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최만립 지음 | 생각의나무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최만립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6월 / 404쪽 / 30,000원
올림픽 유치의 태동
박종규의 올림픽 유치 발상1974년 8월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행사 도중 문세광이 쏜 흉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다. 엄청난 국민적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만 했다. 박종규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 자리에서 올림픽 유치의 가능성과 국운에 미칠 영향에 대해 깊은 교감을 나눈 후 사실상 박대통령으로부터 올림픽 유치 내락을 받게 된다. 당시 올림픽 유치에 소극적이던 김택수가 대한체육회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추진력이 강하고 박대통령의 신임이 여전히 두터웠던 박종규가 1979년 2월 25일에 제25대 대한체육회장 겸 KOC위원장을 겸직하게 된다.
박종규는 대외적으로는 올림픽 유치를 위해 급선무인 스포츠외교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조상호(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를 비롯해 몇몇 스포츠 관계인사와 실무자로는 오지철(당시 대한체육회 국제과장)을 대동하고 1979년 6월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ANOC(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 창립총회 및 IOC 집행위원회에 참석해 각국의 IOC 위원들과 NOC 위원들을 만나 대대적인 스포츠외교를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의 올림픽 유치 재가(裁可)
정부 방침의 확정
1979년 9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① 한국의 경제발전과 국력과시 ② 한국 체육의 국제적 지위 향상③ 스포츠를 통한 세계 각국과의 우호증진 ④ 공산권 및 비동맹국가와의 외교관계 수립 여건 조성 ⑤ 국제적 체육행사를 통한 국민 일체감 제고 등을 올림픽 유치 목적으로 설정하고 이의 구현을 위해 제24회 올림픽(1988년) 서울 유치를 추진함과 아울러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1986년)를 서울올림픽의 예비대회로 추진하도록 하는 결제안건에 서명했다. 이와 함께 후속조치로 전반적인 올림픽 유치 추진계획은 KOC 내에 추진위원회를 두고 계획을 수립 전개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계획 공표
1979년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정상천 서울시장은 박종규(대한체육회회장 겸 KOC 위원장), 김택수(IOC 위원), 정주영(전국경제인연합회장), 박충훈(한국무역협회장), 김영선(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동석한 가운데 국내외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서울시는 이미 1977년부터 1980년대의 올림픽 유치라는 잠정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필요한 운동장(잠실종합운동장), 지하철(당시 지하철 1호선이 이미 개통 운행 중이었음), 도로망 및 각종 숙박시설 등이 이미 30%의 추진 실적을 나타내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면서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서울시에 유치할 계획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10 26사태 이후 다시 깨어난 유치활동
10 26사태로 암초를 만난 유치활동
박종규 KOC 위원장 체제로 종횡무진 달리던 올림픽 유치작업은 1979년 10 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자 암초를 만난다. 소용돌이치던 정국이 안정된 뒤 전두환 장군이 실권을 쥐고 국보위가 들어서면서 박종규 회장과 주관중 상근이사는 퇴진되고 1980년 7월 온건파인 조상호 부회장이 제26대 대한체육회장 겸 KOC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동안 침체 분위기에 있던 올림픽 유치작업은 다시 탄력을 받게 되며 진퇴가 불분명했던 전문위원들을 그대로 유임시켜 새로운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동면에서 깨어난 올림픽 유치활동
정부 방침이 88 올림픽과 86 아시안게임을 동시에 유치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조상호 위원장은 널리 인재를 구해 적극적인 유치활동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UCLA 대학원 출신이자 구미동창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정부의 외자유치활동을 하고 있던 IT분야 중소기업 CEO인 나를 1980년 9월 초 KOC 명예총무로 발탁했다. 그는 나의 미국에서의 경력과 CEO로서의 경영 능력 그리고 국내외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높이 사 올림픽 유치에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스포츠계와의 첫 인연이자 이후 30년간 지속된 스포츠외교의 첫 시발점이었다.
올림픽 유치 방침의 재점검
1980년 8월 27일 전두환 제9대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서울올림픽 유치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로 취임한 이규호 문교부 장관과 조상호 KOC 위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로 서울올림픽 유치가 정부의사로 확정은 되었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하고 국가 운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큰 사업이기 때문에 신임 대통령의 재결심을 받는 것이 순리이므로 '88 올림픽 유치 실현 가능성 및 대책'에 관한 보고서를 재작성해 보고하기로 했다. 이때 나는 김성규 국제국장, 오지철 국제과장, 방광일 참사와 더불어 국제행정 업무를 관장했고 KOC 전문위원실은 올림픽 유치 실무기획업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추진되어 온 업무를 소상히 파악한 뒤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이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70년에 개최될 제6회 아시안게임을 1966년에 유치해 놓고도 재정상 이유로 1968년에 25만 달러의 분담금을 물어주면서까지 반납한 국가적 치욕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올림픽 유치는 물론 적어도 아시안게임은 유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이규호 문교부 장관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규호 장관에게 "AGF(아시아경기연맹: 지금은 OCA로 명칭 변경) 32개 회원국들 중에는 중국과 북한의 영향을 받아 중립적 입장에 서 있던 국가들이 반대쪽으로 돌아서는 듯한 분위기지만 우리가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내놓고 유치활동을 하는 중에 아시아지역의 16표 이상만 획득하면 최소한 아시안게임 유치는 무난한 일입니다"라고 역설했더니 작성된 보고서의 예산을 확 줄여서 다시 가지고 오라고 했다. 나는 배석했던 오지철 국제과장에게 KOC 전문위원들과 다시 상의해 예산을 재조정하도록 지시했다. 이규호 장관은 그 후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고 나에게 서명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잘해 보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결단
IOC에 유치의사 통보 마감일이 불과 3일밖에 남지 않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KOC는 "올림픽 개최는 국가의 대외이미지 개선과 대 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 유치 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는 적극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올림픽 유치의 최종결정은 정부가 검토 판단해야 할 사항이며 서울시의 재정 등 제반여건을 감안할 때 88년 올림픽 개최 시기까지 제반시설을 갖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므로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유치할 수 없다"는 소극적 입장이었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KOC의 적극적 입장에 전적으로 찬동하였고 이 두 의견을 정리하여 직접 대통령에게 문교부 안건으로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사안을 특별한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라고 단호한 결의를 표명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올림픽 유치를 위한 확고한 결단은 그 이듬해인 1981년 9월 30일 올림픽 유치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88 서울올림픽 유치의 성공은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올림픽 유치신청서 작성
유치신청서 정식 제출
KOC로부터 1980년 12월 올림픽 유치의사를 정식 통보받은 IOC는 1980년 12월 15일자 공문으로 올림픽을 치르는 데 필요한 각종 시설 및 기술적 요구사항을 담은 151쪽에 달하는 방대한 설문서를 동봉해 보내왔다. 공문서에는 동봉한 설문지에 대한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답변서와 함께 주최도시의 신청서, KOC의 지원서, 정부의 지원보증서를 첨부한 정식 유치신청서를 1981년 2월 28일까지 IOC 본부에 제출할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또한 IOC가 직접 관장하는 라디오 및 TV 중계권에 관한 설문사항은 추후 통보할 것이며 그 답변서는 1981년 5월까지 추가 제출토록 요구했다.
유치신청서 마무리 작업
1981년 2월 25일에 유치신청서는 영문서 200부, 불문서 100부로 어렵게 완성되었다. 이 유치신청서의 특징은 단순히 IOC의 설문에 답변서를 작성함에 그치지 않고 보고서 첫머리에는 '올림픽 운영방침'을 붙이고 말미에는 올림픽 유치를 위한 국민적 의지를 담은 '결어'로 매듭을 지음으로써 유치신청서를 한 권의 책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보고서를 접한 IOC 위원들로 하여금 놀라움과 함께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숨은 노력까지 기울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 첨부된 공식서한에는 대통령이 서명한 '올림픽 개최 제반보증서', '주최도시 시장의 개최신청서', 주최국 KOC 위원장의 '개최도시 지원확인서'가 첨부되었다.
NOC, IOC 방한 조사단의 서울 평가
IOC 본부에서는 1981년 3월 텔렉스로 IOC와 NOC 조사단의 한국 체류 일정을 포함한 파한 계획을 통보해 왔다. 또한 조사단이 한국에 와서 수행할 임무는 ① 주최시의 현존 스포츠 시설현황 파악 ② 현존의 호텔 수용능력 및 호텔숙박비 수준 점검 ③ 선수촌의 준비계획 현황 ④ 교통편의 문제 ⑤ 언론중계 관련시설 점검 ⑥ 기타 관련 사한에 대한 사전 파악이니 미리 철저히 준비해 달라는 내용의 전문을 잇달아 보내왔다. KOC는 정부와 협의해 올림픽 유치의 범정부적 지원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NOC, IOC 조사단이 잇따라 방문 일정을 통보해 옴으로써 이들의 영접계획을 수립하고 영접팀을 구성하는 등 준비업무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들 대표단은 KOC에서 마련한 영접 계획대로 서울시장, KOC 위원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를 예방했으며 서울의 스포츠시설, 지하철, 세종문화회관, COEX, 태릉선수촌 등을 차례로 시찰했다. 나는 건설과 시설 전문가인 멕시코의 페드로 바스케스 라냐 IOC 위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대회를 치렀던 경험을 상기시키면서 내게 상당히 신빙성 있고 실리적인 충고를 해주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뒤의 유지보수 문제를 생각해 기존 시설을 보수해 쓸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새로 짓는 문제는 심사숙고하라는 것이었다. 실례로 1976년의 제21회 몬트리올 대회는 적자 대회였을 뿐만 아니라 대회 후 상당수의 경기장이 사후 이용률이 적어 황폐화되기까지 하여 캐나다 정부가 골머리를 앓았던 점을 참고하라고 했다.
이외에도 그는 안전과 통신시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워렐 캐나다 IOC 위원은 프레스센터와 언론인 숙소(Press Village) 건설계획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모든 불만은 언론인들에게서 나온다며 언론인들에 대한 편의를 특별히 고려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 밖에도 유스 캠프(Youth Vamp), 경기운영 등 실무적인 질문에 대해 격의 없고 폭넓은 의견교환을 함으로써 IOC 조사단에게 깊은 신뢰감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바덴바덴의 환희
바덴바덴 결전의 준비
1981년 9월 초에 '88 올림픽은 기필코 유치해야 한다'라는 정부의 방침이 이규호 문교부 장관, 노태우 정무 제2장관, 전두환 대통령의 보고 라인의 교감으로 확고히 정립됨에 따라 국무총리실의 실무유치 특별대책반은 국내에서 바덴바덴 유치상황을 점검할 특별상황실을 설치하고 총리실 이흥주 국장이 책임을 맡았다. 이 실무유치 특별대책반은 정무 제2장관실의 지침을 받아 IOC 총회에 파견할 한국 대표단을 관민 합동으로 폭넓게 편성했다.
바덴바덴에서의 유치활동
유치단 중 독자적으로 행동한 김운용은 태권도연맹 총재로서 경기단체 대표자격으로 공식대표단 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우리 대표단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정주영 유치위원장은 바덴바덴에 오기 훨씬 전인 대표단 방한 조사 때부터 KOC 대표단과 유치활동을 같이 해온 터라 KOC 대표단과는 각별히 호흡이 잘 맞았고 특히 통이 크다고 소문난 그는 현대건설 프랑크프르트 지사의 직원을 동원해 미리 저택 한 채를 통째로 임대해 두었는데 이곳이 마치 유치단의 아지트처럼 활용되었고 국내외 IOC 총회 관계 인사들의 은밀한 접대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우리 유치단의 단합과 사기진작을 위한 파티장으로도 몇 차례 활용되었다.
서울 전시관의 폭발적인 인기
바덴바덴은 인구 5만이 채 안 되는 자그마한 휴양도시다. 전시관은 하계올림픽 유치신청 도시인 서울과 나고야, 동계올림픽 유치신청 도시인 캘거리(캐나다), 팔룬(스웨덴), 코티나 담페초(이탈리아) 등 5개 도시가 구철도 역사가 있던 알트 반 호프라는 곳에 약 100제곱미터(30평 정도)의 규모로 배정받아 설계하게 됐다. 우리 측 설계는 조성렬 '큐빅 디자인연구소'소장이 담당했는데 이미 반년 전에 자비로 이곳을 직접 방문해 현지답사를 한 관계로 충분히 구상한 뒤 짜임새 있게 설계할 수 있었다.
9월 22일 오전 11시에 전시관 개막식을 하는 날에는 손기정 씨가 즉석 사인을 해주면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개관 당일에 IOC 위원장, 사무총장을 비롯해 30여 명의 IOC 위원이 다녀가는 성황을 이루었으며 개관 8일 동안에 무려 1만 명 이상이 다녀갔으니 인구 5만이 안 되는 도시의 5분의 1 이상의 인구가 찾아와 구경한 셈이다. 개관 당일에 북한의 김유순 IOC 위원, 김득준 북한 체육지도위원회 부위원장, 정정웅 부총무가 둘러보고 흐뭇해하는 표정이어서 이 모습을 본 우리 실무진들이 피는 물보다 진한가 보다고 수군댄 일도 있었다.
1988년 제24회 올림픽 개최도시 선정 발표
1981년 9월 30일 오후 3시 45분 IOC 총회장에서 올림픽 개최도시의 이름이 호명되기 직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드디어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개표 결과가 든 흰 봉투를 꺼내어"52대 27, 쎄울, 꼬레"라고 우리의 승리를 발표했을 때 우리 대표단들은 조금 낯선 불어 발음 때문에 잠시 주춤한 후 "와!"하는 함성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껴안으며 환호했다. 곧이어 7명의 유치대표단(조상호, 박영수, 정주영, 이원경, 이원홍, 최만립, 전상진)이 단상으로 올라갔고 서울 개최 협약서에 IOC 측과 우리 측의 서명이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서명했던 나로서는 그때의 감격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영광의 뒤풀이
다음날인 10월 1일 오전 8시에 서울시장과 KOC 위원장은 IOC 위원장과 사무총장을 방문해 그동안 협조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을 표하며 그 자리에서 앞으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계속적인 협조와 조언을 부탁했다. 당일 낮 12시부터 14시까지는 서울시장 주최 리셉션을 총회장 내 연회장에서 성대히 치렀다. 한국에서 온 수많은 관계자 전원이 참석한 이 초청연회에는 IOC위원, 각국 NOC 대표 및 언론인 그리고 조직위원회 임직원 등이 초청되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급히 초대해 온 한국밴드의 연주에 맞춰서 KAL 스튜어디스들이 〈서울의 찬가〉를 합창했으며, 참석한 한국인 전원이 아리랑을 합창하는 등 이역만리 땅에서 울려 퍼지는 환희의 열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 유치 후의 나의 KOC 활동
나는 우리나라 IT산업의 선구자적 중소기업인 대한마이크로전자(주)의 CEO인 관계로 KOC의 스포츠외교 활동은 부여받은 직책 그대로 명예직으로 봉사해 왔다. 때문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후에도 보수와 관계되는 IT전업 업무와는 별도로 KOC 소관업무에 전문적으로 관여했다. 나는 내 적성에도 맞고 조국에 봉사한다는 자긍심 때문에 계속해서 KOC 업무에 봉사하다 보니 조상호 위원장 이후 정주영, 노태우, 김종하 그리고 김종렬 위원장의 5대에 걸친 1993년까지 13년 동안 명예총무직을 연속적으로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