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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한국의 대통령이다

김병문 지음 | 북코리아
그들이 한국의 대통령이다

김병문 지음

북코리아 / 2012년 4월 / 524쪽 / 18,000원



이승만과 제1공화국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이경선(양녕대군의 16대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이 없이 족보연구에만 관심을 가졌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 출신이라는 사실에 우월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일생에 상당한 영향을 준 듯하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승만은 19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게 된다. 21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운동에 앞장서다가, 2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오직 자신만이 나라와 국민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서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일본의 감시를 뚫고 상해에 들어가서 임시정부 인사들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승만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강대국을 움직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한 반면, 임시정부의 몇몇 요인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이에 실망하고 더 이상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의 방향을 논의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해방이 되기까지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시절 이승만은 자만심과 독선적인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지도자로서 타협과 수용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고 권력 지향적이고 독선적인 행태가 강했다. 구미위원회와 재정 문제를 둘러싼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파쟁과 갈등은 급기야 대통령 해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은 1942년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에게 조만간 일본이 패망할 것이며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게 될 것이니 희망을 잃지 말고 싸워나가자고 호소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였을 때 이승만의 명성, 교육, 나이 등은 해방 정국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인식되는 요인이 되었다. 여러 정치단체가 이승만을 영수로 모셔가려고 했고, 이승만은 자신의 유리한 배경을 이용하여 대중의 지지를 받으려 했다. 미군정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이승만의 태도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그의 카리스마적이고 절대적인 인기를 알아채고 이승만에게 호의적으로 대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 간 외상회의가 열려,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신탁통치 내용이 발표되자 한국 사회에서는 격렬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좌우 할 것 없이 모든 세력이 반대하다가 갑자기 소련의 지시를 받은 공산당 세력이 찬성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찬탁과 반탁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줄 것을 미국 의회에 호소하고, UN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제의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단독 정부 반대세력이 선거에 불참하여 대부분의 제헌 의원들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였다. 5.10 총선으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고 제헌의회는 5월 31일 최초로 개원하였다.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 및 공포(1948년 7월 17일)한 뒤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승만은 비록 좌익을 배제하여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인해 남북한 분단을 가져왔고 친일 인사들을 숙청하지 않고 중용했지만, 초대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는 과정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헌법 개정을 통해 권력을 연장하는 등 정치권력을 사용하는 데서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혼자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대중을 동원하고 자기 뜻에 맞도록 조종하는 고도의 대중 동원 능력의 소유자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대중을 사로잡는 이승만의 포퓰리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였다.

1952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은 계엄령을 내리고 헌법을 개헌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법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헌법을 개정하였다.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당시 두 번으로 제한된 대통령 임기를 3선으로 고치는 3선 개헌에 착수하였다. 투표결과 재적의원 203명의 2/3은 135.3333이었으나 찬성은 135표가 나왔다. 개헌에 필요한 2/3를 얻지 못하여 사실상 부결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의 자유당은 사사오입, 즉 5 이상은 반올림하고 4 이하는 버린다는 식으로 203의 3/2는 135라고 주장하면서 개헌론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렇게 하여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에게 더 이상의 민주주의 실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1960년 이승만은 3월 15일 선거를 통해 네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조직적인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의 분노로 4.19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자유당은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였지만 결국 시민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4.19 민주화 운동으로 이승만은 권력에서 물러난 후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 그곳에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과 유신



박정희는 1917년 11월 4일 경상북도 선산군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었던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23세에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편입하여 학업을 마치고 만주의 관동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육사를 졸업하고 국군 장교에 임관하였다. 하지만 1948년 한국군 내에 좌익 숙청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남로당 군사조직에 개입했던 박정희는 체포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는 했지만 이 좌익혐의에 대한 기록은 이후 두고두고 박정희의 군 생활에 시련을 안겨주었다.

1960년은 자유당 말기로 3.15 부정선거와 4.19 민주당 운동으로 정국은 혼란스런 시기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이후 등장한 장면 임시정부는 무력했다.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던 박정희는 참모총장에게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에서 사퇴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사퇴 서신을 시작으로 소장파에 의한 군부의 정군 운동이 확산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 장교들을 모아 1961년 5월 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쿠데타가 성공한 뒤 박정희는 군정을 실시하여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한다.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역임하면서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1963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군정을 민정으로 바꾸면서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의 정책결정방식의 특징은 독단적이고 독점적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아무리 작은 정책 사항이라도 세심히 연구하고 분석한 후 가치가 있는 결정이라는 신념이 생기면 지체 없이 강행하곤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도 초기에 반대여론이 많았으나 그대로 강행한 점은 그의 정책 결정 행태를 보여준다. 박정희는 또한 현장 시찰을 자주 하였다. 그는 "귀와 입으로 일하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다리와 눈으로 일하라."라며 현장점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꼼꼼한 현장지도를 보여준 대표적인 예는 1963~1979년까지 진행된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와 1965년부터 매월 개최된 무역진흥확대회의 참석을 들 수 있다. 박정희는 선동가이기보다는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하는 행정가형, 실무형의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직업 정치인을 마음 속 깊이 경멸하였다.

박정희는 경제개발과 국방을 통치의 2대 지주로 설정했다. 자조정신을 바탕으로 자립경제를 건설하고 자주국방 태세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뿌리내려 진정한 독립 국가를 이룩한 뒤에 통일로 간다는 것이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 발전 전략의 청사진이었다. 70년대 들어 박정희는 전 국민적인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제5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완성으로 국민의 절대적 빈곤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은 조국 근대화를 통해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중흥을 기하고자 했던 한국적 근대화 운동의 한 유형인 동시에 한국 사회 개혁운동의 일환이었다. 경제적인 업적은 이루었으나 정당성이 취약했던 박정희는 권력기반인 군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젊은 장교 중에서도 육사 출신 전두환, 노태우를 특히 주목하고 심복으로 길렀다. 이들은 군 내부에 박정희 대통령을 받드는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나중에 하나회는 박정희의 죽음 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데 활용되었다.

1971년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유신체제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박정희가 취한 최후 수단이었다. 유신체제는 강압적인 군사 통치를 바탕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1979년 야당 총재 김영삼이 유신체제에 대한 전면 투쟁을 전개하고 '부마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함으로써 붕괴하게 된다. 유신체제 붕괴의 근본원인은 박정희 1인 독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이 곧 유신체제 폐기를 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박정희가 죽은 후 그 누구도 그 체제를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신체제가 곧 박정희 개인에 의해 지탱된 체제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전두환과 제5공화국



10.26 사태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정승화 참모총장이 계엄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유신체제는 공식적인 종말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군 내부의 권력 투쟁이 현실화되면서 12월 12일 전두환 합수본부장 측의 군대가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12는 명백한 하극상 사건이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이끄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다음 해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신군부는 이를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는 기회로 보아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인명이 피살되었고, 국민에 대한 유혈 참극은 이후 수립된 전두환 정권에 정당성이 결핍되었다는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었다.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에서 7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환경에서 어렵게 공부를 하던 전두환은 1951년 11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55년 전두환은 공수부대 창설 멤버로 선발되었고,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으면서 군부에서 선두주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전두환은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대대장으로 청와대 경비를 맡았고, 1970년 베트남에 파견된 연대장으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그는 군 생활을 하면서 독특한 의리와 처세로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이었다. 또한 능력과 충성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2.12에서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육사 출신들은 전두환 외에 어느 누구도 지도자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단합되어 있었다. 전두환의 리더십은 어느 날 권력을 손에 쥐고부터 생긴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쏟은 노력과 정성을 결정적일 때 후배들의 충성확보로 보상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리더십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복잡한 이론이나 논리를 싫어했고 단순하고 간결한 결정을 선호했다. 그래서 국민이 원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정책결정을 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다. 또한 자신이 시행한 정책이 평가받는 것을 싫어했으며 정책에 대한 여론도 무시했다. 전두환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과감한 결정을 내리곤 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결정을 실행할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했고, 참모들에게는 명백하고 간결한 정보를 요구했다. 그는 집무실에서 각종 서류를 검토하면서 의문점이 발견되거나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인터폰이나 전화를 걸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 참모들은 24시간 긴장 상태에 있어야 했다.

전두환은 이성이 아니라 본성에 의존하는 행동형이었다. 사전계획 없이 새벽 1~2시에도 일선 파출소나 시장 상가에 불쑥 나타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깊이 생각한 후 행동하기보다 마음먹은 일은 거침없이 해치웠다. 또한 그는 장악력이 강한 지도자였다. 자기가 데리고 쓴 사람은 끝까지 챙기고, 어쩔 수 없이 내보낼 경우 통념을 무색하게 할 만큼 거금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장악력을 기초로 신군부 지도자가 되었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경제우선 정책과 국가운영 방향을 인사 장악력을 통해 추진했다. 전두환은 경제를 중시하여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보좌진을 구성하고 그들에게 경제정책을 챙겼다.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마음대로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김재익을 전적으로 밀어주면서 성장, 물가, 국제수지라는 이른바 세 마리 토끼를 잡은 5공 경제 치적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대목이 전두환의 용인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전두환은 타고난 건강에서 오는 기동성과 근면성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 임기 7년 동안 밤 1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든 일이 없고 아침 6시 이후에 일어난 일이 없다고 한다. 그 자신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고 자랑하였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도 정보자료와 보고서, 결재서류를 한 아름 안고 퇴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부지런함은 본인에게는 만족스러웠지만 정작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그 일에 근면함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것이 국민과 거리감을 갖게 하고 독재정권이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게 하였다.

김영삼과 문민정부



1990년 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민정, 민주, 공화 3당의 보수 대연합을 통해 집권당 핵심부로 들어서게 된다.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권력 내부의 치열한 투쟁과정을 거치게 된다. 오랜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익힌 김영삼의 정치적 감각은 집권 여당 내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치열한 견제와 음모를 극복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당시 민정계는 다수 의석을 바탕으로 당을 장악하려 했으나, 김영삼에 필적하는 정치 지도자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민주계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김영삼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였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은 30년간 이어진 군부의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문민이 중심이 되는 시대를 열었다.

김영삼은 1927년 12월 20일 경남 남해 바닷가의 작은 어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멸치어장을 하는 부모 밑에서 부유한 삶을 영위하였다. 1948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한 김영삼은 대학 2학년 때 웅변대회에 입상한 것을 계기로 정치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대학 졸업 이후 국회부의장 장택상의 비서로 발탁된 김영삼은 장택상의 조직과 재정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정치 수업을 받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김영삼은 1.4 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가서 KBS에서 대북방송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영삼의 어머니는 1960년 거제도에 침입한 무장간첩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실은 김영삼이 우익보수 정치가로 자리 잡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김영삼은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나이 25세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경남중학교 시절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붓글씨로 써 붙여놓고 공부했던 꿈이 구체화된 것이다. 김영삼은 정치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하여 야당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조병옥, 유진산으로부터 정치를 배우게 된다. 1965년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로 선출되었으며,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해 갔다. 3선 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은 1969년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면서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였다. 김영삼의 과감성에 고무되어 당시 40대인 이철승과 김대중도 후보 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이 경선에서 김영삼은 아깝게 김대중에게 졌지만 당시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후 박정희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 오던 김영삼은 1979년 야당 당수가 되었다가 《뉴욕 타임스》 회견 내용이 문제가 되어 국회에서 제명되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부마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급기야 10.26이 일어나 박정희가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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