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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골프

안문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대통령과 골프



안문석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5년 12월 / 284쪽 / 14,000원





제1부 골프에 얽힌 정치사



골프를 사랑한 대통령들



‘막걸리 골프’ 박정희: 박정희는 원래는 골프를 못했다. 군 장성이었지만 골프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군 장군들이 미군이나 미국대사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파티에도 가고 했지만 박정희는 그런 걸 싫어했다. 그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가 골프 못 치는 유일한 장군이고, 미국식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뉴스가 되기도 했다.

골프를 시작한 것은 5·16 쿠데타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난 1962년이었다. ‘외교를 위해서는 골프가 필요하다’는 주변의 조언에 따라 시작했다. 그해 5월부터 한장상 프로한테서 배웠다. 1960~1970년대 최고의 프로골퍼로 활약했던 한장상은 1962년 당시에는 육군에 입대해 이등병을 달고 있었다. 박정희가 골프를 한다고 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 김종오가 수소문해 한장상을 찾아서 박정희한테 보냈다. 박정희는 한장상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서 했다. 레슨을 세 번째 하는 도중에 갑자기 “외교사절을 만나야 한다”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한동안 골프를 못 했다. 쿠데타 이후 민정 이양의 격랑이 심화되었고, 그해 12월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후 선거 정국에 들어가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박정희는 민정당의 윤보선을 간신히 이겨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직후에도 골프를 한동안 못하다가 1964년 들어 클럽을 다시 잡았다. 청와대에서 조금씩 연습을 했다. 그해 가을 서울CC에서 머리를 올렸다. 경호실장 박종규와 함께 라운드를 했다. 한장상이 첫 라운드에 동행하면서 레슨을 해줬다. 그립도 봐주고 자세도 잡아줬다.

박정희는 골프를 늦게 배웠지만 아주 좋아했다. 기회가 되면 서울CC로 빠져나가 골프를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라운딩을 했다. 골프장을 걸으면서 “푸른 잔디를 걸으니까 좋구먼”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골프장도 많이 생겼다. 한양, 뉴코리아, 태릉, 안양 컨트리클럽 등 20여 개의 골프장이 박정희 임기 동안 문을 열었다. 그런가 하면 관악CC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고 서울대학교를 그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서울대학교의 시설이 낙후되어 이전했다는 말도 있고, 서울대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하도 해대니까 보기 싫어서 멀리 보냈다는 말도 있다. 서울대학교가 이전한 것이 1975년이고, 유신 반대 학생 시위가 유신 1주년을 맞은 1973년 10월에 시작되어 이후 계속되었음을 감안하면 후자가 맞는 말인 것 같다.

핸디캡은 18 정도 되었다. 꼿꼿하게 서서 치는 스타일이었다. 거리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또박또박 쳤다. 연습을 할 때는 연습장보다는 라운딩을 하면서 레슨 받는 걸 좋아했다. 박정희는 9홀을 하는 때가 많았고, 끝나면 막걸리를 즐겼다. 때로는 라운딩 도중에도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기도 했다. 실제로 클럽하우스 식당의 직원이 막걸리통을 들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야말로 ‘막걸리 골프’였다. 서울CC에서 가까운 워커힐 호텔로 옮겨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술이 거나해지면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는 18번 <황성옛터>를 3절까지 다 불렀다.

박정희는 1968년에 ‘골프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라’는 의미에서 대법관 전원에게 골프채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해에 민복기가 대법원장이 되었는데, 그의 대법원장 취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 민복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판사를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형을 내려 친일 인사로 비판받는 사람이다. 그도 1954년 서울CC가 복원되면서 골프를 시작해 마니아가 되었다. 박정희는 주변 사람에게도 “몸에 좋더라”, “술만 마시는 것보다 골프를 하는 게 좋다” 하면서 골프를 권장했다. 함께 쿠데타를 한 사람들에게 “찾기 쉽게 일요일에는 골프장에 있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바람에 김종필, 김형욱, 박종규 등이 골프를 자주 하게 되었다.

‘대통령 골프’ 전두환: 전두환도 골프를 아주 좋아했다. 전두환은 1973년 별을 달면서 골프를 시작했다. 생도 시절에는 축구를 좋아했고, 영관장교 때까지는 테니스를 하다가 장군이 되면서 골프를 한 것이다. 전두환은 부대 내에 골프연습장을 설치해놓고 연습할 정도로 좋아했다. 제1사단장 시절에는 인근에 있는 한양CC와 뉴코리아CC를 자주 찾았다. 박정희 정권 당시 사단장은 막강한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골프장은 인근 사단의 협력 없이는 운영하기 힘들었다. 주말에 골프장 주변에서 갑자기 대규모 훈련이라도 하게 되면 영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힘을 이용해 사단장들은 골프장을 쉽게 다닐 수 있었다. “재임 시절 라운드 하기 전날에는 소풍을 앞둔 학생처럼 맘이 설레 잠을 설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두환의 골프 실력은 역대 한국 대통령 가운데 최고였다. 핸디캡이 12 정도였다. 특히 드라이버로 230미터 정도의 장타를 날리곤 했다. 호방한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하게 골프를 했다. 앞과 뒤의 한 팀씩을 비우고 여유 있게 치는 ‘대통령 골프’도 그가 시작했다. 측근들과의 긴밀한 이야기도 골프장에서 많이 했다고 한다. 임기 말에 후계자 문제도 주로 골프를 하면서 논의했다고 한다. 골프는 야외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새나갈 염려가 없어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골프장을 주로 이용했을 것이다.

전두환은 라운딩 도중 잔디를 보수하거나 청소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봉투를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부정하게 돈을 많이 걷으면서 여기저기 잘 쓰기로 유명했던 전두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젊은 시절부터 돈을 잘 만들었고, 그 돈으로 조직을 꾸리는 것을 좋아했다. 군에서 계급이 올라가고 대통령까지 되자 점점 돈의 단위가 커졌다.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는 수천억 원을 받아 챙겼다. 그 돈을 지금도 여기저기 숨겨놓은 채 추징금을 내지 않고 있다. 이런 돈을 부하들에게도 주고, 행사에 다니면서 금일봉으로도 주고, 기자들 촌지로도 주고, 공직자들 전별금으로도 줬다. 그가 주는 돈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0’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에 맛들인 이들은 지금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 권력도, 재산도 모두 불법적이고 부정하게 얻어낸 그의 윤리 의식은 보통 사람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전두환은 퇴임 후에는 실컷 골프를 하면서 여유 있게 지내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두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벌인 불법과 악행은 임기가 끝나면서 조금씩 드러났고, 후계자 노태우도 막아주지 못했다. 전두환은 그 서막을 공교롭게도 골프장에서 들었다. 그는 1988년 2월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다음 달 따뜻한 제주도로 가서 가족들과 골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국가원로자문회의 폐지설이 신문에 나기 시작했다.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전직 대통령이다. 여기서는 30여 명의 직원도 둘 수 있었다. 현 대통령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신문에 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듬해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은 폐지되었다. 전두환은 미국에 가서도 골프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모두 취소하고 술만 엄청 마셨다고 한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구도가 만들어지자 5공 청산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5공비리특별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전두환은 백담사 칩거에 들어갔다. 2년간의 백담사 유배 생활을 정리하고 나온 전두환은 다시 장세동 등 심복들과 골프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노태우 임기 말로 갈수록 5공 세력의 골프 모임은 잦아졌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전두환, 노태우 모두 불안한 상황이 되어 둘이서 골프 모임을 하며 결속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영삼이 취임하자마자 골프금지령을 내린 것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5공, 6공 세력의 골프 모임에 대한 경계의 의미도 있었다. 1995년 노태우의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전·노 연대는 불가능해졌다. 1995년 10월에는 노태우 비자금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고, 수사 결과 임기 중 5,000억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항쟁 강경 진압에 대한 진상 규명 요구도 높아짐에 따라 전두환도 구속, 수감되었다. 이듬해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이 선고되었다.

골프 운 좋은 오바마: 오바마도 역대 어떤 대통령 못지않게 골프를 좋아한다. 2009년 임기 시작부터 2014년 말까지 5년 동안 214번이나 쳤다. 대략 1년에 36번, 한 달에 세 번 골프를 했다. 오바마는 국정이 바쁘게 돌아가는데도 떳떳하게 휴가를 즐기고 골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 5월 알카에다의 리더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사살 작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골프를 했다. 2014년 9월에는 미군이 이라크의 수니파 반군 단체 이슬람국가(IS)에 대해 공습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휴가지로 날아가 골프채를 들었다. 2015년 6월에는 캘리포니아 코첼라밸리의 한 골프장에서 고등학교 동창 3명과 골프를 했는데, 167년 만의 큰 가뭄으로 물이 매우 부족한데 대통령이 물을 많이 쓰는 골프장에서 친구들과 골프를 쳤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미국은 대통령의 휴가나 여가 생활을 보는 관점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 물론 미국에서도 비상 상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대통령이 그럴 수 있느냐는 비판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어디에 있든 대처를 잘하면 되는 것이고, 대통령도 필요할 때 여유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비상 상황에서 골프를 하는 것에 대해 백악관은 당당하다. “통신 장비를 갖추고 있고 국가안보보좌관도 따라간다. 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그에 따른 필요한 조치를 충분히 하고, 또 이런 것을 미국인들이 용인해주고 있기 때문에 오바마가 그렇게 자주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핸디캡은 16 정도. 임기가 끝날 때 싱글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타이거 우즈와도 라운딩을 했고,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 등 대선수들을 가르친 명 코치 부치 하먼과 27홀을 돌며 필드 레슨을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오바마가 골프 운이 좋다는 것이다. 그의 동반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바마는 잘못 쳐서 공이 나무 쪽으로 가는 일이 가끔 있는데, 그런 때도 대부분 공이 나무를 맞고 튕겨나온다고 한다. 그때마다 동반자들이 “골프 운처럼 정치 운이 따른다면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처럼 오바마는 대통령이 되었다. 골프 운과 정치 운은 함께 가는 것인가?

골프를 싫어한 지도자들



엉덩방아 찧고 골프 끊은 김영삼: 김영삼도 원래는 골프를 했다. “골프의 단점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10월 유신 이후 골프를 끊었다. 야당 국회의원이 엄혹한 시국에 골프를 하는 것은 비난의 여지가 많았다. 그러다가 다시 골프를 시작한 김영삼은 1989년 김종필과 잇따른 골프 회동을 통해 3당 합당에 합의했다. 3당 합당에는 합의했지만 이후로 골프는 다시 끊었다. 계기는 김종필과의 네 번째 골프 회동이다. 1989년 10월 2일 안양CC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이 만났다. 3당 합당을 위한 몇 차례의 회동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은 골프를 하면서 좀 가벼운 마음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 김영삼은 1번 티박스로 향했다. 몇 번 연습 스윙을 하고는 공을 티에 올렸다. 연습은 제대로 못 했지만 자신은 있는 표정이었다. 공을 향해 크게 스윙을 했지만 김영삼은 중심을 잃고 넘어져버렸다.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 얼굴을 찡그릴 수도 없었다. 환한 표정을 지었다.

김종필은 뒤에서 놀란 듯, 당황한 듯, 재미있는 듯 드라이버를 든 채 웃었다. 현장에선 환한 표정이었지만 분명 김영삼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정치적 라이벌 김종필 앞에서, 그것도 뭇 신문·방송 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티샷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어버렸으니 기분이 많이 나빴을 것이다. 아마도 김영삼은 골프에 영 소질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제로 당시 김영삼의 실력은 110타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김영삼은 골프를 아예 끊어버렸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이 만들어놓은 청와대의 연습장을 없앴고, 청남대 골프장도 방치했다. 골프를 사치성 스포츠로 분류해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물론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인 만큼 세제를 조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갔다는 것이다. 김영삼은 “재임 기간 중 골프를 안 치겠다”고 선언했다. 취임 한 달이 안 된 1993년 3월 17일 금융단체회장단과의 조찬간담회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땀과 노력이 필요한즉 나는 그런 뜻에서 임기 중 결코 골프장에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여기까지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은 여기에 덧붙여서 “골프는 재미있지만 국민에게 위화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빼앗습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김영삼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도 골프를 했다. 유신 이전에도 했고, 3당 합당 논의 당시에도 했다. 티샷하다 넘어진 다음에는 안 했다. 한마디로 골프로 별 재미를 못 봤다. 그래서 김영삼은 여당의 당대표일 때도 안 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 ‘안 한다’고 선언해도 자신은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위화감, 일 등을 갖다 붙였다.

김영삼이 그렇게 ‘안 친다’고 선언함으로써 공직자들의 발도 묶였다. 뿐만 아니라 기업하는 사람들도 못 치게 했다. 경제 관련 연구기관 대표들과 조찬을 하면서 “부도나는 회사는 사장이 출근하자마자 골프 치러 가는 회사입니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경제부총리 이경식은 국세청장에게 그런 사람들을 조사하라고 했다. 사장이 골프를 치면 망한다는 생각이었고, 골프 치는 사장들은 찍어서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발상이었으니 저급하기 이를 데 없다.

어쨌든 김영삼의 발언으로 골프는 ‘금기 스포츠’가 되었다. 1993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당시에도 클린턴은 골프를 하고 싶어 했지만, 김영삼이 조깅을 하겠다고 해서 새벽 조깅으로 대체되었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가 “국회의원들 골프를 좀 하게 하시지요” 하고 건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김영삼이 그토록 골프를 금지한 것은 깨끗한 문민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 때문이었다. 직전의 노태우, 그 이전의 전두환이 기업에서 돈을 받고 부정축재를 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는 반대 이미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려 한 것이다. 공직자, 기업인까지 골프를 못하게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따지면 분명 문제가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일반 국민의 정서는 ‘골프는 사치’라는 것이었다. 김영삼은 누구보다 여론에 민감했고, 어떻게 하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잘 알았다. 합리, 비합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골프를 금지시키면 일반 국민은 무조건 좋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당연히 골프업계는 죽을 맛이었다. 골프장도 안 되고, 골프 용품점과 골프장 주변의 음식점도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김영삼 시절을 골프계에서는 ‘골프의 암흑기’라고 한다.

하지만 이 골프금지령이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골프를 좋아하는 공직자들은 몰래 골프를 쳤다. 필명(필드용 가명)을 쓰고 얼굴을 가려가면서 골프를 쳤다. 새벽 골프를 하기도 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를 바꿔 타고 가는 ‘007 골프’도 했다. 감찰기관들이 휴게소에 장시간 주차되어 있는 차를 조사하기도 했다. 공무원끼리는 “1998년 3월 1일에 보자”는 말을 하곤 했다. 김영삼의 임기 후 처음 맞는 3·1절에 골프를 하자는 말이었다.

진보 대통령은 왜 골프를 좋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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