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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읽어주는 남자

박근형 지음 | 명진출판
중국 읽어주는 남자

박근형 지음

명진출판 / 2010년 6월 / 256쪽 / 14,000원



새로운 프레임으로 들여다보기



중국인은 시공간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시공간 개념: 한국인과 중국인은 시공간 개념이 다르다. 달라도 아주 확실하게 다르다. 서울에서 일 년 동안 교환교수로 근무하던 중국인 선생님이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중문과 학생들과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 내일은 뭐 하실 거예요?" "내일은 오랜만에 부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차 한잔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바로 서울로 돌아오려고요." 친구와 차 한잔 하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 온다고?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교수님, 그럼 내일 뭐 타고 부산에 가실 거예요?" "고속버스 타고 갔다 오려고요."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버스 타면 피곤하니까 비행기 타고 다녀오세요. 아, 그보다는 KTX가 낫겠네요." 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그 중국인 교수님은 빙그레 웃었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에게 하루 동안 서울과 부산을 버스로 왕복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상하이에서 우루무치까지 7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사흘이나 걸리는 시간이다. 또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까지 4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이틀이 걸리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96배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중국이 한국의 30배 정도 넓어 보이지만,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중국 땅은 대한민국의 96배이다.

관광차 한국에 한 번 다녀왔다는 중국인을 만났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국은 너희보다 100배는 더 넓어." 우리 입장에서 기분은 나쁘지만 사실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벌판을 한번 달려보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큰 우물 안의 개구리들: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는 가장 많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그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존재한다. 비율로 따지면 작은 숫자이지만, 절대수로 따지면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바로 이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그리고 13억 인구는 곧 넓은 시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1978년 이후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을 때 다른 나라의 자본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13억 명에게 손수건 하나씩만 팔아도 그 이윤이 얼마야?" 사실 이것은 단순한 계산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외국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지구 안에서만 보면, 중국이라는 곳은 분명히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곳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시장이다. 중국인 스스로도 '우리나라는 넓다'고 생각한다. 이 말 자체는 맞지만, 바로 이것이 함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는 큰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야.'

우물이 너무 넓어서 그 속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아니라 바다에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우물은 우물일 뿐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중국인은 자기 나라가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사는 편이다. 그래서 중국인 중에는 평생 한 번도 바다를 직접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성(省)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죽는 사람도 많다. 사실 중국인은 바다를 모른다. 산둥 성, 푸젠 성, 광둥 성 사람이라도 어부가 아니면 바다를 잘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명태와 고등어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선을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밀물과 썰물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자기 나라가 너무 크니까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전에 비해 외국에 드나드는 중국인이 많아졌지만, 인구 전체의 비율을 보면 적은 숫자에 해당한다.

중국은 땅이 넓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참으로 비좁게 산다. 중국 면적이 대한민국의 96배인 만큼 인구도 우리보다 20배 가량인 13억 명이 넘는다. 실제 인구는 15억 명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중국을 절반으로 나눴을 때 서쪽 지역은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 대부분이다. 그곳은 물이 없는 초원이거나 사막 또는 고산지대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무리 넓어도 실제 적정 인구가 2,000만 명인 것처럼, 중국의 서쪽 지역은 사람이 많지 않다. 내몽골 역시 사람이 별로 없다. 이렇게 따지면 전 국토의 40퍼센트를 제외한 60퍼센트의 면적에서 13억의 인구가 살아야 한다. 중국이 넓은 나라인 것은 맞지만, 인구와 면적 비율로 따져보면 좁은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1898년, 우리나라 총 인구수는 520만 명이었다. 이 인구가 남북한 합친 면적에서 살았으니까,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비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면적의 절대적 수치는 크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구수를 따져보면 결코 땅덩어리 넓은 나라라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좁은 공간에 잘 적응하고 산다.

냉철함은 없으나 자존심이 강한 중국 젊은이들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중국에서 텔레비전을 틀면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56개 다민족 국가. 56개의 다른 민족이 모였지만, 우리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도 함정이다. 중국인의 92퍼센트가 한족이기 때문이다. 다른 55개 민족은 들러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의 정치체제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조는 모든 것이 이중구조이다. 예를 들어 시마다 시장이 있다. 그러나 실권은 시의 당위원회 서기가 갖고 있다. 자치구도 마찬가지다.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을 ' 민족자치구'라 말하고, 자치구보다 작은 지역은 ' 민족자치주'라고 말한다. 티베트는 '티베트 민족자치구'이고, 조선족은 '조선족 민족자치주'이다.

자치구에도 주석이 있는데, 주석 자리는 모두 소수민족이 차지한다. 그러나 실권은 자치구의 당위원회 서기에게 있으며, 이 서기라는 직책은 반드시 한족이 맡는다. 절대로 해당 소수민족에게 서기 자리를 주지 않는다. 나는 중국의 한족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56개 민족이 평등하다면, 왜 티베트 사람은 국가주석이 될 수 없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될 수 없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격에 대해 엄밀히 말하자면 결코 다민족이 평등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은 92퍼센트의 한족이 8퍼센트의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나라이다. 또한 8퍼센트의 소수민족에게는 결코 힘을 나눠주지도, 실어주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소수민족의 젊은이들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채 한족에 동화되고 있다.사실 나는 그들에게 많이 실망했다. 특히 공부하는 젊은 지식인들이 냉철함이 결여된 주관적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주관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런 젊은이들이 많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런 젊은이들이 많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젊은이들이 냉철해야 그 나라의 미래는 비전이 있다. 오늘날 세계무대 속에서 예전과 달리 점점 구겨지고 있는 일본을 보라.

인문학적 프레임으로 본 중국 경제



"누구든지 먼저 부자가 돼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공산주의 이론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제문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피난을 갔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겨둔 채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이 시점부터 마오쩌둥이 중국 전체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은 뛰어난 시인이면서 역사학자이고, 사상가이자 병법의 대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몽상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천재성은 있으나 몽상가였던 한 지도자의 망상이 결국 나라 전체를 지옥으로 빠뜨린 것이다.

그는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투쟁을 부추겼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한지의 여부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이었다. 그 기준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풍토를 조장했으며, 그 결과 매일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으면 지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 농촌은 기존의 경제력을 거의 상실했다. 생각해보라.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얻어내야만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해야 할 사람들이 사상투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근로의욕도 없고 생산성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시의 경제력이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서도 사상투쟁은 계속되었다. 기존의 사업가들도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구타 끝에 죽는 사람도 많았고, 수치심을 못 이긴 수많은 자본가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이렇게 도시에서도 기존의 경제력은 활력을 잃었다. 1952년까지 중국은 이렇게 돌아갔다. 일종의 '사상 청소 기간'이었던 셈이다. 1953~1957년에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실행했고 이것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이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행했고, 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에 중국의 서기경제가 너무 엉망이어서 목표수치를 낮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농민들을 공산주의 이념에 합당한 '합작사'라는 협동조합 형태로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순차적으로 실행되었다.

첫 단계는 '호조조'였다. 농촌을 6~7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으로 출자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는 방식이었다. 이 호조조를 어느 정도 정착시킨 뒤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킨 형태가 '초급합작사'였다. 농촌을 30~50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출자하고 공동노동을 하는 생산방식이었다. 각 농가는 토지도 이 합작사에 출자했지만, 헌납한 경지에 대한 권리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섞여 있는 계약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합작사는 초급 형태이다. 이제 공산주의적 요소가 강한 고급 형태로 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1955년부터 중국 정부는 '토지별 배당'을 줄이고 '노동 배당'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제 기존에 얼마나 많은 땅을 갖고 있었는지에 상관없이 200~300가구를 묶어 같이 노동해서 할당량을 채우고, 합작사에 저축도 한 뒤에 자기 몫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고급합작사'이다. 그러나 고급합작사도 자본주의 요소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농민은 자신이 합작사에 헌납한 토지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자류지(自留地)'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이 '자류지' 개념이다. 사람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다. 공동으로 경작하는 땅보다 자기 땅에서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고급합작사는 자류지가 합작사 전체토지의 5퍼센트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농민들은 자류지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

도시에서는 기존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단위(單位)'로 묶었다. 단위라는 말은 한국어와 중국어가 한자는 같지만 뜻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하는데, 중국어에서 단위는 육아와 의료 및 기본적인 사회보장까지 모두 책임지는 직장을 뜻한다. 농민들은 자류지에 곡물보다 몇 배 비싸게 팔 수 있는 채소를 재배했다. 1956년 농촌 수입의 무려 20~30퍼센트가 이 자류지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통계조사가 나왔다. 중국농민들은 모든 돼지 가운데 83퍼센트를 자류지에서 나오는 채소의 잉여수익으로 사료와 채소 찌꺼기를 구입해서 사육했다. 닭과 오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축은 다시 귀중한 거름을 생산해서 자류지의 과일과 채소 수확량을 더욱 늘려줬다. 1956년과 1957년에 농민들은 1950년대 초반보다 더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공업노동자들은 자류지에서 생산한 돼지와 닭, 오리, 달걀 들을 사먹었다. 전체 생산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는 공산당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부가 나서서 농촌에 사적 생산을 증가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부자 농업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사는 세상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악착같이 잘 잡아서 뭔가 이뤄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의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악착스런 사람들이 기회를 잡으며 치고 올라와서 부유한 농민계급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계급을 없애자는 것이 공산주의혁명이었는데, 농촌에서 새로운 부유계급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대응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인민공사(人民公社)'였다.

중국 전역에 있는 합작사 740만 개를 인민공사 2만 6,000개로 통합했다. 인민공사는 모든 농민이 군대식으로 움직이고, 농촌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조직이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 고급합작사를 극복한 진정한 공산주의 농촌조직으로, 자류지도 없고 평균 5,000가구를 묶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했다. 구성원들 전원이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식사하고 공업, 농업, 상업, 학교, 군대가 하나인 공산주의 공동체, 이것이 '인민공사'이다.

'강철 만들기 운동'으로 경제는 더 피폐해지고: 그런데 곧 만화책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대연강철'이라는 사건이다. 1958년 8월에 중공중앙(중국공산당 핵심 세력들)은 베이다이허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고,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전 당과 전 인민에게 강철 1,070만 톤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한다'는 회의공보(會義公報)를 발표했다. 이 공보를 통해 1958년에 철강 생산량을 1957년(553만 톤)의 두 배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목표가 매우 비현실적인 수라는 것이다. 회의가 있기 전, 중국이 그해에 생산한 철강은 450만 톤에 불과했다. 이는 앞으로 4개월 이내에 철강 620만 톤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 강철 만들기' 열기가 퍼질 수밖에 없었다. 1958년 7월 말 시점에 강철을 만드는 노동력은 몇 십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8월 말쯤 몇 백만 명으로 불어나더니 9월 말에 5,0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0월 말엔 6,000만 명, 1958년 말에는 무료 9,000만 명이 '강철 만들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용광로도 늘어났다. 소형 용광로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7월에 3만개였던 것이 10월 말엔 몇 백만 개에 이를 지경이었다. 또 제철용 초탄이 부족해서 일반 석탄으로 대체했고, 일반 석탄이 부족해지자 나무를 베어 불을 지폈다. 고품질 철광석이 부족해 저품질 철광석으로 대체했고, 저품질 철광석마저 부족해지자 집에서 쓰는 철기그릇까지 다 쏟아부었다.

그 결과 1958년 겨울에 중국은 강철 1,108만 톤과 생철 1,369만 톤을 생산해 목표 초과달성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처럼 무지막지한 생산운동의 대가는 엄청났다. 강철 1,108만 톤 중에서 800톤만 합격품이고 나머지는 불합격이었다. 생철 1,369만 톤 중에선 아무 쓸모 없는 토철이 무려 416만 톤을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사태는 강철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수천만 명이 별 생각 없이 전국의 숲을 마구 없앴고,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생태계 파괴가 일어났다. 오늘날 중국 사막화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들이 '대연강철'이라고 부르는 '무식한' 강철 만들기 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몽상을 계속 밀고 나간 것이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이제 공산주의에 가장 알맞은 인민공사로 전국 농촌을 통합했으니 엄청난 실적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현실에서는 공산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의욕이 떨어지고 생산량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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