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자 대통령
박영만 지음 | 프리윌
세계의 여자 대통령
박영만 지음
프리윌 / 2012년 9월 / 272쪽 / 14,000원
Part.1 1970년대
골다 메이어 -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1898년 5월 3일, 옛 러시아제국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메이어의 아버지는 목수였다. 러시아는 당시 너무나 비참했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던 러시아 농민폭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면서 조직적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키예프는 러시아에서도 반유대주의 정서가 가장 강한 곳이었다. 다행히 가족들의 목숨은 안전했지만 어린 메이어는 이때 처음으로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유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메이어의 가족들은 러시아인들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정착하여, 아버지는 목수 일을 했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가난하긴 했지만 생활은 자유로웠고 무엇보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없어서 메이어는 마음 놓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크게 영향을 미친 건 학교 교육이 아니라 밤마다 모인 유대인 혁명가들의 토론이었다. 메이어의 언니 쉐이나는 수시로 집에서 유대인 지식인들의 모임을 열었다. 그때마다 시온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여러 부류의 지식인들이 열띤 정치토론을 벌였다. 고등학생인 메이어도 이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열심히 경청하며 차츰 시오니즘에 눈뜨게 되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미 동포들이 50여 개의 농촌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밀워키의 사범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재학 중에도 노동자 서클의 문학그룹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의 폭을 넓혀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온노동당이 세운 민족학교의 교사가 되는 한편, 시온노동당에 가입하여 유대나라 건설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18년 가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유대인대회의 목적은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시민권 보존을 위한 사업계획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메이어는 밀워키 최연소 대표로 뽑혀 이 회의에 참석했고,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 때문에 해외에 파견되는 일이 잦았고, 그녀의 이름은 차츰 국내외에 알려졌다. 특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런던에서 열린 대영제국 노동회의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메이어가 훗날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구리온의 눈에 띈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당시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유대노동자대표로 국제사회의 지원을 열렬히 호소하던 그녀의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메이어는 히스타드루트 집행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팔레스타인 자치령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 각지에서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실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아우슈비츠 등 악명 높은 수용소의 처참한 광경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메이어는 통곡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국가 흉내라도 냈더라면, 수백만의 유대인이 나치의 가스 오븐에 구워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각각 창설하고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메이어는 서둘러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유대인복지기금연맹총회에 참석해 연설을 시작했다. 원고도 없이 연단에 서서 비장한 톤으로 호소했다. "지금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는 우리 조상이 마사다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후의 1인까지 싸우려 합니다. 무기가 있으면 무기를 들 것이고, 무기가 없으면 돌이라도 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70만 명이 살아나면 유대민족이 살아날 것이고, 70만 명이 죽으면 유대민족은 죽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보고받은 유대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구리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에 '간절한 애국심으로 모금한 한 유대인 여성이 유대인국가 수립을 가능하게 했다.'라고 쓰일 것이다."
<나의 인생>에는: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 모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반주 없이 국가를 부르고 선언문 전문을 낭독하기까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 선언으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은 지구상의 한 나라가 되었다. 건국위원회는 1949년 1월, 첫 총선을 거쳐 내각을 구성하고 초대 총리로 벤구리온을 임명했다. 건국의 일등 공신인 메이어는 잠시 모스크바 주재공사로 부임했다가 곧 노동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녀는 새로 이주해온 유대인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고 직장을 배정하고 도로를 놓고 주택시설을 제공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주민이 급증하여 국가 창설 1년 반 만에 30만의 인구가 불어났다. 훗날 메이어는 이 시절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술회했다.
1967년 6월 4일, 이스라엘은 PLO의 무차별 테러를 응징하고, 아랍 국가들의 공격 준비에 대한 자위를 명분으로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일으켰다. UN 안보리는 이스라엘에게 전쟁 이전 상태로 철군하라고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에쉬콜 총리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총리 서거를 애도할 틈도 없이 국민들의 지지와 여망에 따라 71세의 메이어가 후임 총리가 되어 연립 내각을 이끌었다.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고, 총리의 판단은 곧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짓는 막중한 자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행히 이라크 등 중동 전체로의 확전을 우려한 UN이 곧 중재에 나섰고, 양측은 중재안을 받아들여 정전에 들어갔다. 이후 이스라엘 총리로서 메이어는 국제사회에서 중동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한편 1970년 9월, 이집트에서는 나세르 대통령이 과격파 게릴라들에게 암살당하자 강경파가 득세했다. 후임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 반환을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장해나갔고, 시리아 역시 전열 정비에 박차를 가해 제4차 중동전 조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검은9월단'이라 불리는 PLO 소속의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해 10여 명의 선수를 살상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메이어 총리는 이스라엘 자체 특수수사팀을 만들어 테러단을 응징할 것을 지시했고, 10년 동안에 걸쳐 테러단 전원을 색출하여 끝까지 응징했다. 반면 중동 문제 해결에 있어서만큼은 국내 강경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평화적 기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녀의 평화정책에도 불구하고 1973년 10월 6일 새벽 욤키푸르, 마침내 소련제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운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남과 북에서 이스라엘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하면 침략자로 몰리는 데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18일간 벌어진 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 3백만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였다.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총리 집무실로 찾아와 울부짖었고, 참전 용사들도 왜 선제공격을 명령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 메이어는 그들에게 '저 역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단장의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국땅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동포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또다시 비참한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아픔을 딛고 미래를 위해 힘을 길러야 합니다.'라고 호소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악화되어 은퇴를 결심하고 1974년 4월 11일 공식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녀는 암으로 숨졌는데, 그녀가 숨진 뒤 사람들은 그녀가 12년 동안이나 백혈병을 앓으면서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한 번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에 감명을 받았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그녀에 대해 '내가 35년간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강한 개성과 천성적인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975년에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얼굴이 못난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못났기에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했다. 나의 약함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
Part.2 1980년대
그로 할렘 브룬틀란 - 노르웨이 총리
북방의 길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정식 명칭은 노르웨이왕국(Kingdom of Norway)이며, '노르웨이(Norway)'라는 말은 '북방의 길'이라는 뜻이다. 국민 대부분은 게르만족인 노르웨이인이며, 노르웨이인의 조상인 노르드인은 8세기 말까지 노르웨이 남부지역에서 여러 개의 작은 나라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872년에는 헤럴드왕에 의해 노르웨이에 통일왕국이 세워지고, 11세기 중엽에는 노르웨이 왕이 덴마크 왕을 겸하는 등 세력의 부흥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4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오히려 덴마크의 지배를,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1814년, 노르웨이인들은 나라가 스웨덴의 속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자체 헌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전쟁을 벌였고, 결국 노르웨이가 패하여 그들은 스웨덴 왕을 섬기는 대신 독자적인 헌법을 유지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19세기 내내 지속된 노르웨이의 완전 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결국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을 이끌어 오늘날의 노르웨이 왕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또다시 5년 동안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한편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 독립 직후까지 2차례에 걸친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1, 2차 이민시대라고 한다. 즉 1866년부터 1873년까지는 제1차 대규모 이민시대로 미국에 약 10만 명, 그리고 1900년부터 1910년까지는 제2차 대규모 이민시대로 약 20만 명이 노르웨이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60년대 후반, 국토 인근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대량 발견되면서 노르웨이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 모드로 돌아섰다. 노르웨이는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등의 지하자원 매장량이 엄청나 2012년 기준 세계 3위의 천연가스 생산국이며, 세계 5위의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에는 스웨덴 경제규모의 1/3밖에 되지 않았으나 풍부한 지하자원에 힘입어 2009년에는 오히려 자기 나라보다 인구가 2배에 달하는 스웨덴의 경제력을 추월하였다.
이웃 나라인 스웨덴, 덴마크와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로, 1971년에 완성된 국민사회보장정책에 따라 전 국민이 무료교육, 의료혜택, 실업수당, 노후연금 등의 완벽한 사회보장 혜택을 받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27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또 노르웨이는 사회민주주의 전통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남녀평등을 실천해온 나라이다. 오늘날 노르웨이 의회 구성원의 1/3 이상이 여성인데, 각 정당들은 국회의원후보자 공천과 당직자 임명에 있어서 여성할당제를 적용하며, 특히 노르웨이 노동당은 2006년부터 의원직과 당직의 50%를 여성에게 배분하고 있다. 또한 공공기관에서도 40% 이상의 여성을 임명하도록 할당제를 운용한다. 그리하여 UN은 노르웨이를 '성 평등의 천국'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노르웨이의 첫 여성 총리 그로 할렘 브룬틀란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남녀 성 평등을 위해 평생을 싸워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이상주의자 그로 할렘 브룬틀란: 그로 할렘 브룬틀란은 1939년 4월 20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4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창 시절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재활의학 분야의 전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재활의학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그녀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그때 가족들도 함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몇 년 뒤 아버지가 UN 소속 재활의학 전문가로 이집트에 파견되었을 때도 가족들은 함께 이집트로 갔다. 이러한 아버지의 국제무대 활동은 10대 소녀인 브룬틀란의 마음에 국제주의가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룬틀란은 또 아버지로부터 다른 열정도 상속받았는데, 그것은 정치적 행동주의였다.
그녀의 가족이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아버지는 노르웨이 노동당 내각의 사회부장관을 거쳐 노동부장관을 지냈고, 어머니 또한 노동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했다. 브룬틀란은 오슬로 대학에서 의학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학내의 노동당 정치 서클에 가입하여 부회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때 정치학과 학생 아르네 올라브 브룬틀란을 만나 대학 3학년 때 결혼을 한다.
1963년 오슬로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브룬틀란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공중보건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 후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녀는 노동당에 가입하는 한편, 오슬로보건위원회 의료행정관을 거쳐 1968년부터 1974년까지는 오슬로보건위원회 의료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어린이들의 건강 문제와 의료서비스 연구에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그녀의 이러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에너지는 그녀의 앞날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왔다. 1974년 브룬틀란은 브라텔리 총리로부터 환경부장관직을 제의받는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신이 환경문제에 대해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점을 들어 그 자리를 고사했지만, 결국은 보건과 환경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바꾸었다. 35살의 젊은 나이에 환경부장관이 된 브룬틀란은 남다른 열정과 총명함으로 장관직을 성실히 수행했고, 그것은 곧 정치적 명성으로 이어졌다. 1979년 환경부장관직을 퇴임한 브룬틀란은 곧 노동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재정위원회, 외무위원회, 헌법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1981년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인 노르리가 사임함에 따라 그녀는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당수로 선출되어 자연스럽게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녀의 나이 41세, 노르웨이 사상 첫 여성 총리이자 최연소 총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해 10월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함으로써 총리가 된 지 겨우 8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녀는 안타까웠다.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한 이유 중 하나로 당수가 여성이라는 점도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브룬틀란은 야당이 된 노동당을 이끌면서 여성 지도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녀의 지도력에 힘입어 1986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그녀는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사회민주적인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시대가 여성을 부른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18명의 장관직 중 6명을 여성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그때까지 세계적으로 한 정부의 여성장관 비율 최고의 기록이었다.
재임기간 중 그녀는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세계 환경문제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녀 자신이 환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노르웨이의 총리이자 UN환경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우리 공통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해 세계 경제발전 정책과 지구 환경회복을 연결시켜야 한다고 역설했고, 그것은 국제사회에서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정작 노르웨이 내에서는 그녀가 국내 일은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1989년 9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노동당은 소수당으로 전락하였고, 그녀는 두 번째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1990년 치러진 선거에서 다시 노동당이 집권함으로써 브룬틀란은 세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녀는 이번에는 내각 18명 장관 중 9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완벽한 남녀 동수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1992년, 브룬틀란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 찾아왔다. 아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는 흔들렸고 정계에서 물러날 것을 고심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1994년 세계동계올림픽을 무난히 치르고 1996년 10월까지 총리직을 지켰다. 그녀가 총리직에서 물러나던 해의 노르웨이 경제 지표는 경제 성장률 5%, 실업률 4%, 외채 전무 등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동당 후임 토르비욘 야글란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국내 정치에서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