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결단
닉 래곤 지음 | 미래의창
대통령의 결단
닉 래곤 지음
미래의창 / 2012년 3월 / 382쪽 / 15,000원
토머스 제퍼슨 - 미국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루이지애나 주 매입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독립 후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최초의 국무장관을 지내고, 존 애덤스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역임한 후, 1801년 대통령이 되었다. 임기 초반 그는 정부의 고질적인 적자재정을 끝내고 국가 채무를 없애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대통령 주변의 화려한 행사와 볼거리들을 일체 금지시켰다. 제퍼슨은 대통령제를 군주제와 비슷하게 보이도록 하거나 연방정부의 권력을 옹호하는 느낌을 주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퍼슨의 정치 철학은 그가 루이지애나 주를 매입하기로 한 결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루이지애나는 원래 프랑스 식민지로 있다가 1763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을 계기로 스페인 식민지로 귀속된 지역이다. 그런데 1800년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이곳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아이티 식민지를 교두보 삼아 미시시피강과 뉴올리언스를 되찾으려 했다. 실제로 1802년 나폴레옹은 2만 5천 명의 병력을 아이티에 파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결사 항전하는 원주민과 당시 유행하던 말라리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자 제퍼슨은 프랑스에 뉴올리언스를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매입 협상은 12개월 동안 진퇴를 거듭했다. 제퍼슨은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을 제치고 자신이 직접 협상을 진두지휘했다. 어느 날 뉴올리언스의 스페인계 통치당국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미국 상품에 금수 조치를 내렸다. 이는 미국 서부의 정착민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조치였다. 미국 의회의 연방파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요구했다. 하지만 제퍼슨은 반대했다. 그는 이 지시의 배후에는 나폴레옹이 있다고 믿었다. 협상전술의 일환으로 가격을 올리려는 속셈이라 여긴 것이다. 미국은 원래 뉴올리언스 지역과 플로리다를 9백만 달러에 매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영국과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정신이 없던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주 전체를 1,500만 달러에 팔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미국 정부는 막대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조건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일단 수락했다. 1803년 5월 2일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었다. 나폴레옹은 조약 비준과 대금지불에 6개월의 기한을 주었고, 기한을 넘기면 협정은 파기된다고 미국 정부에 밝혔다.
협정체결 소식이 알려지면서 온 나라가 기뻐했다. 1,500만 달러에 미국의 영토가 두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퍼슨은 기뻐하지 못했다. 돈을 마련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철학적인 것이었다. "현행 헌법은 외국 영토의 매입 권한을 정부에 부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헌법 수정이 필요한가?" 엄격한 헌정주의자인 제퍼슨은 중요한 사안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은 식으로 처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시 그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헌법수정을 놓고 씨름하다 보면 매입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는 헌법수정을 거치지 않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쓸데없이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 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노예제도 폐지
링컨은 급진적 개혁가로 묘사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연방주의자이다. 그는 정부 제도를 신봉하고 법률을 철저히 따랐다. 노예제도를 혐오했지만 노예의 즉각적인 해방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고 보았다. 노예 해방을 위한 헌법 개정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다. 그는 단지 노예제도의 확산을 반대할 뿐이었다. 그는 노예제가 남부 주에만 국한될 수 있다면 연방의회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주에 혜택을 줌으로써 노예제가 점진적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노예 해방을 정당화하는 구절이 헌법 어디에도 없다고 믿었다.
1858년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상대인 스티븐 더글라스는 노예제도 찬성론자였다. 더글라스는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 법 제정을 불러 온 장본인이었다. 이 법은 연방정부가 아닌 각 주가 노예 문제에 전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시한 법안이다. 그해 여름 링컨은 이런 연설을 했다. "저는 이 정부가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고 여깁니다. 반은 노예를 부리고, 반은 자유를 품은 채 오래 버틸 수는 없습니다. 노예제 반대론자들이 힘을 모아 노예제의 확산을 저지하고 궁극적으로는 폐지해야 합니다." 이 연설을 계기로 링컨은 전국적인 명사로 떠올랐다. 노예제도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를 표시하면서도 노예제 해결을 위한 중도적인 접근법을 제시함으로써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것이다.
1860년 11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노예제를 찬성하는 남부 주들이 연방을 탈퇴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임 대통령인 뷰캐넌이 헌법 수정안을 호소했다. 헌법에서 노예제를 확고히 함으로써 남부를 진정시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링컨은 반역자들을 달래느라고 헌법에 손을 댈 뜻이 전혀 없었다.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급진적인 공화당 의원들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링컨은 여기에도 반대했다. 그는 남부 연합이 아직 연방에 속해 있으며 헌법은 그들에게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는 노예제도를 폐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1862년 상반기는 링컨에게 힘든 시기였다. 연방군은 연전연패했고 유럽 열강은 남부 연합을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링컨은 전쟁의 흐름을 바꿀 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분열을 막는 것 이상의 대의가 있어야 했다. 바로 노예 해방이었다. 링컨은 헌법을 수정하는 대신 최고사령관의 자격으로 노예 해방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링컨의 논리는 이렇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헌법상 대통령이 노예제도에 관하여 각 주의 권한에 개입할 근거가 없다. 하지만 대통령은 헌법상 정의된 전쟁 중의 비상 대권에 따라 일방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권한을 갖고 있다. 반란군을 무찌른다는 군사적 목표 달성에 기여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헌법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링컨은 의회가 이에 반대하지 않을 것을 꿰뚫어 보았다.
1862년 9월 22일에 이루어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자유의 대의를 새롭게 발견한 북부 사람들이 앞다투어 징병에 응했고, 남부 연합의 노예였던 흑인들도 북부를 위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남부 연합은 노예 해방으로 전쟁수행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로써 전쟁은 단지 힘으로 국가의 분열을 막는 것 이상이 되었다. 정당하고 도덕적인 전쟁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이 된 것이다. 링컨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에 정치인으로 더 성장한, 드문 케이스이다. 그는 임기 초반에는 남북전쟁을 연방과 분리파들 사이의 대결로 설정하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노예해방선언으로 자유야말로 연방을 지키는 방법임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다. 링컨으로 인해 자유와 애국은 서로 단단히 얽혀,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를 빼고는 성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테디 루스벨트 -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시킨 파나마운하 건설
골드러시 이후 캘리포니아와 연결되는 교통량이 증가하는 데 자극받은 미국 정부는 1855년 운하 건설에 대한 연구에 공식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대서양-태평양 연결항로 운하의 실현가능성과 중요성」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파나마에 운하를 파는 편이 현실적 가능성이 높고 경제성도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를 먼저 실천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1880년 프랑스인 레셉스가 파나마에서 운하 건설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레셉스의 운하 건설은 설계 착오와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말미암아 10년 동안 2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남기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01년 9월 미국에서는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가 뉴욕 주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암살되었다. 부통령이던 테디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당시 42세의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지만, 풍부한 공직 경험이 나이의 문제를 덮어버렸다. 그는 뉴욕 주 의회에서 활동했고, 뉴욕 경찰국장과 해군부 차관을 지냈다. 쿠바에서 연대장으로 복무했고 뉴욕 주지사를 지낸 다음 부통령이 되었다. 또한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고 당대의 대표적 지성 중 하나로 명성을 얻었다.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중미 지역의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가 중심이 되었다. 운하를 건설하면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세계열강으로 우뚝 설 발판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나마에 운하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신의 계획에 회의적인 의회를 강하게 설득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그리고 콜롬비아 정부(당시 파나마는 콜롬비아 영토의 일부였다)와 협상을 벌여 1903년 1월 헤이-헤란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당시 콜롬비아 국민들은 운하에 대한 권리를 헐값에 미국에 넘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콜롬비아 의회가 조약 비준을 늦추자 미국은 콜롬비아에 외교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 신문에 "콜롬비아 의회가 조약을 거부한다면 파나마는 분리,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다. 루스벨트는 이 생각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보도하도록 했다.
1903년 8월 콜롬비아 의회가 조약 비준을 만장일치로 거부하자 미국은 콜롬비아가 정신을 차릴 뭔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여기서 '뭔가'란 파나마 혁명이다. 루스벨트의 입장은 확고했다. "우리는 이 사태에 개입하여 운하를 건설해야 합니다. 저들의 반대를 거부할 도덕적 명분과 법적 타당성은 충분합니다." 미국이 파나마 혁명을 후원했는지의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공식석상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자신이 파나마 독립을 열망한다는 뜻을 공공연히 내비쳤다. 심지어 그는 파나마 봉기를 지원하는 프랑스 로비스트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1903년 11월 4일 파나마에서 마침내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세력은 파나마시티와 콜론을 장악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이틀 전 루스벨트는 해군에 "파나마 지협 철도가 적대적인 지상군에게 위협받을 경우를 대비해, 이 지역의 통행이 방해받지 않도록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 콜롬비아 군대가 봉기를 진압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는 것이었다. 자국 영토에 군대를 보낼 수 없게 된 콜롬비아 정부는 싸우지 않고 손드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써 파나마는 독립국이 되었고 루스벨트는 운하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윤리적 잣대로 루스벨트의 행동을 판단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혁명을 유도하는 일은 지금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공의 기회를 얻으려면 페어플레이가 필요하다."는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과 가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백 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에는 국제사회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무기대여법 제정
1939년 3월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히틀러의 진격을 막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을 돕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의 생각은 달랐다. 의회는 루스벨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립화 법안의 직불직송제(미국 기업의 해외무기 판매를 허락하는 제도) 조항을 삭제하기로 의결했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더 이상 미국 기업으로부터 군수물자를 구입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중립화 법안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히틀러가 서부전선으로 군대를 돌리기 전에 직불직송제를 도입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군수물자를 제공하려 한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1940년 5월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 공격하였다. 공격의 신속함과 맹렬함에 프랑스는 한 달 만에 항복하였다. 다음 차례는 영국이었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미국기업이 아닌 미국정부가 영국에 직접 무기를 판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직불직송제보다 심한 요구사항이었다. 루스벨트는 처칠의 요청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의회나 국민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독일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산업경제를 전시체제로 전환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이런 현실 속에서 루스벨트는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첫째 대안은 군사장비와 보급물자를 미국 방위용으로 양산하는 것이다. 이 경우 영국을 도울 수 없다. 둘째 대안은 군사장비를 양산하여 영국에 곧장 보급하는 것이다. 두 번째 대안을 선택하는 것은 괴로운 결정이다. 영국이 패하는 경우 미국은 스스로를 지킬 무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미국을 지키는 최선의 길은 영국을 돕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야 독일을 유럽지역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영국이 패한다면 독일이 대서양을 장악하고 어느 시점에는 미국에 상륙할 것이다.
루스벨트는 영국에 3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긴급 판매하고, 내각을 개편하여 영국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물러나게 했다. 처칠이 독일의 상륙작전을 막기 위해 구축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루스벨트는 함대를 넘기는 대가로 영국 대서양 식민지의 해군기지 사용권을 요구했다. 함대를 빌려주려면 미국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는 대가를 받고 거래를 하는 형식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고 함대를 빌려 주었다. 계속해서 처칠이 영국 정부의 현금이 고갈되어 무기 대금을 지불할 수 없다고 호소하자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을 추진하였다. 빚을 갚지 못한 나라에 차관을 주는 것을 금지한 법안과 현금 거래만 허용하는 중립화 법안을 회피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루스벨트는 반대하는 의회를 강력하게 설득하여 결국 1940년 3월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법안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은 수많은 함포와 수백만 발의 포탄, 수십 척의 어뢰정을 영국으로 실어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결국 참전하게 된다.
무기대여법은 1945년 봄까지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은 총 5백억 달러(오늘날 가치로 8천억 달러)에 상당하는 무기, 장비, 원자재, 식료품을 내보냈다. 최대 수혜자인 영국은 314억 달러를 제공받았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마크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2차 대전 중 미국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공짜였던 셈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많은 업적 중에 무기대여법은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뉴딜 정책, 대공황 극복, 2차 세계대전 승리 등 갈채를 받아 마땅한 위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것은 좁은 시야다. 그 사실은 만약 이 법안이 없었다면 전쟁이 어떻게 끝났을지 상상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해리 트루먼 - 중국과의 전쟁을 막은 맥아더 장군 해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미노 이론에 따라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결국 그 지역 전체가 공산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파견군을 누가 지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 맥아더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지휘를 맡은 지 불과 석 달 만에 인천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상륙작전 직후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은 맥아더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트루먼은 한반도 통일에는 합의했지만 중국과 소련은 자극하지 않기를 원했다. 트루먼은 중국의 개입을 가장 우려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중국은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