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앙드레 콩트-스퐁빌 지음 | 생각의나무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앙드레 콩트-스퐁빌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8월 / 431쪽 / 18,000원
제1부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제1장 윤리의 복귀윤리의 복귀
1960~1970년대에는 모든 것이 정치였다. 모든 것이 정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 모든 것이었다. 그 때는 좋은 정치가 유일하게 필요한 윤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윤리가 전부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윤리를 갖추었다면 대체로 만족할 만한 정치로 여긴다. 그러나 이 두 세대 모두에게 실수가 있다. 30년 혹은 35년 전에 정치가 윤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건 명백히 실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윤리가 - 이것이 ‘인권’이나 ‘인도주의적 행동’ 등 어떤 명칭으로 불리건 간에 - 정치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거나, 그렇게 믿도록 방임하는 건 또 다른 실수다.
윤리와 정치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이고, 그 둘은 모두 필요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것들이 각각 갖는 본질적인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며 그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 두 가지가 필요하지만, 그 둘에 차이도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로 환원되지 않는 윤리가 필요하고, 그리고 윤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들의 공동운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 - 이것이 정치의 진정한 기능이다 - 하려는 마음을 차츰 잃어가고 있고 그와 함께 윤리적 가치들의 영향력 이 폐쇄된 채 머무르려 한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기권율이 높아지고 극단적 정치성향을 갖는 정당에 대한 지지율은 끊임없이 증가한다. 이로 인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병들어가고 우리 사회 전체에 불안한 징후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윤리의 세대’는 어느 정도 유효하고 실용적인 돌파구를 찾지 못해 결국 한계에 도달함으로써 결국 종말에 이르고 이제 새롭게 영적 세대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가정은 다음과 같다. 정치가 가장 우선인 세대(68년 세대)를 지나, 윤리가 가장 우선인 세대 혹은 인도주의가 가장 우선인 세대(‘윤리의 세대’) 이후에, 우리가 ‘영적靈的 세대’, 즉 우리가 수십 년 전부터 폐기된 것이라 믿었던 영적 물음을 다시금 자신의 물음으로 삼으려는 세대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물음이란 무엇인가? 극단적으로 도식화하면, 정치적 물음이란 공평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물음이다. 윤리적 물음이란 선과 악에 대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다. 영적 물음이란 오늘날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미에 대한 물음이며, 따라서 무의미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빈민 구제 활동을 펼쳐온 피에르 신부는 윤리적 인물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정반대의 경우다.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큰 사랑을 받지만 티베트 권리의 수호자(즉, 인도주의적 인물)로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피에르 신부에서 달라이 라마로 옮겨 가는 것은 단지 한 명의 경건한 인물에서 다른 한 명의 경건한 인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물음에서 다른 물음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물음(“당신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입니까?”)에서 본질적으로 영적인 물음(“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옮겨가는 것이다. 정치적 물음과 윤리적 물음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 오늘날에는 영적 물음이 지난 수십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종교로부터 더욱 멀어져 가고 있고 종교는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종교가 존재할 때 윤리는 2차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종교가 없어질 때는 윤리적 물음이 최상위 층으로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물음에 신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을 때, 우리가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30세기 동안 인간 사회가 오늘날처럼 탈종교화된 때는 결코 없었고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윤리를 더욱더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의 ‘승리’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붕괴를 가리켜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불렀다. 나는 이 표현에서 상당한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어떤 두 체제가 서로 경합할 때, 아무도 한 체제가 붕괴했다고 해서 다른 체제가 승리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공산주의‧집단주의‧전체주의를 절대악으로 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결론은 명백했다. 즉, 자본주의는 절대악과 대조하여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 즉, 차이에 의해, 대립에 의해 - 성립되는 정당화였지만 어쨌든 정당한 것으로 통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소련에 비해 서구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 우리 문명의 빛나는 영광을 대조적으로 부각시켜줄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그 안에는 위험한 독이 들어 있다. 그것은 역사의 적(공산주의)을 잃고 있는 동시에, 이와 함께 (공산주의가 마치 선물처럼 쟁반 위에 올려놓아 제공해주던) 정당성도 잃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는데, 승리를 거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본주의는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탱해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기능하기 위해서 는 의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은 의미를 필요로 한다. 문명도 의미를 필요로 한다. 서구사회가 이 세계에 제시할 만한 무언가를 여전히 갖고 있을까? 서구사회가 자신의 가치들을 수호할 만큼 그 가치들을 충분히 믿고 있을까? 혹은 그 가치들을 스스로 실천할 능력이 없는 서구사회는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 - 그러니까 죽음을 기다리며 비즈니스를 하는 것 -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공산주의가 마치 선물처럼 제공해주었던 정당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사회는 직접적인 정당성을 우리 사회의 몇 가지 가치와 사상들에서, 그러니까 윤리에서 찾아야 한다.
‘기업윤리’의 유행
윤리의 복귀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을 근본적인 물음이고, 이에 대한 대답을 토대로 우리의 문명은 최소한 자신의 운명의 한 부분을 헤쳐 나갈 것이다. 따라서 윤리의 복귀는 단순히 하나의 유행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것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최근 일고 있는 기업윤리의 유행은 윤리의 복귀의 기업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윤리가 기업의 내부 분위기를 개선하고, 이로 인해 생산성이 높아진다. 윤리가 상품과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이고 매출을 향상시킨다. 윤리가 대가를 지불해준다고 해서 마케팅marketing과 윤리ethique 사이의 이상한 사랑을 통해 태어난 이 아이를 가리켜 마케티크marketique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고 학교에서는 ‘기업윤리 경영’이라는 과목까지 개설되었다.
윤리 경영의 핵심은 “윤리는 이윤의 원천이다”라고 표현되곤 하는데 내가 이 표현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덕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현상이 아마 처음으로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는 어떤 윤리적 가치도 갖지 않는다. 어떤 행위가 윤리적일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각자 아는 것처럼 그 행위가 이해관계를 떠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제행위는 이익을 쫓아 이루어진다.
그런데 윤리가 이윤의 원천이라면, 그 이윤을 창출하는 일에서 윤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이윤을 창출하는 일은 경영의 영역, 마케팅의 영역, 관리의 영역에 속하지, 결코 윤리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 기업윤리의 유행과 관련하여 내가 불안한 것은 이런 식으로 윤리를 모든 영역에서 이용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윤리를 희석시키고 도구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윤리의 그 엄격성과 이해관계를 떠난 진실성의 측면에서 볼 때 윤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윤리가 이윤의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 위험한 점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윤의 원천이 아닌 모든 것을 비윤리적인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를 모든 영역에서 이용하기보다는, 다시 말하면 어디에서도 윤리가 그 고유한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몇몇 영역 - 나는 이 영역들을 구별하여 차원이라고 부를 것이다 - 을 구분하고 싶고, 그리고 가능한 한 가장 명료하게 그 차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경계를 보여주고 싶다.
제2장 경계의 문제와 차원들의 구분1. 기술-과학적 차원(차원1)
첫 번째 차원인 기술-과학적 차원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대립으로 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학문으로서의 ‘생물학은 우리에게 복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복제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이 무조건 가능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기술-과학적 차원에 경계를 그어야 한다. 기술-과학적 차원은 자신의 가능한 영역 내에서도, 넘어서지 말아야 할 경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바깥에서 이 차원에 경계를 그어야 한다. 경제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시장, 그리고 시장법칙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2. 법-정치적 차원(차원2)
오늘날 우리에게 기술적으로 가능한 복제나 유전자 조작을 시행할 권한이 있는가에 대해서 무엇이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입법부다. 두 번째 차원인 법-정치적 차원은 합법적인 것과 합법적이지 않은 것의 대립으로 구조화되어 있지만, 첫 번째 차원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경계를 긋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차원인 윤리의 차원이 그 바깥에서 경계를 그어야 한다. 법적으로 옳은 것(합법적인 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옳은 것(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법을 지키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심술궂으며, 이기적이고, 마음속에 증오와 경멸을 가득 담고 있는 냉혹하고 사악한 법률주의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 번째 차원인 윤리의 차원이 그 바깥에서 경계를 그어야 한다.
3. 윤리의 차원(차원3)
윤리의 차원은 선과 악,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사이의 대립으로 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런데 윤리의 차원은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윤리적이라고 해도 그다지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윤리적으로 해야 할 일만 다하는 개인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그런 사람이다. 그가 악한이 아닌 것은 명백하지만 그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4. 가치의 차원(차원4)
나는 의무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킬 때 ‘윤리’라는 말을, 사랑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킬 때 ‘가치’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인 사랑은 윤리의 차원을 보완하여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끈다. 네 번째 차원(가치의 차원, 사랑의 차원)은 윤리의 차원에 경계를 긋기보다 윤리의 차원에 무언가를 첨가하고, 윤리의 차원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위의 네 차원들을 동시에 필요로 한다. 어떤 한 가지 차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 사랑의 차원에 경계를 긋기 위해서건 아니면 거기에 무언가를 더 보충하기 위해서건, 신앙인이라면 초현실적 차원(신의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차원, 즉 사랑의 차원 위에 존재하고 그 차원에 정합성을 부여하게 될 다섯 번째 차원을 완전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자본주의가 윤리적이라고 주장하거나 자본주의가 윤리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경제학-기술-과학적 차원인) 차원1이 내재적으로 (윤리의 차원인) 차원3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런 주장은 그 차원들이 각각 갖고 있는 내적 구조로 인해,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진리일 수 있는 것과 진리일 수 없는 것의 대립이 선과 악의 대립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윤리를 갖고 있지 않다. 기술도 윤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과학인 동시에 기술인 경제학이 윤리를 가져야 할까? 계산에는 윤리가 없고, 물리학에도 윤리가 없고, 기상학에도 윤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경제학에는 윤리가 있기를 바라는가?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에 윤리가 있기를 바라는 이유를 잘 안다. “계산은 수와 관련 있습니다. 물리학은 입자와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은 인간과 관련 있습니다!” 경제학이 인간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학은 그 인간들 중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심지어는 그 인간들을 모두 합한 집단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세상 사람이 모두 경제가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경기침체를 결코 충분하게 막을 수는 없다. 세상 사람이 모두 번영을 바란다고 해서 가난을 충분하게 막을 수는 없다. 경제학에게는 의지도 양심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윤리적일 수 있을까?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경제는 개인의 차원과 기업의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나 세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생산활동, 소비활동, 물질적 재산 - 상품이나 서비스 - 의 교환활동 모두와 관련된다.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순응하는 경제다.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윤리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다. 상품의 가치를 만드는 것은 덕이 아니라 작업이다. 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시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이지 않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는 - 완전하게, 근본적으로, 결정적으로 - 윤리와 관련성이 없다.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합리적 측면 그리고 자본주의의 윤리와의 비관련성이, 이른바 ‘과학적’이라고 자칭하던 사회주의의 이성적이고 초월적인 윤리성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목적은 경제를 윤리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차원1이 궁극적으로 차원3에 종속되기를 바랐다. 그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성공하려면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공동의 이익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공동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했다. 개인의 윤리를 통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공산주의는 사상 주입 등 강압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변형시키고자 했고 결국 전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에 윤리를 도입함으로써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게 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이상은 전체주의의 공포로 옮겨갔고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기발한 면은 개인들에게 현재 모습에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모든 주체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며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는 윤리적이지도 비윤리적이지도 않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부를 창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더 나은 경제시스템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이다. 자본주의를 하나의 윤리로 만들려는 것은 시장을 하나의 종교로, 기업을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려는 것과 같다. 만일 시장이 종교가 된다면,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게 될 나쁜 일 중에서 가장 나쁜 일, 황금송아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재 중에서도 가장 우스꽝스런 독재, 부의 독재가 될 것이다.
역사는 인격체가 아니며, 따라서 역사는 의지를 결여하고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개인이 의지를 갖기를 포기하고 행동하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경제학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경제학은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의지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목적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적 주체인 우리는 과정일 뿐인 경제학이 윤리적으로 되기를 희망하지 않고서도, 우리 자신이 윤리적으로 될 수는 있다. 따라서 윤리적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본주의에 법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외부적 한계를 설정하여 단점을 보완하고, 개인으로서 우리들 자신이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