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 찬가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보노보 찬가
조국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 199쪽 / 11,000원
제1장 '정글자본주의'의 시대, 진보의 길 찾기
'악마의 맷돌'이 돌고 있다이제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는 물론, 교육의 양극화, 건강의 양극화도 가속이 붙어 진행되고 있다. 한스 피터 마르틴(Hans Peter Martin)과 하랄트 슈만(Harald Schuman)이 경고했던 '20대 80의 사회'는 이미 우리나라에 도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며,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류의 욕망이 최고의 미덕으로 찬양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비유를 빌려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s)"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맷돌은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하여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을 으깨고 갈아 상품화시키는데,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 맷돌은 통제되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더 거칠게 돌아가고 있다.
OECD가 발표한 '2009년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이 2,316시간으로 OECD 30개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했다. 이는 OECD 평균 1,768시간보다 548시간이 더 많으며, 2위인 헝가리와도 330시간 이상 차이가 나는 현격한 1위이다. 이는 한국의 노동자가 특별히 일에 광적이거나 '일 중독증'에 걸려 이러한 통계가 나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10만 명당 18.7명으로 30개국 중 3위를 기록했고, 여성 자살률은 10만 명당 11.1명으로 30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더불어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OECD 가입국가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을 받고, 연금과 의료혜택에서 차별을 받으며, 2년마다 해고의 위험에 놓이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부추계 560만 명이다.
한편, 산업재해 예방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미약하고,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절차는 복잡하다. 경제위기 속에 고용불안 상황이 계속되면서 산업재해를 신청하면 회사에서 잘릴까 두려워 속으로 끙끙 앓는 노동자가 늘고 있다.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의 노동3권도 여러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 정부가 '비즈니스 프랜들리'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노동친화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성을 보일 때야 비로소 노사정위원회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노동을 단지 상품 또는 비용으로 생각하고, 노동자를 억압과 관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한 노사평화는 요원해진다는 평범한 상식을 다시 강조해야 할 시기이다.
'촛불'의 경고와 진화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황급히 이루어진 미국 쇠고기의 전면수입 결정은 민심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한 고교생의 대통령 탄핵제안에 백만이 넘는 동의서명이 이루어지고, 전국 방방 곳곳에서 촛불집회가 개최되어 전국의 거리에는 "명박 퇴진, 독재 타도"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즐겁고 신나게 어울리며 춤추고 노래하면서 불복종하고 저항했다. 대중은 침팬지 세력에 대하여 보노보식으로 맞섰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검역주권'의 상실과 국민의 건강권을 우려하는 민심을 경청하기보다는, 이 민심에다 '반미', '불순'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촛불집회?시위가 고조되어 정권에 위기가 오자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들으며 반성했다면서 사과하였지만, 촛불집회?시위가 조금 수그러들자마자 바로 법질서 준수와 강경진압으로 선회하였다. 보수언론은 촛불집회?시위 참여자를 전문적 불법시위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정부 내에서 여대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차고 밟는 등 경찰의 폭력적 과잉진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쑥 들어가고 정부는 되레 이를 인권침해라고 결정한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하여 화풀이를 하며,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감시를 자신의 의무로 하는 이 독립적 국가기구를 무력화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촛불을 든 시민들은 정부?여당의 색깔론과 배후론에 흔들리지 않았고, '5공'을 방불케 하는 경찰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2008년 전국을 환하게 밝힌 촛불은 이제 미국산 쇠고기를 넘어 '진화'해야 한다. 즉, 촛불은 거리에서 터져 나온 여러 요구를 수렴하는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 요체는 정글자본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막고, 사회의 공공성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우리를 '사회적 광우병'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를 시장과 이윤 논리 일변도로 재편하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시급히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복지예산 지키기 운동이 필요하다. 둘째,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허덕이며 촛불을 들 처지도 되지 못했던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들을 정규직으로 단계적으로 진환시키는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료?보건 분야가 시장논리로 재편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진보의 진보를 위한 고언미국발 세계금융위기는 진보진영의 자본주의 비판이 현실적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고 느끼며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사실 약육강식이 관철되는 '정글자본주의'와 팽배한 물신 숭배, 그리고 심화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을 비판?극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이성'일 것이다. 문제는 비판을 넘어 무슨 대안이 있는가이다. 대안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보의 꿈이 재구성되어야 한다.
먼저 진보진영은 세계화 시대에 한국경제가 살아갈 수 있는 방략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진보진영은 '20대 80사회'에서 고통받는 다수에게 승리의 경험과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정글자본주의'의 질주 속에서 어떠한 계급, 계층, 집단이 어떠한 고통을 받는가를 분석하고, 그 고통을 실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매 단계 보여주어야 한다. 야구 용어를 빌리면, '빅 볼' 외에 '스몰 볼'도 보여주며 점수를 올려야 한다. 김진석 교수의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의 진행에 대하여 "거대 담론투의 결론이나 저주를 내리는 것을 되도록 피하고, 구체적 문제들을 충실하게" 설명하고 차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 '전면적 정규직 전환'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일자리를 늘리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지키는 고용전략 창출과 법제개편은 훨씬 어려운 일이며, 이 난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진보 정치는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셋째, 진보진영은 우리가 정당정치의 사회에 산다는 점을 체득해야 한다. 대중은 이미 그러한 '사회주의자'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아 있다. 진보진영과 대중운동과의 관계도 변화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당이며, 진보정당이 해야 할 일은 노조운동이 아니라 정치이다. 마지막으로 진보진영은 현대 대중사회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진보진영의 지도부가 익숙한 문화는 주로 1970,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시기의 문화이다. 정글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는 대중으로 하여금 붉은 머리띠를 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한 구호를 외치도록 몰아가고 있다. 진보진영도 이러한 방식의 투쟁에 동참하여 사회적 약자를 지키는 버팀목 노릇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 동시에 진보진영은 촛불시위의 광장에서 대중이 보여준 신나고 발랄한 문화를 배워야 한다. 무게 잡는 엄숙주의만으로는 대중과 소통할 수 없다.
그간 한국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한 진보진영의 고투를 인정하지만, 체제를 '괴물'로 규정하고 투쟁하기만 하고 자신을 성찰하지 못한다면, 어느새 자신 속에 바로 그 '괴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편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비웃음 섞인 말이 우리 사회를 돌아다닌 지 오래되었다. 현재 진보진영은 미약한 여론지지율을 갖고 있다. 그 힘을 합하여 퇴행하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글자본주의'와 싸우고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하는 데 매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파, 무슨 파로 나뉘어 서로 비난하고 싸우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이다. 혁명과 전쟁과 폭정을 겪은 인류는 국경을 넘어서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인권규범을 만들어냈다. 무산계급이 요구한 '적색인권', 환경권, 평화권 등의 '녹색인권', 부르주아 계급이 요구한 '청색인권' 등 이러한 국제인권규범이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이 바로 보노보 세상일 것이다. 한편 인권은 '정치'의 문제이다. '정치'란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얼마큼을 어떠한 절차로 나눌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정글화되어가는 한국에서 긴요한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약자에 대한 존중과 약자와의 연대가 사회원리로 자리잡는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어떠한 국가와 정부가 필요한가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오바마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예상대로 또한 기대대로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극우 네오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복합물이었던 부시 정권에 대하여 미국인의 심판이 내려졌다는 점은 그 자체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오바마 대선공약은 이라크전쟁 반대와 철군, 자본시장과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감독 강화, 부자중심의 세수 증대와 중산층 이하 세금 삭감,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확대를 통한 국민의 건강권 증진, 공교육 강화?개선, 북핵 해결을 위한 북한과의 직접대화 등으로 요약된다.
오바마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부의 집중은 바로 그 자유를 위협한다고 파악하고 적극적 국가 개입을 선호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자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미국에서 사회적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는 '리버럴'이란 이름으로 구별 없이 통칭되곤 한다. 그런데 미국 극우진영은 '리버럴=부의 재분배론자=빨갱이'라는 주장을 구사해왔다. 한편 우리나라 정부와 보수진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오바마의 정치성향을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거대하게 변하는 세계적 흐름을 겸허하게 배우고 자신의 정책과 행태를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일이다.
오바마는 가족배경처럼 인종융합적 정책을 펼치고, 여성과 성적 소수자의 인권 옹호,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등 인권 친화적 정책을 펼칠 것도 쉽게 예상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오바마는 현실 정치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 150만 명에 달하는 풀뿌리 기부자의 지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대기업으로부터도 막대한 선거자금을 받았다. 앞으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익집단의 상충되는 이익을 조정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오바마가 철저하게 미국의 국익에 기초한 대외정책을 펼칠 것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오바마 당선 앞에서 우리는 냉소적일 필요도 없고 동시에 그에게 과도한 기대를 가질 이유도 없다. 문제는 국내정치이다. 오바마 당선이 한국 진보?개혁 진영에게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제 무게를 잡고 실속을 챙기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관리에 힘쓰지 말고 오바마의 책이름처럼 '담대한 희망'을 제시하고 대중의 바다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 풀뿌리에 엉켜 붙어라.
제2장 형벌권의 과잉과 남용은 안 된다
형법은 사회통제의 최후수단막스베버가 말한 것처럼, 국가는 합법적 물리력?강제력을 독점한다. 그중의 하나가 형벌권이다.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면 그의 자유와 재산이 제한?박탈되고 가장 심하게는 생명이 박탈된다. 이렇듯 형벌권이 작동된다는 것은 시민을 '골로 보내기' 십상이므로, 형법학계는 형법은 사회통제의 '최후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형법은 불법성이 명백하고 중한 반사회적 행위에 한하여 행사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는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제재는 법률이 아닌 사회규범이나 형법이 아닌 법률에 맡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형법을 사용하여 제재를 가할 때도 시민에게 최소의 침해를 가져오는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 등 국제인권규약과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와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각종 인권?기본권의 강한 보장을 선언한다. 그 취지는 폭력을 사용하여 체제에 임박하고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연합 가입국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한 OECD 국가 등 다수의 국가는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형벌 중에서 사형을 스스로 삭제했다. 이처럼 국가형벌권의 자제와 절제는 민주국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21세기 OECD 가입 선진국을 자랑하는 한국의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사형만은 안 된다1997년 12월 30일, 김영삼 정부는 23명의 사형수에 대하여 사형을 집행하면서 그 임기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10년 이상 사형집행이 유예되어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법무부는 소수 극악한 살인범의 사례를 들면서 사형집행 재개를 위한 군불을 때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간주하여 사형집행을 재개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간이 갖는 권리 중 가장 근원적인 권리는 생명권이다. 국가는 시민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없다. 극악한 살인범도 개선과 교화의 가능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시민을 살해한 범죄인에 대한 피해자와 사회의 공분으로 범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잔혹한 범죄에 대한 대중의 공포,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 공포와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사형을 선택하는 것은 도덕적 정당성 문제 외에 범죄예방과 억지의 차원에서도 효과가 없다. 사형을 유지하는 미국과 사형을 폐지한 유럽국가의 살인범죄 발생률을 비교할 때 전자가 훨씬 높다는 점은 사형제도 자체의 범죄억지력을 의심케 하는 비교법적 증거이다.
상식적 차원에서 생각해보더라도, 작정하고 살인을 준비하는 예모범, 정신장애를 가진 살인범, 순간의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범하는 격정범, 신념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확신범 등이 사형이 존재한다고 하여 위축되어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형집행이라는 충격적 요법은 잠재적 범죄인에 대한 경고와 범죄억제?예방을 위해서는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이다. 국가에 의한 계속된 사형집행과 이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도리어 잠재적 범죄인이 사형에 대하여 무덤덤한 감각을 갖도록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당시에는 사형폐지를 둘러싼 유엔회원국 간의 이견차이가 있었으므로, 선언 자체는 사형폐지를 선언하고 있지 않다. 다만 이 선언 제3조는 개인의 생명권을 규정하고, 제5조는 누구도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형사제재(cruel, inhumane or degrading treatment or punishment)"에 처해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다. 1966년 국제연합 총회가 채택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nvention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자유권규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