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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다시읽기

한창수 지음 | 알타미라
대한민국 다시읽기

한창수 지음

알타미라 / 2010년 1월 / 300쪽 / 12,000원



제1장 한국인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주변국들


지난 50년 한국의 성장속도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세계 역사상 이처럼 단기간에 경제적 선진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성취한 국가나 민족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폐허가 된 서울에 입성한 직후 '이 도시가 옛 모습을 찾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오늘날 서울은 뉴욕이나 런던, 동경에 견줄 만한 첨단도시로 재탄생했다. 195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는 농업인구가 전인구의 70% 가량을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경국가였으나 오늘날의 한국은 첨단 IT기반시설로 무장된 IT강국으로 통한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세계적인 IT기업이 다수 존재하며 인터넷 접속률, 휴대전화기 보유율에서 세계 1~2위를 다툰다. 산업혁명의 후발국으로서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선진국의 지위를 넘보는 나라는 홍콩, 싱가포르 등 일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한국의 경이적인 성장은 물론 전적으로 한국인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다. 본래 한국인은 농경민족으로서 타민족에 비해 두드러지게 부지런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한국과 한국인에게는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세계사적인 압박이 존재했다. 이 기간에 한국인이 수행한 노동의 강도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기간에 한국은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고 국민들은 일하는 만큼 대가를 거둘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즉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전에 계급적 불평등으로 인해 평생 열심히 노력해도 잘 살기 어려웠던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자본주의는 최고의 인센티브였다. 일한 만큼 돌아온다는 이 신기한 현상 앞에 한국인은 열광했다. 그것은 '달리는 만큼 네 땅이 된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만큼이나 그들의 의욕을 북돋우는 체제였다. 그들은 노력했고 나날이 생활이 나아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한 나라가 한국만은 아님에도 유독 한국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은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을 둘러싼 주변 4강은 다양한 형태로 한국의 노력을 압박했다. 지난 60년간 한국은 늘 긴장상태였고 노력하지 않으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미국은 냉전의 전초기지인 한국을 앞에서 이끌었으며 일본은 기술과 자본을 제공했고 북한은 반드시 이겨야 할 라이벌로서 한국인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지리적으로도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교두보로서 중공과 소련의 턱밑을 겨냥한 비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즉 한국은 미국이 중공과 소련을 향해 겨눈 화살의 촉인 셈이었다. 이 위험하고 어려운 과업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라는 이름 아래 60년 동안이나 수행했다. 미국은 이러한 한국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혈맹으로서의 지위를 확인해주어 국가신인도를 유지하도록 했으며 한국의 상품과 기업이 자국의 시장에 제약 없이 진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일본은 자국의 입장에서 효용이 다한 기술과 사업들을 한국에 이전해 주었다. 19세기 말 이후 일본은 한국을 철저히 얕잡아 보았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경쟁상대로 인식하지 않았다. 일본의 과감한(?) 양보로 양국 간에 기술과 노하우의 이전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외부적 순풍 이외에 한국의 발전의지를 더욱 자극한 것이 북한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대한 한국인의 증오심과 공포심은 수십 년 동안 최고조 상태를 유지했다. 반공은 국시였고 국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증오와 공포를 열정적인 근로의 동력으로 승화했다. 북한의 존재는 한국인들의 삶을 상시적 긴장상태로 몰아넣었고 이것은 경제발전을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군사정권의 의도와 맞물려 인류역사상 기적 같은 경제성장의 사례를 만들어냈다.

제2장 질주하는 한국



세계시장을 평정한 제조 강국


1960년대에 후진국이었던 나라 중 글로벌 기업을 배출하는 데 성공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한국의 기업들은 빈약한 자본과 기술, 열악한 사회기반시설, 불안정한 국내 정치상황 등의 역풍을 이겨내고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오늘날 한국은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전통산업부터 휴대전화기, 반도체, 통신, TV 등 IT산업에 걸쳐 고르게 글로벌 기업을 보유한 보기 드문 국가이다. 조선업, D램 반도체 LCD 부문에서 세계 1위이며 철강, 휴대전화기, 자동차 등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업의 경우 한국은 2003년 이후 수주량, 건조량, 수주잔량 등 모든 부분에서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D램 반도체부문에서도 한국은 1998년 이후 12년째 1위 자리를 고수해오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기업들은 2008년 이후 전개된 치열한 '치킨게임'에서 승리를 거두며, 2009년 2분기 세계 시장점유율을 61.0%까지 끌어올려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반도체와 LCD시장에서도 경쟁국들을 압도하고 있다.

개별기업의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제품의 품질을 극적으로 높여 단기간에 글로벌 브랜드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 현대, LG, 포스코 등 한국의 주요기업들은 선진국시장은 물론 신흥국에서도 강력한 브랜드파워를 발휘하고 있다. 2009년 8월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시장 조사기관인 JD파워가 발표한 다섯 가지 가전제품 소비자 만족도 조사에서 삼성전자는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부문에서, LG전자는 오븐레인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5개 부문 중 4개 부문을 한국제품들이 휩쓴 것이다. 현대·기아차는 2009년 상반기 판매 순위에서 미국 포드를 제치고 사상 최초로 세계 4위에 올랐다.

시가총액 측면에서도 한국기업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2009년 들어 현대자동차의 시가총액은 미국 1위의 자동차업체인 GM을 눌렀으며 삼성전자는 소니, 노키아 등을 멀찍이 따돌리고 세계 1위의 반도체업체인 인텔을 근소한 차로 뒤쫓고 있다. 한편 한국 제조업체의 호조는 금융산업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2009년 3월 KB금융과 신한지주의 시가총액은 세계 최대 은행인 씨티그룹을 제쳤으며 삼성화재는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의 5배를 웃돌기도 했다. 한국처럼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 고른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는 흔치 않다. 한국은 모든 산업이 좁은 국토에 집약돼 있어 연관효과, 이른바 클러스터효과가 높으며 또한 IT기술을 통해 제조업을 고도화시킬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나라다. 한국의 전통산업은 IT산업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고 IT 산업은 전통산업의 고도화, 고부가가치화를 이끌면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산업간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다.

IT강국 다이내믹 코리아

한국은 좁은 국토,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 단일한 언어와 문화를 지닌 국가이다. 이것은 통신으로 대표되는 IT인프라를 구축하기엔 안성맞춤의 환경이다. 한국은 이러한 여건과 디지털 기술의 신물결을 십분 활용하여 통신을 비롯한 IT산업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디지털기술이 개화하던 시기에 한국은 이 물결에 뛰어든 최선두그룹에 속해있었다. 한국은 기존 아날로그 기술기반을 과감히 포기하고 디지털화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가령 1994년까지 D램 반도체를 주력사업으로 육성시킨 삼성전자는 디지털기술의 미래에 거의 모든 제품라인의 운명을 걸었다. 이 회사는 반도체사업에서의 경험을 통해 전자산업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앞서 읽을 수 있었다. 삼성전자의 과감한 선택은 다른 국내기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IT기업인 삼성전자를 보유한 국가로서 IT제조업부문의 경쟁력 측면에서도 세계 정상이다. OECD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동안 IT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의 경쟁력 지수는 OECD평균을 2배 이상 상회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 급부상한 이 신종 경제 분야에서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수십 년 동안 한국 제조업의 모델이 되어왔던 일본은 IT부문에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한국에게 추월당했다. 한국이 IT강국인 것은 세계적인 IT업체들이 유독 한국시장에 쉽게 진출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대 MS워드는 거의 전세계 시장을 석권했지만 한국에서만큼은 한글프로그램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세계적인 포털인 구글, 야후 등도 국내 포털의 저항에 직면하여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노키아는 세계 1위의 휴대전화기 기업이지만 한국에서는 노키아의 제품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MP3시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애플의 아이팟이 유독 고전하는 것이 한국시장이다.

2000년 들어 IT산업은 한국의 국가경쟁력 제고에 큰 힘이 되고 있다. IT산업은 한국의 성장엔진으로 작용했고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출현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1990년대 후반 1만 달러를 돌파했던 한국의 국민소득이 외환위기 속에서 7천 달러로 급감했으나 2002년에 신속하게 1만 달러 고지를 재탈환할 수 있었던 것도 IT부문에서의 약진에 힘입어서였다. 외환위기의 침체 속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우수한 인재들이 벤처로 몰려들어 밤낮으로 일에 몰두했다.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고 새로운 길에 승부를 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대부분 버블붕괴의 충격 속에서 실패했고 파산의 아픔을 겪었으나, 이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 어딘가에 남아 IT강국 한국의 저변을 구성하고 있다.

이 같은 모험과 정열적인 도전으로 오늘날 한국은 IT부문에서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한국의 발전된 IT산업은 향후 성장하는 BT(Bio-Technology), NT(Nano-Technology) 산업 등 첨단산업뿐 아니라 조선, 자동차, 철강, 등 전통 산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교육, 정보,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 등의 부문에서 산업의 정보화, 지식화가 진전될수록 IT기술의 유용성은 더욱 커지게 될 전망이다.

제3장 문민의 역사와 21세기 지식기반 사회



문민의 역사와 21세기 지식기반 사회


한국이 단기간에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 특유의 높은 교육열 덕택이었다. 1960년대 초 농업에서 공업으로, 내수에서 수출로 경제정책을 전환한 한국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은 표준화된 교육을 받은 양질의 인재였다. 정부는 교육받은 인재의 지속적인 공급을 위해 '국민 교육'을 실시해야 했는데 교육에 대한 한국인의 열정은 여기에 부합하는 정도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발전과정에서 한 차례도 인재난을 겪지 않았으며 중동건설 등 인력을 해외에 파견하는 경우에도 인력의 품질문제로 불만을 산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만큼 한국의 인적자원은 우수했고 이것은 전적으로 한국의 교육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의 교육열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못 배운 한은 뼈에 사무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굶어도 자식은 꼭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한국인에겐 상식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교육열은 우연한 것도, 최근의 일도 아니다. 학문과 배움은 문민을 숭상해온 한국의 오랜 역사적 전통이었다. 사실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한국처럼 학문을 숭상하고 배운 사람을 존경하는 사회는 많지 않다. 한국의 역사는 대부분 양반과 평민으로 구분되는 신분제 사회를 유지해왔는데 양반이 존경받는 이유는 신분이 높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의 경우 양반은 문반과 무반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학문의 주관자인 문반이 거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반의 최고직인 병조판서마저도 실제 칼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학자출신의 선비들이 차지하곤 했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대부분 붓을 쥔 자가 칼을 쥔 자를 능가했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현상이 너무나 지나쳤기 때문에 무인들이 격분해서 연약한 선비들을 도륙 낸 기간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러한 시기를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무인들의 통치는 어떤 경우에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한국인의 생각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출신의 정치가들은 경제발전 등에서 상당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한국인들은 군사 통치를 종식시키는 것만이 민주국가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인식했으며 1990년대에 민간인이 대통령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안도하게 되었다.

문민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무력통치에 대해 대단한 반발심을 가진 민족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한국은 군사적으로 거의 완패했으나 침략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굴복하지 않은 것도 이들이 학문적으로 선진국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인들은 정규군이 모두 패퇴한 이후에도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칼 한번 손에 쥔 적 없었던 선비들이 동네 청년들을 모아 죽기살기로 싸우는 형편이었다. 이러니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차지한들 이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사정은 청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고 나서도 한국인의 이 같은 인식을 돌려놓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인의 기준으로 당시 일본이나 청나라는 한결같이 학문의 세계를 모르는 오랑캐집단에 불과했다. 당시 한국문화의 주류를 담당한 선비들은 이런 인간들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옥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도 한국은 일본이 자신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일본은 한국보다 학문적 후진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학문을 최고로 숭상해온 한국인은 학문적 후진국인 일본의 지배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학문을 숭상하는 문민의 전통에서 본다면 한국은 확실히 일본보다 앞서 있다. 오늘날의 일본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한국을 앞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역사 속에서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중세시대 때부터 제2차 대전 패전 때까지 줄곧 군사문화가 지배한 나라였다. 사무라이의 전통이 주류를 차지하는 일본의 역사 속에는 한국의 선비에 해당하는 학자층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문민의 전통이란 게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일본 또한 세계최고수준의 교육열을 보유한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 강도는 한국에 미칠 수 없다. 한국의 교육열은 뿌리 깊은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제4장 한국인의 광기(狂氣)와 독기(毒氣)



한국인의 애국심은 독인가

한국인의 애국심은 유별나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애국가를 외워서 부를 수 있으며 한국 가정의 90%는 태극기를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이 경제, 군사, 교육, 스포츠, 문화 등 모든 부분에 걸쳐 한국이 세계 몇 위인지를 신경 쓰며 산다. 스포츠에서는 아무리 비인기 종목이더라도 국가대항전을 하면 국민들은 예외 없이 관심을 기울인다. 모두가 한국인의 뜨거운 애국심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이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래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은 크게 고취되었다. 해방 이후 반공과 결부된 애국심은 한국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왔다. 특히 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시절 한국인의 애국주의는 대단한 힘을 발휘했다. 독재를 해 온 대통령도, 이에 저항한 민주인사도, 이름 없는 공장직원도 애국주의에는 예외가 없었다. 한국에서 민족이라는 화두는 언제나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2004년 삼성의 이건희 전회장은 사장단과 철야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로 돈 좀 번다고 그게 다 내 돈인가. 내가 이처럼 여러분을 채근하는 것이 돈 좀 더 벌어 보자고 하는 짓인가. 오해하지 말라. 돈이라면 지금도 많다. 이자의 이자만으로도 평생 쓰고도 남는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우리가 이처럼 애쓰는 것은 모두가 나라와 후손을 위함이다. 우리는 한없는 서러움을 조상에게 물려받았는데 후세에까지 똑같이 물려줄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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