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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오판

토머스 J. 크라우프웰, 윌리엄 펠프스 지음 | 말글빛냄
대통령의 오판

토머스 J. 크라우프웰 지음

말글빛냄 / 2010년 8월 / 434쪽 / 29,000원



출항금지법 : 토머스 제퍼슨




1807년 6월 22일, 미국의 군함 체사피크호가 버지니아 주 노퍽 항에서 막 출항했을 때, 이 배를 지휘하던 제임스 배런 제독은 근처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선들 중 한 척인 레오파드 호가 옆으로 따라붙고 있음을 발견했다. 레오파드 호는 체사파크 호에 바짝 붙어 40마일을 따라오다가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더니 체사피크 호의 항로를 가로막았다. 두 배가 모두 정지했을 때 레오파드 호에서 작은 배 한 척을 내려 보냈고 그 안에는 장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체사피크 호에 오른 영국군 장교는 배런 제독에게, 영국 해군 측에서 몇 명의 탈영병이 이 배에 선원으로 숨어들었다고 의심하고 있으니 수색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분개한 배런은 그런 일은 허가해줄 수는 없다며 거절했고, 영국 장교는 다시 배를 타고 레오파드 호로 돌아갔다.

몇 분 후 레오파드 호의 포문이 열리며 대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15분 동안 체사피크 호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3명이 사망했고, 배런 제독을 포함해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배런은 결국 항복했고, 영국 장교가 다시 체사피크 호로 올라와 4명의 미 해군을 영국인이라며 주장하며 데려갔다.

전시에 영국 국민들이 해군에 징집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토머스 제퍼슨 정부의 국무장관이자 차기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은 1806년, 영국이 2,273명의 미국 시민을 영국 해군으로 강제징집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영국은, 군복무를 피하기 위해 탈영하고 미국 상선의 선원이 된 영국인들을 되찾은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을 입증하기는 어려웠다. 미국과 영국 선원들은 생김새도 비슷하고 사용하는 언어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나라의 갈등 요인은 강제징집뿐만이 아니었다.

골치 아픈 외교 문제

1792년부터 1815년까지 프랑스와 영국 양국은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있었다. 1799년 나폴레옹 이 프랑스에서 정권을 잡았을 때 나폴레옹에게 완강히 맞서는 유럽 국가는 영국뿐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 대륙을 장악해감에 따라, 영국인들은 프랑스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프랑스와 영국이 나일 강에서 카리브 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걸쳐 계속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양국과 정상적인 외교 관계가 지속되길 원했다. 미국 경제는 프랑스와 영국으로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 생산품이 영국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았고 마찬가지로 영국도 미국 생산품이 프랑스로 가는 걸 원치 않았다. 두 나라는 공해(公海)상에서 미국 선박을 세워 화물을 압수하고 때로는 배까지 빼앗았다. 1801년 3월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자 이 골치 아픈 외교 문제는 제퍼슨의 몫이 되었다. 영국의 레오파드 호가 미국의 체사피크 호를 공격하자 제퍼슨은 영국에게서 받은 피해와 부당한 대우에 대해 보복하고 미국이 떠오르는 강대국임을 세계에 입증하기 위해 전쟁에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피해 방지

제퍼슨 대통령이 전쟁이라는 선택권에 무게를 싣고 있던 1807년 여름, 바다에는 약 2,500척의 미국 선박이 항해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일하는 미국 선원 약 3만 명, 화물로 실려 있는 상품의 가치는 약 1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 선박과 그 안에 실린 화물들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만일 미국이 영국과 전쟁에 나설 경우, 그 모든 선박은 영국 해군의 표적이 되어 상당수가 억류되거나 파괴되고 미국 상인들과 해운업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될 터였다.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제퍼슨은 많은 조언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쟁 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 대신 그는 게릴라식 전략을 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의 모든 선박이 귀환한 후 미 해군을 보내 때때로 영국 상선들을 급습하는 방식이었다. 영국령 캐나다에도 미국의 공격부대를 보낼 계획이었다. 제퍼슨은 이렇게 게릴라식 전략을 사용하면 영국이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하고, 미국 상선들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고, 미국인들이 특히 싫어하는 관행, 즉 미국 선원들을 영국 국민이라며 붙잡아 가는 일을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전면전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 구상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시 무적에 가까운 영국 해군에 맞서는 것을 미 의회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1807년 12월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던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들려온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마침내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미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상대국이 미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상대국의 미국과의 무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행위가 점점 늘어났다. 이로 인해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미국 경제가 불안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들 중에서 먼저 영국 세관을 통과하지 않은 배를 모두 막았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탈영하여 외국 선박에서 일하는 영국 국민들을 “되찾는” 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밀고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영국의 지시를 따르는 모든 배는 “국적을 상실”했다고 간주하고 상품을 싣고 영국으로 가거나 영국에서 나오는 모든 미국 선박을 공격하고 압수하겠다고 선포했다.

미국 선박에 대한 두 국가의 위협은 제퍼슨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제 제퍼슨 앞에는 세 가지 선택이 놓여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에 따르거나, 둘 중 한 국가 혹은 양국 모두와 전쟁을 벌이거나, 미국 선박에 대해 전면적인 출항금지법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제퍼슨의 친구이자 차기 대통령이 되는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이 해외 수출을 중단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상선들에 대한 그들의 방침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퍼슨은 매디슨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경우 경제적인 혼란이 발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출항금지가 “더 큰 악으로부터 미국을 지키기 위한 일시적인 필요 악”이라고 생각했다.

내각의 동의를 얻은 후 제퍼슨은 모든 미국 선박들이 미국 항구를 떠나 해외에서 무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출항금지법의 인가를 의회에 요청했다. 출항지법은 1807년 12월 22일 거의 아무런 논쟁 없이 통과되었다. 제퍼슨은 해외로 나가는 모든 미국 상선을 막는 일이 “미국의 배와 선원들의 피해를 방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제퍼슨은 미국 경제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말았다. 농민들은 남는 옥수수가루나 밀가루를 해외에 팔 수 없게 되고, 선박 소유주들은 배를 정박시켜둔 채 속수무책으로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고, 항만근로자들은 하역할 화물이 없어 일거리를 잃게 되었고, 부둣가 선술집은 손님들을 잃게 되는 등 모두가 타격을 입었다. 출항금지법으로 인해 3만 명의 미국 선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포츠머스, 뉴햄프셔, 사바나, 조지아 등 모든 주요 항구도시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부두에는 양털, 탄산칼륨, 밀가루, 소금에 절인 고기, 럼주 등 미국산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장이라도 유럽 시장으로 보낼 준비가 된 상품들이었지만 보낼 방법이 없었다. 부산하던 부둣가에는 인적이 끊겼다. 상인들과 보험업자들로 북적거리던 카페들도 조용해졌다. 보스턴이나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의 고급 저택에 사는 부유한 상업가들도 거의 하룻밤 사이에 재산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제적 부담을 참기 힘들어 점차 출항금지법을 어기기 시작했다.

출항금지법 반대 열기

출항금지법 시행 전에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 상인들과 만족스럽게 거래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미국에서 들여올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다른 곳에서 구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에게는 유럽의 거의 전 지역이 슈퍼마켓과도 같았고, 영국 해군이 바다를 지키는 한 영국 상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물품을 수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퍼슨은 미국 출항금지법의 피해를 특히 입기 쉬운 지역이 한 곳 있다고 예상했다. 바로 서인도제도의 영국 식민지였다. 수십 년간 카리브 해의 식민지 주민들은 밀가루, 소금에 절인 고기, 그 밖의 다른 식량들을 미국에서 정기적으로 들여왔다. 서인도제도로의 공급이 갑자기 차단되면 주민들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제퍼슨이 생각하기에 영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미국의 중립성을 존중하기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속이 이루어지면 미국 생산품이 다시 공급되어 서인도제도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제퍼슨은 미국 밀수업자들에 의한 “누출”을 예상하지 못했다. 1807년 12월말 출항금지법 소식이 서인도제도에 전해지자 섬 주민들은 겁에 질려 식량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출항금지법 시행 전에 8.25달러였던 밀가루 한 통 가격은 40달러로 치솟았고 옥수수가루와 소금 가격도 거의 비슷하게 올랐다. 그러나 미국의 밀수업자들 덕분에 서인도제도의 공황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1808년 1월과 2월 밀수업자들은 배에 식량을 가득 싣고 서인도제도로 가서 엄청나게 높은 가격에 팔았다.

출항금지법의 집행을 위해 제퍼슨은 4대의 미국 군함에 지시를 내려 서인도제도로 가는 항로들을 순찰하게 했다. 밀수업자들은 미국 군함을 피해 서인도제도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유럽으로까지 물품을 실어 날랐지만 출항금지로 인한 경제 불황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분노한 국민들은 주요 항구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제퍼슨은 미국인들이 출항금지법으로 인한 어떤 경제적 어려움도 애국심으로 참고 견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항금지법으로 인해 가장 고통받은 농민들, 제조업자들, 선박 소유주들, 상인들, 선원들은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이 모두 제퍼슨의 탓이라고 비난했고, 출항금지법이 자신들의 개인적 성공을 망치는 연방정부의 고압적인 간섭으로 여겨졌다.

출항금지법이 시행된 후 15개월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경제적 곤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제퍼슨이 기대했던 양보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다. 출항금지법은 오히려 미국 경제의 목을 조였다. 국고 수입이 줄어들고,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고, 수많은 명문 가문과 개인사업자들이 몰락했다. 출항금지법 시행 전 미국 연간 수익의 5퍼센트를 벌어들이던 항구도시 세일럼에는 1808년 중반 극빈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열렸고 약 1,200명의 굶주린 남녀와 아이들이 날마다 이곳에서 끼니를 때웠다. 또한 출항금지법은 의도하지 않게 밀수를 부추김으로써 새로운 부류의 범죄자들을 양산했다.



결국 출항금지법은 미국을 경제 불황에 빠뜨리기만 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영국이 미국선원들을 강제구인하고 선박과 화물을 압류함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 사이에 벌어진 분쟁은 출항금지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1808년 11월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자, 모든 사람들이 출항금지법을 국가적인 웃음거리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제퍼슨이 퇴임하기 3일 전인 1809년 3월 1일, 의회는 마침내 출항금지법의 폐지를 결정했다. 마침내 백악관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65세의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다. “사슬에서 풀려난 죄수도, 권력이라는 족쇄를 벗어버리게 된 나만큼 후련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너스 군대 : 허버트 후버



“왼쪽을 보지 마라!”

1932년, 대공황이 3년째 이어지면서 1,500만~1,700만 명의 미국인이 실직 상태에 있었다. 1932년 9월 《포춘》지의 추정에 따르면, 3,400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인구의 약 28%)이 전혀 소득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이 수치에 1,100만 농가는 포함되지 않았다). 2백만 명의 미국인이 집 없는 방랑 생활을 했고, 그들 중 대다수가 소작인이나 땅을 잃은 농민, 혹은 직장을 잃고 더 이상 집세도 내지 못하는 중하류층이었다. 또한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영양실조를 겪고 또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진료를 받지 못해 건강에 손상을 입었는지는 추정이 불가능하다.

후버 대통령도 이러한 위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연방정부의 직접적인 재정 원조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에게 조언을 준 사람들도 그의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해줬을 뿐이다. 전임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미국이 사업가의 나라이므로 사업가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의 거물 헨리 포드는 정부가 실업보험금을 지급하기 시작하면 게으른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 실러스 스트론은 “실업수당”이 미국의 진취력과 의욕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트론은 “실업수당을 지급하면 미국은 내리막길로 질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후버는 이들의 말을 믿었고, 민주당 의회가 20억 달러 재정 지원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를 기각했다.

1932년 봄 보너스 군대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 약 2만 명이 워싱턴에 왔을 때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도 대통령의 이러한 생각은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회는 좀 더 수용적이었다. 6월 15일, 하원은 그들에게 약속된 보너스를 즉시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상원으로 전달되었고, 6월 17일 상원의원들이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을 때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1만 명의 참전용사들과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몇 시간의 기다림 끝에, 보너스 군대의 대표 월터 워터스는 62대 18이라는 투표 결과로 법안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워터스는 “아메리카를 부르며 임시 숙소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모여 있던 1만 명은 그의 말을 따랐다.

참담한 결과에 실망하여 가두행진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고도 후버 대통령은 이 수천 명이 평화적이고 애국적인 미국 시민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보너스 군대가 빈곤한 참전용사들이 아니라 볼셰비키식 혁명을 모의하는 좌파 공산주의 운동가들 집단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판자촌에는 미시간 주 출신 존 페이스가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페이스가 보너스 군대를 혁명 군대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가두행진 참가자들은 판자촌에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시인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쫓아냈고, 공산주의 전단이나 문헌은 모두 폐기했다. 그리고 참전용사들은 자신들이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군대에서 쓰던 구호인 “똑바로! - 왼쪽을 보지마라!”를 외치곤 했다.

낯선 이들의 친절

이날 오후 국회의사당을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아나코스티아강 건너 메릴랜드 주에 있는 가장 큰 판자촌으로 돌아갔다. 한 신문은 참전용사들의 주거를 “낡은 판자에 누더기 천을 고정시키고 포장용 상자로 받친 천막집”이라고 묘사했다. 몇몇 천막집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한 짚 매트가 있었는데, 이 매트는 관할 지역인 컬럼비아 경찰서장 펠럼 글래스포드가 선물한 것이었다. 판자촌 안에는 어디에나 빛바랜 미국 국기가 걸려 있었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로서 정부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 수도로 온 사람들이었다.

국회의사당에서 세 블록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는 한때 창고로 사용되었던 붉은 벽돌 건물들과 낡은 회사 건물들이 버려져 있었는데, 이곳은 약 1,000명의 참전용사와 가족들에게 조금 더 편한 주거지가 되었다. 글래스포드 서장은 불법 거주자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글래스포드는 그들의 불법 거주를 눈감아주었다. 물론 이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도 필요했다. 워싱턴의 한 빵집 주인은 매일 빵 백 개를 무료로 제공해주었다. 또 다른 빵집 주인은 파이 천 개를 보냈다. 워싱턴 경찰도 이들을 측은히 여겨 커피와 빵, 스튜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참전용사 가족들은 이런 무료 급식을 받으러 워싱턴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13년 후에 받기로 되어 있는 보너스를 즉시 지급하라고 정부에 요구하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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