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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루공화국의 비극

뢱 폴리에 지음 | 에코리브르
나우루공화국의 비극

뢱 폴리에 지음

에코리브르 / 2010년 5월 / 174쪽 / 9,000원



프롤로그


나우루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곳에 가려고 비행기 표를 끊는 데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나우루라는 나라가 있는 게 확실한가요?" 여행사의 전화 상담원은 이렇게 물어왔다. "네, 네. 나우루요. 그리고 항공사 이름은 '에어 나우루'예요." 나우루로 가는 여정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까지 스물두 시간 비행을 하고 나서도 길게 이어진다. 일단 피지의 수도인 수바까지 가는 데 여섯 시간(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다)이 걸린다. 피지의 국제공항은 비티레부 섬 북서쪽에 있는 난디에 있다. 주 1회밖에 없는 나우루행 비행기는 목요일 새벽 5시 30분에 출발한다.

5시 50분. 에어 나우루의 수속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량한 공항에는 아무런 표지판도 안내도 없었다. 에어 나우루의 보잉 737기는 한 번에 두 가지를 동시에, 그러니까 여객을 태우는 상업 비행과 연계하여 화물까지 수송한다. 이제 여섯 시간에 이르는 또 한 번의 비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난디-타와라(키리바시의 수도)-나우루. 그리고 내 옆자리 승객 같은 사람들은 솔로몬 제도로 가기 위해 두 시간을 더 비행해야 한다. 타와라에서는 고작 30분 머물렀고, 한 시간 반을 더 날아간 뒤에 우리는 나우루에 도착했다. 나우루는 건재했다. 나는 열 살 때 나우루의 존재를 알았다. 당시 나는 지도에서 태평양의 천국 같은 섬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적도 남쪽으로 40km 떨어진 태평양의 한 섬, 그곳 한구석에 외따로 떨어진 곳, 주민 700명의 수도 야렌과 마주쳤다. 그로부터 16년 뒤에 나는 마침내 그곳에 왔다. 야렌, 여행의 종점.

나우루(Nauru). 남위 0℃ 31 59 . 동경 166° 55 0 .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나우루에는 계절이 없고 온도 변화도 거의 없다. 밤에는 섭씨 30도, 낮에는 섭씨 40도. 이번 첫 번째 체류 일정 동안 내 가이드가 되어줄 레시 올슨(Lesi Olsson)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우루는 우선 하나의 도로이다. 단 하나의 도로. 둥그렇게 연안을 따라 섬을 둘러싼 아스팔트 도로 말이다. 그 도로를 일주하는 데 30분 정도 걸렸다. 종려나무들과 하얀 모래, 터키색 바다가 펼쳐진 해안은 흡사 영화의 배경으로 나올 법한 그런 곳이다. 레시는 섬 안쪽 고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로 차를 몰았다. 우리는 안쪽의 호수 쪽으로 300m쯤 더 내려갔는데, 호수의 물빛이 짙었다. 집들 옆에는 초록색의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물 저장고예요." 레시가 설명해주었다. "나우루는 담수화 공장을 가동하고 있지 않아서 다들 빗물을 모아두고 있죠. 오늘 아침에 우리 집 물 저장고의 수위를 봤는데, 거의 남지 않았어요. 앞으로 며칠 사이에 비가 내리길 바랄 뿐이죠. 비가 안 온 지 거의 3주나 돼 간다니까."

레시는 잠시 시빅 센터(Civic Center) 앞에 차를 세웠다. 시빅 센터는 회벽의 흙이 떨어져나간 1970년대식의 낡은 건물로, 나우루 은행 같은 주요 정부기관이 모여 있었다. "은행이 오늘 이례적으로 문을 열었어요. 당신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현금을 많이 인출해두었기를 바래요. 오늘 같은 급여 지급일이 아니라면 은행에는 현금이 없거든요. 나우루인들은 대개 정부에 고용되어 있는데, 사실 몇 달째 월급을 못 받았어요. 정부도 돈이 없는 거죠. 하지만 얼마 전부터 모든 직원에게 정기적으로 급여를 주기 시작했어요." "얼마나요?""보름마다 오스트레일리아 돈으로 140달러씩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금액을 줘요. 대통령이든 가정부든 같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나우루 정부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 중의 하나인 레시도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낚시를 하러 간단다. 몇 주 전부터 기름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나라. 한 푼도 없는 은행. 30년 전만 해도 이 나라는 달러가 차고 넘쳤다. 2005년, 이 섬은 모든 것을 잃고 무너졌다.

1.

나우루 섬의 기원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2005년 나우루의 산업부 장관 프레디 피처(Freddy Pitcher)는 "정말로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의 얼굴 모습을 볼 때 아몬드형의 눈은 아시아인의 얼굴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 조상은 틀림없이 카누를 타고 아시아, 그러니까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에서 왔습니다. 우리의 체격은 통가나 사모아 같은 섬 주민의 체격과 같습니다. 수세기에 걸쳐 이 두 부족이 뒤섞이면서 나우루인이 생겨난 게 틀림없습니다."

19세기 중반 오세아니아는 대영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대영제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비롯한 많은 땅 위에 자신들의 국기인 '유니언 잭'을 내걸며 세계 속에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19세기에 나우루는 여전히 야자나무로 뒤덮인 땅이었다. 유럽인들과 나우루인들은 코프라(Copra)의 값을 흥정하기 시작했는데, 코프라는 코코넛 과육을 말린 것이다. 코코넛은 나우루에선 기본 양식이었지만, 새로운 맛을 찾아나선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점점 더 많은 선박이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 섬으로 찾아왔다.

1896년, 나우루에 정박한 한 선박의 선장 헨리 덴슨(Henry Denson)이 나무가 딱딱하게 굳어 생긴 듯한 이상한 돌 하나를 주웠다. 덴슨은 그 돌을 시드니에 있는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의 본사로 가져갔다. 1899년 어느 날, 역시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에서 일하고 있던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가 그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 그곳에 있는 돌을 보고 놀랐다. 엘리스는 덴슨에게서 그 돌을 빌려가 분석해보았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순도 100%에 가까운 인산염이 검출되었던 것이다. 이런 인산염 발견 이야기 자체는 사실 대단할 것 없지만, 이 발견은 결정적으로 인산염과 나우루인들을 공동의 운명으로 엮어놓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나우루는 1898년 4월 이래로 독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유럽의 열강들은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오세아니아로 진출했고, 이런 식민제국들은 새로운 땅을 놓고 서로 다툼을 벌였다. 그들은 원자재를 필요로 했다. 영국과 막 통일을 이룬 독일은 태평양 지역에서 각자 영향력을 나누어 가졌다. 나우루의 경우는 까다로웠다. 독일은 영국과 합의점을 찾아내 독일계 상사인 얄루이트-게젤샤프트가 나우루의 코프라에 대한 이권을 가져가도록 했다.

인산염은 1907년에 채굴되기 시작했다. 인산염 채굴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로 이름을 바꾼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 독일과 영국의 정부 기관들, 그리고 나우루를 차지하고 있던 얄루이트-게젤샤프트)의 협상은 길고 복잡했다. 영국계인 퍼시픽 아일랜드 컴퍼니는 또 다른 경쟁업체가 뛰어들까봐 인산염 발견 사실을 비밀로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그 바람에 협상이 좀더 복잡해졌다.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는 광산의 독점 개발권을 갖는 대신 매년 얄루이트-게젤샤프트에 돈을 지불했다. 한편 독일 당국은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가 그러모으는 막대한 돈에 비하면 극히 적은 보상금을 나우루의 땅주인들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과 독일 사이의 우호관계는 종말을 맞았다. 나우루에서 2만km나 떨어진 곳에서 전쟁이 시작되던 시기에, 오스트레일리아 군대가 나우루를 침공했다. 그로부터 4년 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고 태평양 지역의 자국 식민지를 잃었다. 나우루는 또다시 '매물'로 나왔다. 나우루를 원하는 국가는 많았다.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나라들은 국가 재건에 나섰고, 자국의 농업도 되살려야 했다.

1920년,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바람대로 만들어진 새로운 '국제연맹'의 결정에 따라 나우루는 대영제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향후 오스트레일리아가 나우루를 관리하긴 했지만, 영국과 뉴질랜드가 맺은 '나우루 섬 협정(1919)'에 따라 세 당사국은 협상의 핵인 인산염의 이권을 서로 나누어 갖기로 했다. 인산염 산업은 현대화되었다. 이제 연간 채굴량은 수십만 톤에 이르렀다. 퍼시픽 포스페이트 컴퍼니의 뒤를 이은 브리티시 포스페이트 커미션은 대영제국 경제를 빛내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광산에서는 수백 명의 중국인 인부들이 곡괭이와 양동이를 들고 고원을 팠으며, 나우루인들도 그러한 광산 개발에 가담했다.

2.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안감 데이(Angam Day)'입니다. '안감 데이'는 나우루 말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날'을 뜻합니다." 키키 토마(Kiki Thoma) 박사가 말했다.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우루는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호령이었고, 섬을 다스리던 그리피스 장군은 지역 주민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했다. 마지막으로 실시한 인구 집계에 따르면 1919년 나우루에 거주한 사람들의 수는 1,068명이었다. 나우루로서는 인구가 1,500명 아래로 내려가면 소멸 위기에 직면하는 셈이었다. 장군은 출산을 장려했고 "이제 1500번째로 태어나는 나우루인의 출생일을 섬 전체가 기념하고 축하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1932년 10월 26일, 나우루는 비로소 안정 단계의 인구수에 도달했다. 바로 그날 태어난 여자아이 에이다루우를 나우루에서는 '안감 베이비'로 삼아 기념했다. 나우루는 구원을 받은 것이었다.

1945년 9월 13일, 그러니까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11일이 지난 뒤 나우루의 일본인들도 항복했다. '안감 베이비' 에이다루우는 살아남지 못했다. 나우루는 자신의 역사를 되찾았다. 섬의 인구는 다시 1,500명의 한계선 밑으로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자 그다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았던 오스트레일리아조차 모든 것을 재건해야 했다. 1919년 체결된 '나우루 섬 협정'은 여전히 인산염 채굴 이권에 관하여 효력을 가졌기 때문에, 브리티시 포스페이트 커미션은 자신의 세 이해관계자, 즉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그리고 영국과 함께 나우루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었다. 나우루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달러가 무슨 색인지도 알지 못했다. 1948년, 나우루인들은 인산염 채굴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그 총수입에서 고작 2%만을 받았다.

해머 드로버트(Hammer Deroburt)는 섬을 떠나 외국에서 유학을 한 최초의 나우루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생활과 젊은 백인 엘리트들과의 만남은 그를 당당한 해머 드로버트로 거듭나게 했다. 해머 드로버트는 나우루 섬의 땅속에 감춰진 보물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몇 가지 확신이 있었고, 조국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우루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러면 나우루인들은 자신들의 섬과 인산염,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것이었다.

1966년, 나우루에 입법 의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몇 달 뒤 입법 의회는 자치정부 수립을 의결했다. 1967년 10월,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독 아래 나우루의 대표자들과 섬을 위임통치하는 이들 간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협정에 따라 이듬해 나우루의 독립이 승인되었다. 브리티시 포스페이트 커미션은 몇 년에 걸쳐 섬에서 철수하는 대신 보상금(당시 오스트레일리아 화폐로 1억 3700만 달러)을 지급받기로 했다. 인산염 산업이 실질적으로 나우루에 이양된 것은 1970년이 되어서였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이 손을 든 셈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나우루에 사는 4,000명의 주민들은 독립을 성대하게 축하했고, 나우루 국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22년 전 트루크 제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나우루로 돌아온 날이 바로 이날이었다.

3.

1968년 초, 나우루는 여전히 영국 연방의 품 안에 있기는 했지만 독립국이 되었다. 당시 약 4,000명의 주민을 가진 나우루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었다. 해머 드로버트는 자연스럽게 나우루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나우루가 앞으로 30년 정도는 꾸준히 성장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인산염 산업은 국유화되었다. 대통령이 직접 관리하는 국영기업 '나우루 포스페이트 코퍼레이션'이 브리티시 포스페이트 커미션의 뒤를 이어받았다. 개발 이익금의 상당 부분은 곧바로 정부의 금고 안에 들어갔다. 광산업과 해외 투자, 공항 보수공사 및 항공사 에어 나우루 설립 같은 현지 사업 등에 투자하기 위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 '나우루 포스페이트 로열티 트러스트'가 만들어졌다.

나우루인들은 더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광산 일은 중국인들에게 맡겼다. 나우루인들이 일을 한다면, 그것은 정부에 고용되어 많은 사무실과 각종 부처에서 하는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대개는 국가 행정에 관하여 무언가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냉방시설이 잘된 시원한 곳을 찾는 데 불과했다. 나우루는 작은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했다. 나우루 포스페이트 코퍼레이션, 에어 나우루, 나우루 은행, 해운회사인 나우루 퍼시픽 라인, 이 모두가 국가 소유였다. 경찰로 일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사실은 나우루에서 범죄 행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우루는 주민들이 서로 속속들이 알고 지내고 모든 것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섬이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이 제1차 석유파동에 휩싸였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인산염은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다. 1974년, 인산염 개발로 나우루와 그 국민들은 오스트레일리아 화폐로 약 4억 5,000만 달러를 벌었다. 소규모 땅주인들도 인산염 가격의 상승으로 연간 수만 달러 이상의 이득을 보았다. 인산염 판매로 이 태평양의 작은 섬은 연평균 9,000만~1억 2,000만 달러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얻은 부로 나우루 사람들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했고, 모든 것을 제공했으며, 모든 것을 마련해주었다.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국고는 이미 외화로 가득 차 있었다.

콜린스 거리. 멜버른 비즈니스 가의 중심부. 80번지에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빌딩 하나가 서 있는데, 그 빌딩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수많은 마천루 가운데 하나다. 1977년 1월 21일, 나우루 하우스 빌딩이 성대하게 준공되었다. 드로버트의 뒤를 이어 막 나우루 대통령에 취임한 버나드 도위요고(Bernard Dowiyogo)는 초청 인사들과 악수하느라 바빴다. 53층에 사무실 총 면적은 5만 500제곱미터. 나우루 하우스는 전임 대통령의 과업이었지만, 이를 완공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날은 영광스러운 자신의 날이었다. 그러고 나서 오스트레일리아 전역에 나우루의 돈이 흘러 들어갔다. 시드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우루는 시드니 도심 한가운데에 면적이 3만 5,000제곱미터가 넘는 거대한 로열 랜드윅 쇼핑센터를 지었고 시드니의 머큐어 호텔을 사들였다. 관광 또한 나우루의 주요한 투자 영역이었다.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싱어 빌딩도 나우루 소유였다. 그렇게 해서 국영 투자 기금인 나우루 포스페이트 로열티 트러스트에서 수십억 달러가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이런 여러 건의 투자는 여전히 불투명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나우루에서 삶은 정상을 벗어나 있었다.

4.

1980년대와 1990년대, 나우루인들이 골프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골프장에서 자신의 이웃들, 현직 장관들과 마주쳤다. 나우루는 자기 땅을 척박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나라 땅을 훨씬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묘한 역설을 대가로 하나의 바캉스 클럽처럼 되었다. 자기 땅에서 나는 인산염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들판에 양분을 제공하는 동안, 나우루는 부서지고 구멍이 난 자국 땅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1970년대 말, 나우루 정부는 첫 번째 경고를 받았다. 인산염 가격이 내려갔던 것이다. 채굴량은 연간 150만~200만 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더니 해가 갈수록 점점 떨어졌다. 가격 하락, 채굴량 감소, 노후화되는 기반시설. 나우루 정부는 여전히 어느 정도의 성장 수준을 지켜갔지만 인산염 매장량은 고갈되어 갔다. 그렇지만 나우루인들은 계속해서 태평하게 살아갔다. 정부는 투자 수익금에 대한 확실한 보증도 없이 해외 투자 정책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건의 투자로 얻은 수익은 전혀 없었다. 더 나쁜 것은 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은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상당히 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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