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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네이션

안희정 지음 | 스리체어스



콜라보네이션

안희정 지음

스리체어스 / 2016년 10월 / 351쪽 / 16,000원





시민 X 국가

시민의 시대에 로빈 후드는 없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은 자기 필요에 의해 국가를 만들었지만, 국가는 사람을 양반과 천민으로 가르고 때로 노예로 전락시키며 사람의 역사를 뒤틀어 왔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 백성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 시대가 찾아왔다. 이제 우리는 국가 입장이 아니라 주권자 입장에서 국가 행정을 다시 살펴야 한다. 어찌하여 주권자는 땀 흘려 일한 자신의 소득을 세금이라는 형태로 국가에 납부할까.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국가라는 단위를 꾸린 것이다. 국가와 정부는 이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1990년대 초반 6ㆍ10 항쟁의 결과로 독재자가 물러나고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자 마침내 민주주의를 이룩했다는 사회 정서가 팽배했다. 거기에 3당 합당까지 일어나면서 투쟁의 전선을, 어쩌면 평생의 업을 잃은 민주화 운동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누군가 말했다. “이제 다 끝났어. 빨리빨리 막차 타고 출세해.” 함성 대신 한숨이 남은 거리에서 나는 홀로 방황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여전히 환풍기 하나 없는 ‘마찌꼬방(영세 공장)’에서 18시간씩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는데, 직선제에 의해 투표 한 번 했다고 민주주의가 성취되었다니 허망할 따름이었다. 나는 방황과 좌절 속에서 지나간 혁명의 시대와 우리가 성취했다던 민주주의를 돌아보았다. 4년 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첫째, 인류 역사에 기록된 모든 진보 운동의 기본 사상은 휴머니즘이다. 내가 잃지 말아야 할 가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둘째,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평등과 폭력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20세기까지 인류 역사가 도달한 사상과 이론은 민주주의다. 반독재와 민주화 운동에 떨쳐나서고, 전태일의 분신에 분노해 노동 3권을 쟁취하고자 했던 내 청년기의 혁명 이론은 한때 사회주의 혁명에 빠지기도 했고 민족 해방론에 기울기도 했지만 종착점은 결국 민주주의다.

사상적 정리를 끝낸 나에게 민주화 운동이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선거권을 확립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를 국가와 사회의 운영 원리로 정착시키는 운동을 뜻했다. 지난 시절 우리가 공명한 선거 제도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국민 기본권을 확립해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제 그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정의롭고 효과적인 국가 운영 체제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런 자각을 통해 나는 1994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꾸리게 된다.

20세기까지는 중앙 집권 체제를 효과적으로 가동한 나라가 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21 세기에 접어들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외교, 국방, 통상, 에너지, 기후 변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통제력이 약화되고 있다. 한편 민주적 시민 의식이 높아지면서 국가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계층, 지역, 연령별로 세분화되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민주주의는 어떠한 형태로든 주권자인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조직해야 한다. 그런데 4~5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르는 정도로는 시민의 다양한 권리와 의무를 조직화할 수 없다. 따라서 중앙 집권 국가 체제에서 분권 국가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자치 분권은 국가의 효율성을 꾀하는 일이며 동시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주권 재민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권자의 자립과 자결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정부와 정치를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거대한 무언가로 여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내가 택하는 정책과 정치인에 따라 내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는지, 덜 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외교와 안보, 국방, 통상 전략 등 거시적인 국가 현안은 중앙 정부가 맡더라도, 상하수도, 마을 길, 주차 시설 같은 기본적인 생활 문제는 지역이 책임지고 운영하겠다는 지역적 자립과 자결 의식을 주민들이 갖지 않는 한 지방 자치는 발전하기 어렵다. 중앙 정부는 지역 발전을 지방 정부에 맡기고, 지방 정부가 자립할 수 있도록 재정권과 입법권, 조직권을 떼어 주어야 한다. 어려운 얘기가 결코 아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므로 선거로 머슴을 선출한 뒤에, 머슴에게 빌지 말고 주인이 직접 나서서 주인 노릇을 하자는 얘기다. 지금 우리는 자치와 분권을 통해 국가를 개조해야 한다.

지방 자치,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 2010년 나는 민선 5기 충청남도 도지사에 취임하면서 자치와 분권을 잘하는 도지사가 되겠다고 도민에게 약속했다. 국가 운영의 미래를 위해 지방 정부 차원에서 자치와 분권 모델을 실험하고 도전해 왔다. 충남의 실험은 대한민국의 운영체제를 바꾸고,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이 수많은 실현 과제 앞에서 보다 주도적으로 일을 해 보자, 무기력에 빠진 낡은 구조를 벗어나 효과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보자, 이런 논의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지방 자치 국가로 가기 위한 국민적 합의와 헌법을 포함한 법률 체제의 뒷받침이 없는 상황에서 지방 정부만의 노력은 한계가 있다. 지방 도지사의 객쩍은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현재의 제도에는 ‘내가 정말 잘했어’라고 얘기할 수 있는 독립성이 없다. 다만 이 빠진 살림에서 어떻게 알뜰하게 살까, 이 정도 고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나에게 지방 자치는 직업적 숙명의 과제다. 지난 20세기 노동자가 노동 3권을 달라고 했다면, 민주주의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직업 정치인인 나에게는 지방 자치의 권한을 달라고 말하고 싶다. 21세기 대한민국을 확실하게 바꾸겠다.



정부 X 관료

시대가 바뀌면 정부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 국가와 행정이 미비하고 시장과 시민의 질서가 미숙하던 시절, 정부는 통일벼 심기부터 추곡 수매에 이르기까지 만사를 관장했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민주화 시기를 거치면서 시장과 개인의 힘이 커졌고, 정부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매사를 국가가 결정해 끌고 가던 시대에서 시장과 개인이 결정해 수행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면 정부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 외국 학자들의 찬사를 받던 한국 관료제의 몰락과 정부 혁신에 대한 국민의 요구는 여기서 유래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개인의 영역, 시장 질서에 맡길 영역, 정부가 책임질 영역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 혁신이란 정부가 지녀야 할 올바른 위치값을 찾는 일이다. 이는 선출된 정치 지도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공무원들이 보람 있게 일할 수 있고, 비로소 정부 혁신을 시작할 수 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은 공직 사회의 리더십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민에게 함께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모두가 주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직자의 리더십과 역할에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이 행정 혁신의 핵심이다.

소신껏 일 잘하는 정부: 공직 사회의 핵심은 공정성이다. 여기에 더해 함께 가야 한다. 기업인, 농어민, 근로자, 자영업자에게 함께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1970년대까지 국민은 똑똑한 사람이 앞장서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공직 사회만 가지고 정부 효율을 내기가 어렵다. 국민이 함께하는 것이 21세기 정부 혁신의 핵심 과제다. 직업 정치인으로서 내 포부는 대한민국 정치와 행정이 전 세계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의 효율성을 뛰어넘는 일 잘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다.

나는 공직과 사회에 당부한다. 정부가 가장 권위 있어야 한다. 정부와 공직 사회가 존중받기를 기대한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서 그러하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에 종사한다. 유일하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힘쓰라고 있는 조직이 정부다. 정부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지키려면 지난 시대 선배 공직자들이 발휘했던 주도적인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 공직 사회가 외부의 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결단에 따라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성장 X 번영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발전하는 경제 성장: 예로부터 국가의 공통된 목표는 배고파 우는 사람과 억울해 우는 사람을 없게 하는 일이었다. 결국 경제적 번영과 평화로 요약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삶의 질이 보장되는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 산업과 지역과 세대 간의 양극화 문제도 풀어야 하고,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라는 오명에서도 벗어나는 경제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때야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빠른 성과를 내는 쪽을 택했지만, 이제는 사람과 자연과 경제 번영이 함께 갈 수 있는 성장 모델이 바람직하다. 바로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이다.

절대적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전이 지난 세기의 발전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발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 철학을 충남 도정의 주요한 축으로 삼았다. 2013년 지속 가능한 발전 지표 106개를 개발하고, 그 지표에 따라 충남 도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했다. 지속 가능한 발전 철학에 입각한 나의 노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이익과 지지를 교환하는 형태를 가급적 택하지 않았다. 정치인과 이익 집단이 표와 정책을 거래하는 형태로 선거와 정치가 이루어지면 이 철학을 소화할 수 없다. 둘째, 시장 원리를 존중하는 정책을 모색했다. 개인의 창의와 도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이전부터 인류가 채택한 협업 방식이다. 나는 지난 시절 시장을 지배하고 조종하던 정부의 역할에 변화를 꾀했다.

일례로 내가 제시한 ‘신균형 발전 전략’은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수도권을 묶는 규제 중심이 아니라, 시장 친화적이고 공정한 소비 체계를 도입하자는 취지다. 예를 들어보면, 전국 석탄 화력 발전 설비의 50퍼센트가 들어선 충청남도가 대도시와 같은 가격으로 전기를 소비하는 구조는 정의롭지 못하다. 원산지 가격은 싸고, 원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가격은 더 나가는 방식이 공정하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여야 사람들이 결과에 승복하고, 무엇을 노력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아서 분발할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만 도전과 창의가 피어난다.

공동체와 함께 성장하는 사회적 경제: 지속 가능한 발전에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전국적으로 여러 대안이 부상했다. 그중 하나가 사회적 경제 모델에 입각한 사회적 기업이었다. 2010년 도지사 선거 때 나도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취임한 이듬해 사회적 경제 특별위원회를 꾸렸고, 2012년 전국 최초로 사회적 경제 육성 지원 조례를 재정하면서 사회적 기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회적 기업이란 기업의 목표와 운영 원리가 이윤 동기에만 있지 않고, 기업 운영과 이익 배분, 생산하는 재화와 용역에서 사회적 기능을 좀 더 높이는 데 있는 기업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선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은 시민 사회와 공동체가 튼튼해야 지역 사회에 안착할 수 있다.

서울 중심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자: 현 정부는 수도권 규제를 완화해서 대기업 투자 여건이 살아나면 기업 투자가 활성화되고 일자리가 늘어나서 경제가 성장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수도권이기 때문에 규제가 없으면 투자하고, 지방이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현 정부는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권역별로 세우고 전담 대기업을 하나씩 지정해 지역 중소기업들과 함께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구미에 있던 LG와 천안에 있던 삼성의 연구 기능이 왜 수도권으로 올라갔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정책은 의미가 크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에는 인재가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인서울(in Seoul)’이 아니면 모든 사람을 실패자로 만드는 뒤틀린 사회 구조를 깨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정부가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균형 발전 정책을 선언하고, 공공 분야가 앞장서 지방에 이전하면 좋겠다.

2004년 헌법재판소는 수도 서울을 관습법이라 규정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내려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그러면 ‘인서울’이 아닌 사람이 실패자가 되는 시대는 끝난다. 기업에는 수도권 과밀화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물릴 필요가 있다. 그래도 수도권 집적이 기업 활동에 유리하다면 수도권에 남을 것이고, 채산성이 떨어진다면 지방에 내려올 것이다. 지방에 이전한 기업을 정착시키려면 도시 재개발 사업이나 도시 재생 사업을 지방에 대폭 넘겨야 한다.

‘수도권 규제냐, 규제 완화냐’의 이분법적 정책이 아니라, 헌법에서 명시한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균형 발전에 대한 아무 대책도 없이 기존 정책을 무너뜨리면 수도권과 지역 주민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수도권의 질 좋은 발전을 약속하고, 지방과 수도권 사이의 국가 재정 및 자원 배분의 불공정성을 해소하는 균형 발전 전략을 요구한다.



복지 X 인권

복지, 자기 책임성과 공동체의 조화: 2004년 무렵이었다. 미국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민주당 성향의 여자와 공화당 성향의 남자, 둘의 연애 과정을 통해 진보와 보수의 오랜 논쟁을 다룬 소설을 읽었는데, 한 대목이 기억에 생생하다.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남자 주인공이 진보 진영인 여자 친구의 식구들과 논쟁을 벌이다 하는 말이었다. “타인의 인생에 함부로 개입하면 안 돼요. 누가 남의 인생에 개입해서 그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어요?” 숭고하고 이타적인 행위도 결국 자기 인생의 만족을 얻기 위함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이 일어서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냉정한 대사였다. 그러자 여주인공이 인간에게 사랑과 박애, 나눔을 빼면 여전히 인간일 수 있겠냐며 항변한다.

전혀 다른 두 말이 내게는 세상을 규율하는 두 개의 진실로 여겨졌다. 청년기에 책을 읽을 때는 한쪽은 악인, 다른 한쪽은 정의의 사도가 되기 일쑤였는데, 두 사람 공히 합당한 주장을 펼친다는 생각이 들어 달라진 내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복지 정책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지 않다. 복지 제도는 박애와 연대 그리고 자기 책임성이라는 틀 내에서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그렇게까지 하면 누가 일해?’와 ‘저 사람도 인간답게 이 정도는 살아야지’ 사이에서 합의 가능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전혀 다른 차원의 복지 논쟁도 있다. 복지 정책을 적극적 사회 통합 전략으로 활용하는 경우다. 국가 경제에서 가계 소득이 줄어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이 어려워지고 생산이 감소할 때,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경제 순환을 촉진하는 분배와 성장 정책으로서의 복지 정책이다. 그런데 성장이냐, 분배냐의 20세기 낡은 관점으로 21세기 복지 정책을 논할 수는 없다. 실제로 복지 정책에 따른 재정 수입이 토목이나 기타 분야의 재정 수입에 비해 그리 나쁘지 않다. 경제 선순환 효과를 고려할 때 복지 재정 투자는 결코 소모성 경비는 아니다. 국민 경제라는 큰 순환 시스템에서 선순환 동력이 되는 복지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복지 정책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두 종류의 복지 정책을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적극적 사회 통합 전략으로서의 복지 정책을 공동체의 도덕과 의무에 관한 문제로 끌어들이면, 논점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대기업 회장 손자에게도 공짜 점심을 먹여야 하느냐 식의 난데없는 설전이 벌어진다. 복지 정책의 세부 정책을 수립할 때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근면 성실히 일하는 시민의 땀을 조롱하는 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은전을 베푸는 사람이 따로 있고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갑을 관계가 형성되는 복지 제도를 피해야 한다.

한편 전통적인 의미의 복지 제도뿐만 아니라 보조금 정책도 광의의 복지라 할 수 있는데,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보조금 정책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개인과 기업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데, 시장 질서가 흔들리면 개인과 기업의 창의와 도전이 배신을 당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의 합리적 선택을 왜곡해 국가 재정을 눈먼 돈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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