 극빈 지역 가운데 하나인 간쑤성으로 가서 수력발전부 댐 건설현장 기술자로 일했다. 그 후 후진타오는 특유의 성실함과 친화력으로 건설현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당 사무간부로 발탁됐고, 덩샤오핑의 젊은 인재육성정책과 그를 아낀 쑹핑의 도움에 힘입어 1980년에는 일약 간쑤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후진타오는 궁칭퇀 1, 2서기를 지내고 1985년 마흔두 살의 나이로 전국 최연소 지방성 공산당 서기로 구이저우성에 부임해 경제개혁을 추진하다가, 1988년 말 티베트 자치구 당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9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화려하게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했고, 2002년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2003년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 중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다. 후진타오는 최고 권력자가 된 뒤 지속적인 발전을 강조하되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을 완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상정했다. 이를 위해 조화사회(和諧社會)의 건설을 새로운 국정 목표로 설정하고, 그 수단으로 과학적 발전관을 제시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그동안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해외자원 확보와 경제 및 정치적 발언권 확대, 나아가 군사 분야를 포함한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르러 중국 위협론을 야기했다. 후진타오는 기존의 틀을 전부 바꾸는 혁명 리더십이 아니라, 전임자들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해 자신의 통치철학을 완성하고 실천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고 있어 개혁 리더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해결사형 리더로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중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은 우선순위와 수단은 조금씩 달리했을지 모르지만,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뛰어난 자기교정 능력으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구현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변증법적인 창조성과 실천성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에서 후진타오까지로 이어지는 최고 지도자들의 정치 리더십 승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 리더십은 법치(法治)보다는 후계자를 만들어가는 인치(人治)의 전통이 강한 특징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시진핑과 중국



시진핑의 등장

시진핑 삶의 궤적: 시진핑은 1953년 6월 15일 중국 산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덩샤오핑보다 더 확고한 개혁개방주의자이자 전쟁 영웅 펑더화이의 측근으로 알려진 시중쉰 전 국무원 총리다. 1962년 펑더화이가 실각된 영향으로 시중쉰이 산시성으로 좌천된 이후, 1969년 어린 시진핑은 산시성의 시골로 보내졌고, 그곳의 농업 공동체에서 7년 동안 육체노동을 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지역 소작농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CCP)에서 계급이 올라갈 때 명문가 출신의 시진핑은 그들의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75년 시중쉰은 복권되었고, 이와 함께 그의 가족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후 시진핑은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푸젠성 성장이 된 이후 저장성 서기 등 동부 연안 지방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아온 시진핑이 중앙무대에서 부각된 것은 2007년 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가 비리 사건으로 낙마한 이후였다.

개혁 성향을 지녔던 아버지와 달리 시진핑은 신중함과 당의 정책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상하이의 당서기로서 그는 도시의 재정적 안정과 재건을 정확히 홍보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대표하는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어 짧은 기간 동안만 상하이의 당서기에 머물렀다.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의 후임자가 되었다. 시진핑의 지위는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부주석이 된 시진핑은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과 국제관계를 신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2010년 10월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최종 승계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강화했다.

중국, 시진핑을 선택하다: 월간 《경보》에 따르면 2007년에 전 국가 부주석 쩡칭훙은 이렇게 말했다. “각 정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인 소양 중 하나로 당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이는 당내 민주화와 인민민주의 확대라는 시대적 요구에도 부합합니다. 과거 덩샤오핑이 장쩌민 전 주석에게 총서기를 맡기신 것도 장쩌민 동지에게 이 같은 정치적 자질이 있음을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이 바로 이에 걸맞은 후보입니다.” 이 논리는 후계자 지명을 앞두고 권력 투쟁이 극도로 과열되던 당시에 공산당 간부들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특히 원로 지도자급 인사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 이는 킹메이커 쩡칭훙이 시진핑을 차기 총서기로 밀면서 내세운 슬로건이다. 이는 당시 그리고 현재 중국 사회가 요구하는 정치적 자질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시진핑은 권력을 쟁취했다기보다 권력을 부여받았는데, 그가 권력을 부여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진핑은 자신의 의견 표출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상대방의 의견을 최대한 듣는 자세를 유지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고 당의 공식 입장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문제가 될 사안에는 속도전을 벌이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며 상황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기다렸다. 또한 시진핑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상대방을 후하게 대하여 덕을 쌓았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태자당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 파벌을 만들지 않았다. 이와 같이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진핑의 중국의 꿈

중국의 꿈 시작되다: 2012년 11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시진핑 정부는 ‘중국의 꿈’을 대대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먼저 그동안 중국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대략 살펴보자. 덩샤오핑 시대에는 문화대혁명 때의 악몽을 극복하고 먹고사는 것부터 해결하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개혁개방을 시작한 것이다. 장쩌민 시대에는 ‘아시아 강대국’이, 후진타오 시대에는 ‘세계 강대국’이 꿈이었다. 그렇다면 시진핑의 ‘꿈’의 실체는 무엇일까? 중국의 제5세대 지도자 시진핑이 ‘중국의 꿈’이라는 국가발전 비전을 처음 제시한 것은 총서기 취임(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 후 보름 만에 ‘부흥의 길’ 제하 전시회에서 행한 연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국가 부강ㆍ민족 부흥ㆍ인민 행복에 주안을 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가장 위대한 중국의 꿈”임을 천명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꿈’은 시진핑의 개혁과 중국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핵심 키워드가 되었다.

시진핑의 일대일로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지향점: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은 2013년 9월과 10월 시진핑 주석의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순방기간 중 처음으로 제시됐다. 실크로드는 동양의 대국인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문명과 물자의 교역로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시진핑 정부는 팍스 아메리카와 대비되는 일대일로라는 전략을 구상해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대상 국가도 동남아시아에서 시작해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은 물론이고 유라시아를 넘어 멀리 아프리카까지 60여 개국에 이르고 있다. 중국 정부가 밝힌 구체적인 방법은 해당국 간의 정책적 소통, 통로 연결, 무역 활성화, 화폐 유통을 통해 마음과 마음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 실크로드 해당국에 고속철도를 비롯한 SOC(사회간접자본)를 건설하는 등 해외투자를 통해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 과잉을 해소하는 것이다. 둘째, 중국 내 생산능력 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철강과 시멘트 등 과잉생산 능력을 이들 국가에 수출해 자국 내수시장의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면서, 반대로 천연가스와 석유, 비철금속이 풍부한 이들 국가의 원자재를 대금으로 받는 등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시진핑의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 총서기와 리커창 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5세대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이들은 1950년대에 출생해 사회주의 혁명과 관련이 없는 세대다. 이런 점에서 5세대야말로 ‘탈혁명형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중학교 시절에 문화대혁명을 맞아 농촌과 오지로 하방당한 경험이 있다. 이른바 ‘상산하향’의 ‘지식청년’인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말에 대학 교육을 받고 중간 당정 간부로서 개혁개방정책을 직접 추진한 경험이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개혁개방 분위기 속에서 교육을 받고 지도자로 성장한 ‘개혁개방형 지도자’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대다수는 ‘인문 사회형 지도자’라는 특징이 있다.

시진핑 리더십의 세 가지 특징: 시진핑은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지도력을 보여주는 ‘복합형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5세대 지도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래서 이런 특징으로 판단할 때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보수정치 + 시장경제 + 실용외교’의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으로 시진핑은 ‘독실한 사회주의자’다. 구체적으로 시진핑은 ‘공산당의 영도’를 굳건히 믿는다. 공산당이 조국을 구원했고, 공산당만이 중국을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공산당이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과 지난 30여 년 동안의 경제성장에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서양의 정치사상과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이 있다.

또 시진핑은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자’다. 이는 아버지의 영향과 함께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광둥성 제1서기로 근무하던 1979년, 선전 등 네 곳의 경제특구 설치를 구상하고 이를 덩샤오핑에 보고해 승인을 받은 장본인이다. 시진핑은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이후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시에서 20여 년을 근무하면서 시장경제에 대한 믿음이 굳어졌다. 특히 푸젠성 성장과 저장성 당서기로 근무할 때 외자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산업구조를 조정하고 기업을 혁신하기 위한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아울러 시진핑은 외교ㆍ안보 면에서는 ‘실용적인 민족주의자’인데, 그동안 그가 보여준 말과 행동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시진핑은 군사력 강화를 강조한다. 칭화 대학교를 졸업하고 국방장관의 부관으로 3년 동안 일한 이후 최근까지 시진핑은 군 관련 업무를 지속적으로 맡아왔다. 그는 이를 통해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또 그는 주권과 영토문제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 등 기존 강대국에 맞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외교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국의 국익을 위해 융통성 있고 탄력성 있는 실리 외교를 추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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