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힐러리 클린턴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6년 10월 / 476쪽 / 20,000원
“여성 차별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 1947~1969년
“여성 차별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힐러리는 얼굴은 예뻤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심한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썼다. 옷 따위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면 큰일이 난다고 여긴 아버지 탓에 옷차림도 늘 엉망이었다.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였다. 웃음소리도 듣기에 좋은 편은 아니어서 훗날 힐러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웃음소리를 ‘마녀의 웃음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안경, 옷차림, 헤어스타일, 웃음소리 등은 힐러리의 여성적 감각을 크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교 시절 데이트 신청을 딱 두 번 받았지만 그마저도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이 또한 그런 여성적 감각의 훼손에 일조했으리라. 그녀는 여자 친구들에겐 인기가 있었지만 남자들은 그녀가 차갑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고교 시절 별명이 ‘냉장고 수녀’였을까.
힐러리는 이미 그때부터 느끼고 있던 남녀 차별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으로 여성적 감각을 키우는 걸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어린 시절 꿈이던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한 안내서를 구하려고 항공우주국NASA에 편지를 썼다가 여자는 우주비행사가 될 수 없다는 답장을 받고 크게 실망했다. 이 사건에 대해 힐러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노력과 결심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에 부닥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분개했다. …… 여자를 싸잡아 일률적으로 거부한 것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남녀공학 고교에서 당한 성차별도 그런 분노를 키웠다. 힐러리는 고교 시절 거의 모든 특별활동에 참여할 정도로 매우 적극적인 학생이었지만, 고교 3학년 때 학생회장직에 입후보했다가 남학생 후보에게 패배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으니 말이다. 여학생이 학생회장에 출마한 건 힐러리가 처음이었기에 그리 상처 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힐러리로선 “여학생이 학생회장으로 뽑힐 수 있을 거라고 믿다니 정말 어리석구나”라는 비아냥을 견디기 어려웠다. 어려서부터 힐러리의 주된 관심은 정치였기에 정치에 관심이 없는 다른 소녀들과 달리 힐러리의 좌절은 더 컸다.
힐러리가 14세이던 1961년 가장 친한 친구인 벳시 존슨의 할아버지가 벳시와 힐러리를 시카고 선데이 이브닝 클럽에서 열린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에 데려갔다. 힐러리가 자신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마틴 루서 킹을 처음 본 경험이었다. 그해 여름 파크리지 감리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로 26세의 돈 존스가 부임했다. 존스는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행동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목사였다. 킹 목사가 시카고를 다시 방문하자 존스 목사와 힐러리를 포함한 청년부 학생들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 내심 민주당 성향인 엄마는 허락했지만, 아빠에겐 비밀로 했다. 행사가 끝난 후 존스는 경이감에 사로잡힌 학생들을 무대 뒤로 데려가 킹 목사를 직접 만나게 해주었다.
“내 남자 친구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라구요!” - 1970~1989년
“전 힐러리 로댐인데, 당신 이름은 뭐죠?”
1970년 9월 힐러리는 같은 법대생 빌 클린턴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개강 첫날 법대 구내식당에서 로버트 라이시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땐 둘 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상대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중에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맡게 되는 라이시는 학부 시절 힐러리와 알던 사이였고, 클린턴과는 같은 동갑내기에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함께 다닌 사이였다. 힐러리와 클린턴은 토머스 에머슨 교수의 ‘시민의 자유’라는 과목을 같이 수강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클린턴은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의 고향인 아칸소 주 이야기를 자주 늘어놓았다. 어느 날 힐러리가 법대 학생 휴게실에서 클린턴 옆을 지나가는데 이런 말이 들렸다. “그뿐인 줄 알아? 우린 세계에서 제일 큰 수박도 키워!” 힐러리가 다른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쟤 누구니?” “빌 클린턴. 아칸소 출신인데, 아칸소 얘기밖에 안 해.”
클린턴은 이미 조지타운대학 시절부터 아칸소를 이야기 소재로 활용했는데, 나중에야 친구들은 클린턴이 약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역으로 시골의 가난한 주인 아칸소를 들먹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친근하게 느끼거나 얕보도록 만드는 책략인 면도 있었다. 어느 날 법대 도서관 독서실에서 클린턴이 힐러리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던가 보다. 그러자 힐러리가 클린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저를 계속 쳐다보려면, 그리고 저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하니,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어요. 전 힐러리 로댐인데, 당신 이름은 뭐죠?” 이게 그들의 실질적인 첫 만남이었다는데, 클린턴은 나중에 너무 놀라서 자기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했다. 여자가 먼저 대시하다니, 두 사람의 만남부터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었던 셈이다.
클린턴이 아칸소 이야기를 책략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시사하듯이, 클린턴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아칸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칸소는 19세기에 면화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을 땐 ‘Land of Opportunity(기회의 땅)’라는 별명을 내걸었는데, 남북전쟁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기회의 땅’이라는 말이 영 무색해졌다. 아칸소주는 스스로 생각해도 멋쩍었던지 별명을 ‘The Natural State(자연 그대로의 주)’로 바꾸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소득 수준이 바닥권에 속하는 주가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다.
‘대통령을 꿈꾸는 남자’를 원한 힐러리의 야망
190센티미터의 키에 100킬로그램이 나갈 정도로 체격이 좋았던 클린턴은 긴 머리에 지저분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 ‘바이킹’ 같았다. 반면 청바지에 샌들을 신고, 머리는 어깨 밑으로 늘어뜨린 채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던 힐러리는 ‘히피’ 같아 보였다. 도서관에서 만난 게 계기가 되어 나중에 클린턴과 사랑에 빠진 힐러리는 “내가 만나본 남자들 중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남자였어요”라고 말했다. 반면 클린턴은 “그녀는 내가 일찍이 남자든 여자든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강인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고 했다.
힐러리가 클린턴과 인사를 나누었을 땐 힐러리에게는 이미 동거를 할 정도로 친한 남자 친구 데이비드 루퍼트가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힐러리가 루퍼트와 헤어지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증언하듯이, 그녀는 늘 권력 지향적이었으며, 그래서 정치하는 남자, 그것도 대통령을 꿈꾸는 남자와 사귀고 싶어 했으니까 말이다. 『힐러리의 선택』을 쓴 게일 시히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제 그녀에게는 클린턴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에 비하면 루퍼트의 야망이란 한 자루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힐러리의 야망을 잘 아는 루퍼트도 괴로웠지만 순순히 힐러리를 놓아주었다. “네가 그를 좋아한다면 가서 잘해봐라. 얘기는 끝난 거다. 멋지게 살아라.”
힐러리와 클린턴은 1971년 가을부터 한 작은 아파트에서 같이 살았다. 힐러리는 1972년에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한 학년 아래인 클린턴이 공부를 마칠 때까지 예일대학 소재지인 뉴헤이븐에 머무르면서 예일어린이연구센터에서 일했다. 1972년 여름방학 기간 중에는 텍사스로 건너가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지 맥거번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내 남자 친구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거라구요!”
1973년 봄 힐러리와 클린턴은 예일 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클린턴은 운좋게 아칸소 대학 법대 교수로 채용되었다. 반면 힐러리는 워싱턴 D.C. 변호사 시험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좌절을 맛보았지만 다행히 그 전에 보았던 아칸소주 변호사 시험에서는 합격했다. 1974년 클린턴이 아칸소주 하원의원에 입후보하자 힐러리는 아칸소 대학의 제안을 받아들여 법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클린턴의 선거운동을 돕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선거운동을 하기에도 바쁜 데다 힐러리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 여대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힐러리가 아버지와 남동생을 아칸소에 불러들인 것도 그 여대생 때문이었다. 힐러리는 남동생에게 그 여대생을 쫓아다녀 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훗날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클린턴의 성 스캔들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클린턴은 하원의원 선거에서 박빙의 차이로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75년 10월 클린턴과 힐러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힐러리는 피로연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나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힐러리 로댐으로 남아있을 거예요.”라고 선언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76년 11월 클린턴은 아칸소주 법무부 장관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8년 클린턴은 32세의 나이에 63퍼센트의 득표율로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선거기간 중 클린턴이 베트남 징병을 고의로 회피했다는 의혹, 힐러리가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는 문제 등이 불거졌지만 클린턴의 승리를 가로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1980년 2월 클린턴 힐러리 부부는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딸 첼시를 출산했다. 1980년은 힐러리와 클린턴에게 천당과 지옥의 한 해였다. 첼시의 출산이 천당이라면, 지옥은 1980년 주지사 재선에서 클린턴이 패배한 것이었다. 클린턴의 지지자들이 마지막에 돌아선 가장 큰 이유는 힐러리의 ‘여성해방주의’ 때문이었다. 유권자들은 클린턴 부부가 아이를 갖기 전에는 힐러리의 여성해방주의에 대해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이제 아이를 가진 유부녀가 그런다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포자기한 클린턴을 다시 일으켜 세운 힐러리
주지사 재선 패배로 자포자기한 클린턴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힐러리였다. 힐러리는 호된 꾸지람을 퍼부으며 클린턴을 자극했다. 패배 직후 클린턴을 만나러 왔던 한 친구는 문 앞에서 클린턴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등 뒤에서 힐러리가 “정신 차려! 사람들은 당신을 뽑은 게 잘못이었다고 믿은 거라고~ 그걸 모르겠어?”라고 고함치는 걸 잠자코 듣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주지사 2년 임기는 너무 짧았지만, 패배자로선 그 짧은 임기가 다행이었다. 미국은 주지사 임기가 주마다 다른데, 4년씩 2번 연임 제한을 두는 곳도 있었고 아칸소주처럼 2년 임기에 무제한 출마가 가능한 곳도 있었다. 클린턴은 1982년 2월 8일부터 내보낸 ‘우리 아빠는 절대로 두 번씩 야단치지 않아요’라는 텔레비전 광고에 나와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똑같은 일로 두 번 혼나본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하면서 유권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클린턴은 첼시의 두 번째 생일인 2월 27일 자신의 입후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번에 패배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고 생각한 걸까? 힐러리도 달라졌다. 그녀는 그간 고집해온 ‘힐러리 로댐’에서 ‘힐러리 클린턴’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완전히 바꾼 건 아니었다. 기자가 “이름을 법적으로 바꾼 건가요?”라고 묻자 힐러리는 어색하게 대응했고, 법적으로 바꿀 계획이 있느냐는 추가 질문에 “없다”고 대답했다. 기자의 질문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끝까지 버텼겠지만, 나중에 느낀 바가 있었던 것인지 5월 3일이 되어서야 이름을 바꾸는 공식 절차를 밟았다. 이에 대해 힐러리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결혼 전의 성을 고집하는 것보다 빌이 다시 주지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클린턴은 주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아칸소주에서 한 번 패배했던 주지사가 재선에 성공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클린턴은 역경을 딛고 신속하고 능란하게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컴백 키드(Comeback Kid)’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이후의 그의 정치 역정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승리의 주역은 힐러리였다. 클린턴이 선거 유세 기간 중 하루에 20번 전화를 한다고 할 때 그 전화의 반은 힐러리에게 하는 것이었다. 안부 전화가 아니라 선거와 관련된 지시나 조언을 듣기 위해서 한 전화였다.
“나는 그저 내 남자 곁에 서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 1990~1992년
“나는 그저 내 남자 곁에 서 있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클린턴은 계속해서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했다. 아칸소주 헌법 개정으로 1986년부터 주지사 임기는 4년으로 바뀌었는데 클린턴은 이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클린턴은 1986년 8월 전국주지사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91년에는 주지사들이 클린턴을 최고의 주지사로 뽑았다. 이제 클린턴에게 남은 것은 1992년 대선 출마였다. 그러나 클린턴의 못 말리는 취미라고 해도 좋은 엽색 행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2년 1월 전직 나이트클럽 가수이자 텔레비전 기자이며 아칸소 주정부 직원인 30대의 제니퍼 플라워스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12년 동안 클린턴과 남몰래 관계를 맺어왔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 이 스캔들은 클린턴의 정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992년 1월 26일 클린턴은 CBS-TV의 <60분>에 힐러리와 함께 출연해 법적으론 문제가 되지 않게끔 하는 선에서 보도 내용을 부인하면서도 참회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내 잘못을 아내에게 말했어요. 고통을 준 것을 사죄했어요. 그 어떤 미국 정치인도 아직까지 말한 적이 없는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오늘 밤, 이 프로그램 시청자들은 우리 부부의 심정을 이해할 것입니다 . 우리가 매우 솔직하다는 것도 인정할 것입니다. 계속하여 폭로 보도를 할지, 언론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힐러리가 말을 이어받았다.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는 부부가 고통스러워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이들의 문제를 공개해 그 부부가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하겠습니까?” 사회를 맡은 스티브 크로프트가 “두 분이 줄곧 함께 지냈고, 문제를 함께 해결했고, 어떤 합의와 타협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는 데 대다수 미국인들은 동의할 겁니다”라고 말하자, 클린턴이 가로막고 나섰다. “잠깐만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건 타협이나 합의가 아니라 결혼생활이에요. 그건 전혀 다른 겁니다.”
‘타협’이라는 말에 화가 난 힐러리도 거들었다. “아시겠지만 나는 태미 위넷(‘stand by your man’을 부른 가수)처럼 그저 그 남자 곁에 서 있는 그런 여자들처럼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동안 겪어온 것들과 우리가 함께 겪어온 일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면, 그럼 빌을 뽑지 마세요.” 인터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약 3,400만 명이 이 인터뷰를 시청하고 나머지 5,000만 명도 다른 프로그램에서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인터뷰 직후 ABC뉴스의 여론조사에서 80퍼센트가 클린턴이 대선 경쟁에 계속 참여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보좌관이던 메리 마탈린은 나중에 “클린턴 대선 팀이 이 스캔들에 대처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놀랐다”고 했다.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
수많은 선거 이슈와 현란한 각종 이벤트들에도 불구하고 1992년 대선의 핵심 의제는 ‘경제’였다. 1992년 7월 클린턴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미국 경제가 독일에 뒤지고 일본 총리가 동정을 느낄 정도가 됐다”고 개탄하고 이같이 실추된 미국의 위신을 끌어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클린턴의 참모인 제임스 카빌이 그간 사용했던 슬로건 ‘국민이 우선인 국가(Putting People First)’가 진부하다고 판단해 새로 만들어낸 선거 슬로건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가 확실히 약효를 발휘했다. 결국 클린턴은 제42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