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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김계동 지음 | 명인문화사
한반도 분단, 누구의 책임인가?

김계동 지음

명인문화사 / 2012년 8월 / 296쪽 / 9,800원





서론



한반도 분단의 책임에 대해서는 많은 주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분단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내인론과 외인론을 비롯하여, 여러 시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분단이 어느 특정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 더 정확히 말해서 일본의 항복은 40년 동안 외세의 통치를 받아온 한국인들에게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현실에 있어서 이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에게 그들의 세력권을 한반도에까지 팽창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상대진영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전후 한국처리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당시 강대국들이 추진한 대한반도 정책의 첫째 과제였고, 이에 따른 38선 분할점령과 점령군의 양 지역에 대한 배타적 통치는 남한지역과 북한지역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의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1945년의 분단은 한국인들의 민족적 분열보다는 외세에 의한 강압적 분단이라 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1948년 분단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의 분단고착은 한민족 내부의 분열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1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



20세기 초부터 일본에 점령당하고 있던 한반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면서 연합군 측의 승리가 가까워 오자, 전후 처리과정의 주요 지역 중의 하나로 부상되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패전하게 되면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외교활동을 벌였고, 강대국들은 어느 한 국가의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을 모색하였다. 특히 카이로, 얄타, 포츠담회담 등 전시 강대국 외교를 통하여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국제회의를 거치면서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지자 미국의 제의로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중심으로 분할점령하였다.

한국의 독립외교와 국제사회의 역학관계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절대적 정치, 군사, 경제적 이익'을 승인한 1905년 9월의 포츠마우스(Portsmouth)조약 이래로, 열강은 194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계속된 한국임시정부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은 강대국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당하는 등, 한국은 잊힌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내에 존재하는 한국인 단체들이 통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분열하고 있으며, 임시정부가 한국국민을 통치해 본 경험도 없고 통치할 능력도 없다는 점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임시정부는 중국에 너무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립 이후 중국이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우려가 있어 승인을 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 : 강대국의 영향력 공유 발상

한반도를 분단으로까지 몰고 간 강대국 전후처리 외교정책 중의 하나가 '한반도 신탁통치안'이라는 미국이 구상한 전후 한반도 처리방안이었다. 앞에서 설명하였다시피, 태평양전쟁 발발 후 미국정부는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 있어서 예상되는 중국의 영향력 행사를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중국에 위치하던 한국임시정부는 장개석 정부에 과도하게 밀착되어 일종의 종속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고, 광복군도 중국군 사령부의 명령을 받는 하급부대의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미 국무성은 한국독립 후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할 만한 제도적 장치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군사적인 면에서는 미국에 거주하거나 미국인들이 통제할 수 있는 한국인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게릴라전 수행, 또는 첩보활동을 하도록 하는 납코 프로젝트를 마련하였고, 정치외교적인 면에서는 독립된 한반도를 일정기간 동안 몇 나라의 공동통제하에 두는 신탁통치안을 준비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제안은 40년간의 일본 지배 후에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통치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 예견되므로 국가통치기술을 교육시킨다는 목적을 외면상으로 가지고 있었으나, 한국인의 국민성, 한국의 역사,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등을 감안한 최선의 안이라기보다는 강대국의 세력다툼에서 어느 한 국가의 독점적 영향력 행사를 봉쇄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탁통치안은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고, 그러한 이유로 중국이나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극소화시키려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더 좋은 방안이 강구되었을 때 신탁통치안은 더 이상 추구되지도 않고, 추구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제2부 한반도의 해방과 점령군의 진주



미국이 제의한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한반도 점령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미국이 한국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외교수단의 대안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한반도 점령, 군정실시, 신탁통치에 참여하는 전략은 소련과 접경한 국가에 대하여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면서 미국의 영향권을 확대시키는 목적에 부합하게 수립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미국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후 모든 민족적 정치세력을 불법화하면서 미 군사정부를 수립하였고, 한국정부 없이 신탁통치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반면, 소련은 한반도의 소련과의 지리적 근접성과 소련에서 훈련받은 수많은 한국인들의 존재 때문에 한반도에 수립될 새로운 한국정부가 친소성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소련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서 미국은 38선에 의한 분할점령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제의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을 한 이후 상이한 점령정책을 모색하였다. 소련은 북한지역을 점령한 이후 한국인들을 통한 점진적 공산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미국은 남한 점령 이후 미군사정부를 수립하고 직접 통치를 하였다.

점령정책 : 두 개의 상이한 접근

소련의 점진적 공산화 정책_ 한반도를 점령한 직후 소련은 한국문제를 다른 정치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기보다는,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미국의 태평양 지역에서의 팽창을 견제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점령 직후 각 도에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한 소련 점령군은 위원회들이 각 지역이 행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 정책은 한국인들이 환영을 받았다.

북한의 5도에 설치된 위원회의 10월 8일 대표자 회의에서, 소련점령당국은 한국인들에게 5개의 인민정치위원회를 5도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행정기구로 통합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틀 뒤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산당을 설립하게 함으로써 공산화를 위한 전략을 수립 및 실행해 나아갔다. 그리고 10월 10일부터 나흘간 '조선공산당 서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 연합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노동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하였는데, 열성자 연합대회에는 소련군정의 주요지도자들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 무장 투쟁세력, 김용범ㆍ오기섭ㆍ주영하 등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 70여 명이 참가하였다. 김일성과 그의 추종자들 50여 명은 9월 초 소련군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김일성이 귀국한 이후 치스타코프 사령관은 '사령관 명령'을 발표하여, 북한에 존재하는 모든 정당은 강령, 규율, 당원 명단을 소련 점령사령부에 제출함으로써 등록을 하도록 하였다. 이는 북한의 정치상황을 재조정함으로써 김일성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동안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정당을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침내 1945년 11월 3일 최초의 비공산 정당인 '조선민주당'이 조만식을 지도자로 하여 평양에 창당되었고, 곧이어 북한 전역에 지구당을 설치하였다. 한편 점령 초기 소련의 정책과 선전은 소련군을 해방군의 이미지로 부각시키는 데 상당히 성공적이었으나, 그들의 경제정책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였다. 그들은 주민들로부터 정기적인 곡물 상납을 요구하였고, 새로운 화폐를 대량 발행하여 인플레를 조장하였다. 또 만주에서 한 것처럼 북한 내 공장의 기계들과 광산에서 사용되는 장비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가져갔다.

조만식은 소련군의 곡물수탈과 기계를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하는 데 대하여 계속 비판을 하였다. 그러다 결국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지지를 거부한 이유로 1945년 말 직위가 박탈되고 감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조만식의 감금 직후 북한지역 정치에서 비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그 대신 공산주의 파벌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 뒤 소련점령군은 분산되어 있던 공산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들의 유순한 종복인 김일성이 집권하는 데 유리한 기반을 조성해 나아갔다. 그들은 또한 점진적으로 38선을 통한 남북한 간의 왕래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점령정책 : 친미화를 위한 정치세력 장악_ 그동안 남한에서 여운형은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과도정부'를 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는 1,000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정부를 구성한 뒤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선포하였다. 이 정부는 좌우익을 총망라한 연합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선정하였다. 인민공화국이 한반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단체로 부상하였으나, 다른 정치단체들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첫째,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지 않았다. 둘째, 1945년 9월 12일 박헌영에 의하여 서울에 재건된 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의 가장 위험스러운 상대였다.

존 하지 장군의 지휘를 받는 7만 2,000명의 24군단이 9월 8일 남한지역의 점령을 위하여 인천항에 도착하자, 인민공화국 대표단이 승선하여 새 정부의 행정기구로 각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는 내용을 알리는 문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하지는 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무시하였고, 미군이 진주할 때 인천항의 질서를 유지시킨 일본인들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9월 9일 일본 항복 기념식 직후 하지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일본 총독인 아베 노부유끼를 비롯한 일본관리들이 미군의 행정을 지원하고 질서 있는 정부의 인수인계를 위하여 당분간 종래 관직을 유지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의 이런 정책에 반발하여 9월 10일 한국군중들이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경찰서를 습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2명의 한국인들이 일본 헌병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종국적으로 한국인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여, SWNCC(미국 국무, 육군, 해군 3부 조정위원회)는 일본인들을 모든 관직으로부터 제거하도록 하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미국정부가 얼마나 한국점령에 대한 사전준비가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에서 하지와 미 점령군의 인기를 하락시키는 근원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본인들을 관직에서 제거한 후, 하지는 미군사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남한에서의 유일 합법정부로 공표하였다. 미국인들의 남한에 대한 직접통치는 1947년 6월 미군사정부의 명칭을 "남조선 과도정부"로 변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명칭 변경 후 남조선 과도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한국인들이 맡았다.



제3부 분단의 고착화 : 통일정부 수립의 실패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미국인들은 자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한반도 문제에 그다지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전후 한반도 처리에 성공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안도감에서 장기적인 정책수립 없이 임기응변적인 대처만을 해나감으로써 남한의 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미국인들은 남한을 미국화시키는 일이 수월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도 북한을 적성국가로 만들지 않는다는 목표 이외의 다른 구체적인 지침을 가지고 북한을 점령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소련점령당국이 처음부터 김일성에게 북한통치권을 허용하였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의 다른 지도자들이 소련에 협조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김일성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을 통하여 북한을 통치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군사정부를 수립하고 직접통치를 시작하였다. 만약 미국인들이 여운형이 설립한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였다면, 한반도의 초기 통일과 독립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신탁통치를 거치든, 안 거치든, 인민공화국을 통일된 중앙정부로 인정하는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제질서인 '냉전'의 개념이 양극체제에서 두 적대세력이 실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대립을 하는 상태라면, 한국에서의 냉전은 미국과 소련이 점령한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한국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1946년과 1947년의 미국과 소련의 협상과정에서 양국은 새로 세워질 한국정부는 자국에게 충성하는 정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국에게 적대적인 정부가 아니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였다.

통일정부 수립의 실패 : 대내외적 갈등의 점증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_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회담이 열렸다. 회의 벽두부터 중국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는 문제와 일본을 미국이 독점하려는 데 대하여 소련이 공세를 펼쳐 미국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한국문제에 관하여 미국의 번즈 국무장관이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을 하였는데, 그는 4개국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4국의 합의에 의하여 10년으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방법으로 한국인에 의한 임시정부를 세우지 말고, 4개국의 대표로 단일행정부를 구성하여 입법, 사법, 행정권을 수행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소련대표는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제한하고, 장기간의 '일본점령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에 의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통한 신탁통치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회의기간 내내 수세에 몰리던 미국은 소련의 제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은 신탁통치에 활용될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이념적 분열_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 협정 직후 미군사정부는 한국인들의 저항과 비협조 캠페인에 직면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설립한 김구는 모든 국민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고, 자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모스크바 협정에 관한 소식이 소련점령지역에 유포되자, 조만식과 민족주의자들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었다"면서 신탁통치 계획에 강한 저항을 하였다. 초기에 김일성과 공산주의자들도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며칠 동안 한반도 전체의 여론은 만장일치로 신탁통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2일 북한 공산당은 모스크바 협정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소련의 지원이 없이 한국의 신속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남쪽의 공산주의자들도 입장을 전환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정부,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였고, 한국의 우익 계열만이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사정부는 매우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추진 협상 :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_ 1946년 2월 서울에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남북한의 정당에 대한 상담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미국과 소련점령당국은 새로 설립될 정부가 완전히 그들에게 충성하는 정부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각 점령지역의 정치구조를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소련점령군은 북조선 각 정당과 사회단체, 각 행정국 및 각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를 개최하고, 조만식이 통솔하던 5도 행정국 대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중앙 통치기구로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는 점차적으로 소비에트 체제와 유사한 형태의 사법, 경찰, 집행기구를 포함하는 행정기관으로 발전해 갔는데, 이때부터 소련에 충성하는 인사만이 북한의 행정기구나 정치계에서 고위직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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