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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평전

김삼웅 지음 | 깊은나무



김영삼 평전



김삼웅 지음

깊은나무 / 2016년 11월 / 696쪽 / 33,000원





1부 - 거산(巨山)의 첫 걸음 : 출생에서 정계입문까지



‘미래의 대통령’이라 쓰다: 김영삼은 경남 거제군 장목면 회포리 1371번지에서 1928년 음력 12월 4일 태어났고, 외포에 있는 4년제 간이소학교에 다니다가 장목소학교로 옮겨 5~6학년을 마쳤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동래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통영중학교에 들어갔다. 해방과 더불어 경남중학교 편입생이 된 김영삼은 우등생이기보다 성적은 중간 정도의 보통학생이었으며,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 써 붙여놓고 야망을 키웠다.

이후 김영삼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김영삼의 진로를 크게 바꾼 사건이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 외무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이다. 당시 외무부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김영삼은 이를 계기로 장택상과 자주 만나게 되고 그의 선거운동을 돕게 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26세 청년정객의 국회입성: 김영삼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고향인 거제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은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강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유당을 떠났다. 자유당을 탈당한 김영삼은 호헌동지회(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범야당 연합 모임)에 이어 민주당 창당대회전형위원으로 창당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반이승만 세력이 연합으로 결집, 출범한 야당이다. 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최고위원에 조병옥ㆍ장면ㆍ곽상훈ㆍ백남훈을 선출했는데, 김영삼은 조병옥을 따르면서 뒷날 민주당 구파(김대중은 신파)에 속하게 된다.

험난한 야당의 길에 들어서다: 1958년 5월 실시된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김영삼은 안전한 고향 거제도를 떠나 부산 서구 갑으로 선거구를 옮겨 출마했다. 민주당 지도부의 결정이었고 자신도 정치수준 높은 부산시민의 심판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상대는 자유당 공천자로서 내무 차관을 지낸 이상룡이었다. 개표 직전까지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개표 도중에 김영삼 표를 이상룡 표로 바꿔치기하는 환표소동이 벌어졌고, 김영삼은 최초로 선거에서 패배하는 고배를 마셨다.



2부 - 60년대 야당의 최전선에서 : 4월혁명에서 3선개헌 반대투쟁까지



4월혁명과 5ㆍ16군사쿠데타: 1960년 4월의 혁명은 1960년 3ㆍ15부정선거로부터 발화되었다.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정권 유지를 꾀했으나, 이미 혁명적인 열기에 휩싸인 민중은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승만은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승만이 쫓겨나고 외무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승계하여 4월 28일 과도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7월 29일 민ㆍ참의원을 뽑는 총선거 일정이 공고되었다. 김영삼은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금배지를 빼앗겼던 부산 서구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8월 12일 민ㆍ참의원 합동회의에서 구파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뽑았으나, 실권자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신ㆍ구파 간에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었다. 신ㆍ구파는 끝내 타협을 이뤄내지 못하고 8월 8일 열린 개원국회에서 신파출신 곽상훈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한 데 이어, 8월 12일 구파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리고 윤보선이 좌파출신의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하여 국회인준을 요청했으나 부결되고, 이어서 신파의 장면을 지명하여 통과되었다.

한편 총리에 선출된 장면은 초대 내각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했는데, 이것이 구파의 반발을 불러와 민주당 정권은 초장부터 분열과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결국 구파는 1960년 8월 31일 86명의 의원 명의로 ‘구파동지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정식으로 등록하면서 민주당은 분당되고 말았다. 졸지에 야당이 된 구파동지회는 장면 정부의 조각에서도 배제되면서 1961년 2월 20일 신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은 신민당이 노장파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에 반발하여 당내 소장그룹과 무소속의 민정구락부 의원들과 더불어 1961년 1월 26일 청조회를 결성했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지 8개월 만인 1961년 5월 16일에 5ㆍ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김영삼은 의원직을 빼앗기고, 한동안 정치를 못하게 된다.

군사독재와의 투쟁: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963년1월 1일부터 재개되었다. 정치활동정화법에서 풀린 김영삼은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참여하는 한편 반군정 투쟁을 전개하는데 앞장섰다. 민정당은 5월 14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김영삼은 대변인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60년대 야당의 최전선에서: 5ㆍ16쿠데타 이후 사분오열 상태이던 야당이 1965년 6월 14일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인 민주당을 통합하여 민중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통합 민중당의 진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파병안을 둘러싸고 당론이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의원직 총사퇴와 당 해산을 주장한 민정당계(윤보선 등)가 원내투쟁을 주장하는 민주당계와 결별하고 별도 신당창당(신한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통합 5개월 만에 다시 분당한 것이다. 김영삼은 윤보선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민중당에 남았다. 그 이유는 야당의 분열은 공멸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야당은 1967년 제6대 대선과 제7대 총선을 앞두고 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하여 결국 신민당으로 재창당 된다. 이후 제6대 대선에서 패배한 윤보선이 2선으로 후퇴하면서 신민당은 유진오 당수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유 당수는 새 원내총무에 김대중을 지명했다. 그러나 의원총회에서 인준을 받지 못하자 2차로 광주출신 정성태를 지명하여 인준을 받았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총무 인준을 극력 반대하여, 이때부터 두 사람은 정치적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5개월 후 정성태가 원내총무를 사임하면서 실시된 의총에서 김영삼은 다시 원내총무에 선출되었다. 네 번째 원내총무였다. 김영삼은 전후 다섯 차례에 걸쳐 야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3부 - 긴급조치시대, 민주주의의 수호자 : ‘40대 기수론’에서 의원직 제명까지



‘40대 기수론’ 제창과 좌절: 3선 개헌의 여진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69년 11월 8일, 김영삼은 입원 중이던 유진오 총재와 소수의 측근들에게만 알리고 대선 후보 출마선언을 감행했다. 이어 김대중(45세)이 해가 바뀐 1970년 1월 24일 출마를 선언했다. 이철승도 대선후보에 뛰어들었다. 언론은 세 사람의 대선후보 선언을 ‘40대 기수론’이라 명명했다. 9월 29일 국민적 관심 속에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전당대회가 열렸다. 투표결과는 의외였다. 1차 투표에서 당수가 지명한 김영삼이 압승할 것으로 내다봤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총투표지 885표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백지 78표, 기타 4표로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수에서 22표가 모자랐다. 오후에 실시된 결선투표는 총투표지 884표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로 김대중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역전극이었다. 대선후보로 지지해 주면 차기 당수로 지원하겠다는 김대중과 이철승의 묵계로 나타난 결과였다. 이후 1971년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는 공화당의 박정희와 신민당의 김대중 사이에 벌어진 용호상박전이었다. 김영삼은 약속대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여러 지역에서 지원유세를 하였다. 하지만 개표결과 박정희 후보는 634만 2828표를 얻어 539만 5900표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이기고 당선 되었다.

긴급조치시대의 야당총재: 1974년 4월 유진산 신민당 당수가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나, 1974년 8월 22, 23일 이틀간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새 총재를 뽑는 신민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누구도 1차 투표, 2차 투표에 과반수를 얻지 못해, 결국 김영삼과 김의택이 결선투표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김의택의 후보 사퇴로 다음날(8월 23일) 속개된 전당대회에서 전당대회 의장 이충환이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정식으로 선포함으로써 한국 야당사상 최연소(당시 46세) 총재가 탄생하게 되었다.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면서 재야와 야당이 한 묶음이 되어 반 유신투쟁 전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은 1975년 신년을 맞아 연두회견을 갖고 신민당의 최대 정책목표가 민주회복을 위한 직선제 개헌 투쟁임을 밝히고, 해외동포의 민주화투쟁에 대한 지원ㆍ협력과 개헌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기반 마련을 위해 일본과 미국을 방문했다. 코너에 몰린 박정희는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히면서, 여기에 자신의 진퇴문제를 묶어 국민의 정치 불안 심리를 담보로 엮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는 2월 11일 실시되었는데, 반대 25.1%, 무효투표 1.8%가 나왔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73%가 지지했다고 내세우면서 더욱 강압책으로 나왔다.

독재의 끝, 의원직 제명과 부마항쟁: 독재자들은 야당이나 비판세력을 분열시켜 지배하려 한다. 박정희는 특히 심했다. 김영삼 신민당 체제를 뒤엎기 위해 외압과 함께 내부분열 작전을 동원했다. YH사건으로 당이 쑥대밭이 되고 있을 즈음, 비주류 일각에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었다. 8월 13일,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신민당총재단 전원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이 제기된 것이다. 이 가처분신청은 지구당 위원장인 윤완중, 유기준, 조일환에 의해 서울민사지법에 제기되었는데, 이들 신청자들은 신청이유에서 당원자격이 없는 것으로 중앙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난 조윤형과 그가 임명한 성북지구당 대의원들의 표는 무효이며 따라서 지난 전당대회에서 과반수 2표를 넘어 당선된 김영삼의 총재 당선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서울민사지법 합의 16부는 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정당 대표가 법원의 결정으로 직무집행이 정지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총재단에 대한 법원의 직무정지가처분 결정으로 정국이 걷잡을 수 없는 국면에 빠져들고 있을 때 김영삼은 9월 15일자 <뉴욕타임스>의 헨리 스코트 스토크스 기자와 회견을 했는데, 회견내용이 국내에 알려지자 박정희는 공화당과 유정회를 통해 10월 3일 합동조종회의를 열어 김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도록 지시했다. 정부 여당은 김영삼의 <뉴욕타임스> 회견내용이 사대주의적 발상으로서 외국의 내정간섭을 자초한 것이라면서, 징계사유서에서 ① 그가 반민족 사대망동을 했고 ② 주한미군의 존재를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인 양 주장했고 ③ 남의 나라 선거에 대한 무분별한 언급으로 인해서 정치인의 체통을 손상했다는 등의 6개항을 담았다. 김영삼 의원에 대한 징계동의안은 9월 22일 여당의원 160명의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본회의장 아닌 다른 국회별실에서 10여 분 만에 가결되었다. 김영삼을 제명한 지 12일 만인 10월 16일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대학생들이 궐기했다. 이어 17일의 시위는 상당수 고등학생들도 가담하고 어둠이 깔리자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더욱 격렬해졌다. 긴급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의결,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어 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거시위 소식이 마산에 전해지면서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마산시민, 학생들의 시위는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 더욱 격렬해졌다. 부마항쟁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막을 내렸지만,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은 채 16일에는 이화여대, 19일에는 서울대와 전남대, 24일에는 계명대 시위 등 학생시위가 수그러들 줄 모른 채 확산되고, 마침내 10ㆍ26사태를 촉발시키는 뇌관이 되어,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2분,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다.



4부 -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 ‘서울의 봄’에서 3당통합까지



‘서울의 봄’ 공간에서 / 상도동에 연금된 민주주의: 박정희의 암살과 함께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박정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10월 27일부터 이듬해 신군부에 의한 5ㆍ17쿠데타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203일 동안은 조금 빨리 시작되기는 했지만 계절의 봄과 더불어 ‘정치의 봄’이었다. 그런데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무단통치 시대로 만들었다. 그날 김영삼은 전날 신민당 경기도지부 개편대회에 참석하고 저녁 늦게 귀가했고, 18일 오전 군인들에 포위된 당사에서 정무회의가 열렸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김대중ㆍ김종필 등 밤새 연행된 인사들의 석방과 계엄군의 시내로부터 철수, 국회와 당사에 배치된 계엄군의 철수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미 계엄군에 점거된 신문ㆍ방송은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영삼은 20일부터 가택에 연금되었다. 헌병 1개 중대 병력이 집 주변에 배치되고 일체의 출입을 봉쇄했다.

신군부는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김재규를 처형한 다음, 1980년 5월 소위 대통령의 자문ㆍ보좌기관이라는 구실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 후 11일 만인 8월 27일 육군대장으로 승진하고 예편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제7차 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단편적이지만 광주항쟁의 소식을 듣고 성명서를 만들어 가족을 통해 비밀리에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국내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고 일본 <아사히신문> 등 외신에만 보도되었다. 김영삼은 광주의 학살과 파국으로만 치닫고 있는 정치 정황을 지켜보면서 야당총재직을 내던지기로 결정하고, 8월 13일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을 통해 총재직 사퇴와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이 소식은 국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다.

민주산악회와 목숨을 건 단식투쟁: 김영삼에 대한 가택연금이 1년여 만인 1981년 5월 1일자로 해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집 주위를 감시, 미행하는 두 대의 차량과 사복경찰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김영삼은 연금이 풀린 후 측근 김동영의 권고로 산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김영삼의 일상이 되고 민주산악회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한편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김영삼은 단식에 앞서 5월 2일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① 구속인사의 전원석방 ② 전면해금 ③ 해직교수 및 근로자ㆍ제적학생의 복직ㆍ복교ㆍ복권 ④ 언론자유 ⑤ 개헌 및 국가보위입법회의 제정 법률의 개폐 등 5개항을 요구했다. 그런데 단식이 8일째 계속되던 5월 25일 노량진경찰서장과 정보과장 등이 상도동 자택을 찾아 김영삼을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통보하고 앰뷸런스에 태워 서울대 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되고도 김영삼은 단식을 중단하지 않았다. 정부당국은 그의 건강상태가 악화된 시점인 5월 30일 그의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김영삼이 단식 중인 병원에는 많은 국민이 찾아오고 내외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한편 단식이 20일을 넘기게 되자 의료진은 혈액검사 결과 콜레스테롤이 210에서 150으로 떨어졌고, 체온이 35.7도, 맥박이 60인 점, 그리고 입에서 심한 악취가 나는 현상들을 들어 건강상태가 위험수위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영삼은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하고, 그 후 20여 일의 회복치료를 받은 뒤 6월 30일 퇴원했다.

민추협과 세 번째 야당총재 당선: 1984년 5월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김영삼의 주도로 광주민주항쟁 4주년에 즈음하여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10ㆍ26사태 이후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세력이 함께 반독재 정치단체를 조직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고, 이후 정국변화의 변수가 되었다. 한편 12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민주당(신민당)아 창당되었는데, 85년 2월 12일 실시된 제12대 총선은 신민당의 돌풍현상이었다. 급조된 신민당은 창당 28일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지역구 50석을 차지하고, 서울에서는 42.7%의 득표율로 민정당 27.7%보다 15.7%를 더 앞섰으며, 14개 선거구에서 전원 당선 및 12개 지역 1위 당선의 성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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