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중국을 말하다

이건우 지음 | 지상사
중국을 말하다: 마오쩌둥에서 후진타오까지

이건우 지음

지상사 / 2009년 5월 / 282쪽 / 12,000원



1장 마오쩌둥, 중국의 사상적 개척자



마르크스주의 과학기술관을 계승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1일 건국을 선포한 이후의 중국을 '신중국'이라고 부른다. 그는 건국초기부터 '과학기술이 생산력이다'라는 마르크스주의 과학기술관을 기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 가치관 아래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과학을 포함하고 있다. 모두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사회과학의 지도 아래 자연계를 개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연과학을 포괄하지만 대체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인식이고, 기술은 자연에 대한 개조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은 자연에 대한 인식이자 개조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과 기술이 자연에 대한 이중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학기술의 이중성에 대해 마오쩌둥은 이처럼 치밀한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는 과학기술 사상 정립에서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계급성을 배제했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는데 이를 연구하거나 이용하려 할 때 비로소 계급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과학기술의 본질을 대단히 과학적으로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오쩌둥은 일생 동안 수많은 과학 서적들을 탐독했다. 물리, 화학, 천문, 지질, 기상, 기계, 농업, 토양 등의 자연과학을 스스로 공부했다. 그는 자연과학지식을 광범위하게 이해한 기초 위에서 자연과학 사상을 정립했다. 또한 그는 많은 과학계 지도자들과 자연과학 기초 이론, 고에너지와 물리학 방면의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그의 과학기술 사상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고 그 가치를 발휘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두고 있다.

중국 현대화의 기초

마오쩌둥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 '백가쟁명(百家爭鳴·누구나 자유로운 논쟁과 토론을 펼친다)'과 '양위중용(洋爲中用·서양문화 중에서 유익한 것을 받아들여 중국의 발전에 이용하다)'의 사상을 고수했다. 이 같은 사상의 근저에는 마오쩌둥이 신중국 건설과정에서 겪었던 뼈저린 통한이 들어 있다. 그는 건국 이전 중국이 낙후된 경제와 기술 때문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국가의 경제와 기술이 선진수준을 따라잡지 못하면 제2의 침략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추진하면서 과학기술을 디딤돌로 운용했다. 그는 중국이 사회주의 제도의 기본 틀을 갖춘 1950년대 중반에 중국 실정에 맞는 공업화 추진을 주장했다. 1956년 중국 최초의 '과학기술 12개년 장기 발전 계획(1956~1967)'이 제정됐다. 이 계획은 중국의 신기술 창조와 신흥 공업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마오쩌둥의 전략결정과 지도 아래 중국의 국방과학기술도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다. 1964년 원자폭탄, 1966년 수소폭탄 개발에 처음으로 성공했으며, 1970년에는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소위 '양탄일성(兩彈一星·중국이 자력으로 개발한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을 말한다)'의 거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마오쩌둥의 성과와 오류

마오쩌둥은 이념(紅)과 기술(專)을 겸비한 '우홍우전(又紅又專·사상적으로도 건전하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하다)'에 적합한 지식인과 인재 양성을 중요시했다. 그의 과학기술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과학기술관을 기반으로 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과학기술 실천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과오도 범했다. 특히 만년에는 지도 사상 면에서 오류를 일으켜 계급투쟁을 가장 우위에 두었다. 이는 그가 당초 중요시했던 과학기술 사상이 더 이상 실천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중국 과학기술에 큰 손실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오쩌둥이 범한 오류는 크게 전략적 실천과 정책적 이론으로 나눠 지적된다. 전략적 실천에서 그는 기술혁명을 조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과오를 저질렀으며,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사업을 다룬 오류를 범했다. 마오쩌둥은 1960년대 초 계급투쟁, 생산투쟁, 과학실험 등 3가지를 중국 현대화 건설에 있어 주요한 혁명운동 전략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계급투쟁을 전략적 최우위에 두면서 나머지 생산투쟁과 과학실험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했다. 여기에다 1950년대 후반 기술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사상이 대약진이라는 전략실천 과정에서 좌절을 겪으면서 생산투쟁과 과학실험의 발전전략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지식인을 제2의 착취계급에 포함시켰으며, 그로 인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지식인과 과학기술 인재는 혁명의 대상으로 공격당했다. 그는 과학기술 인재를 존중했지만 그 집단의 속성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은 자산계급에 속한다'는 평가를 버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경제발전을 위해 과학기술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이론 면에서 이율배반적인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과오는 마오쩌둥을 이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덩샤오핑에 의해 즉각 수정되었다.

2장 덩샤오핑,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의 과학기술 사상을 계승


덩샤오핑은 신중국 경제사를 새롭게 쓴 인물이다. 그는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를 통해 중국 경제의 전면적인 개혁 개방 추진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 경제체제 속에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것은 건국 이후 중국 역사상 가장 심오한 의미를 지닌 대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중국은 덩샤오핑을 '개혁 개방의 총설계사'라고 부른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이 전력을 다해 경제관리 체제와 경영관리 방법에 대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자력갱생의 기초 위에서 세계 각국과 동등한 이익을 가질 수 있는 경제협력을 적극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세계 선진기술과 설비를 받아들이고 현대화 실현에 필요한 과학과 교육 업무를 크게 강화해야 한다고 제창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도 마오쩌둥의 과학기술사상을 계승했으며 마오쩌둥이 범한 과오를 과감히 수정해 덩샤오핑만의 과학기술 사상으로 형성해 나갔다.

덩샤오핑은 마르크스 과학기술관 관점으로 마오쩌둥이 계승했던 '과학기술이 생산력이다'라는 가치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다'라는 사상 기초를 확립했다. 그로 인해 과학기술에 대한 일반 인식에도 비약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그가 말한 '가장 중요한 생산력'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산력이 아니라 현대적인 공업경제를 뛰어넘는 생산력을 말한다. 이는 전통적인 생산력보다 훨씬 앞서는 생산력으로 전통적인 생산력 변화는 물론 생산체제, 경제체제, 과학기술체제 등에도 거대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과학기술 발전만이 경제 건설 실현의 지름길

오늘날 중국에 있어 덩샤오핑의 가장 큰 공헌은 '개혁개방을 통한 현대화 경제 건설'이다. 그가 경제 건설을 위해 내세운 전략이 바로 생산력 향상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남긴 오류인 과학기술과 경제 발전이 장기적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과학기술 인재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교훈에 주의를 기울였다. 때문에 그는 "중요한 건 모든 경험을 전체적으로 모아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의 집대성과 인재의 활용이라는 두 가지를 정식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자세로 개혁 개방과 현대화 건설에 임했고 과학기술 발전을 추진했다.

덩샤오핑은 줄곧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 건설이 반드시 결합돼야 한다는 지도 사상을 견지했다. 이는 그가 가진 과학기술사상의 주요한 특징이자 핵심으로 꼽힌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의 국제 형세와 현대화 건설의 국내 실정에 따라 '과교흥국(科敎興國·과학교육으로 국가를 부흥시킨다)'의 전략사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는 후에 장쩌민이 그대로 물려받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중점적인 과학기술 핵심 전략 사상의 하나가 됐다.

무인 우주선을 쏘아 올리다

덩샤오핑은 기초이론 연구가 전체적인 과학기술 체계에서 튼튼한 기초를 이루고 경제 사회발전을 추진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라고 인식했다. 때문에 기초이론 연구를 고도로 중시했다. 덩샤오핑은 기초이론 연구와 함께 응용개발 연구 발전에도 적극 나섰다. 응용개발 연구는 기초이론 연구로부터 생산 실천 등 실제 응용 과정까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는 기초이론 연구와 응용개발 연구를 기반으로 고급 신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6년 11월 중국 공상당과 국무원은 덩샤오핑의 지지와 독려 아래 고급기술 연구 발전 계획인 '863 계획' 요강을 확정했다. 중국의 미래경제와 사회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생물, 우주항공, 컴퓨터와 정보기술, 레이저, 자동화, 에너지, 신소재 등 7가지 고급 기술을 중점 개척해야 할 영역으로 삼았다. 이 계획은 이듬해 3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으며 중국은 첫 번째 무인우주선 발사에 성공하는 쾌거를 거뒀다. 덩샤오핑의 과학기술사상은 거시적이고 전략적인 정책과 함께 미시적이고 전술적인 조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과학기술 발전에 관한 일련의 중요한 사상들은 실천적, 지도적 의미를 가장 풍부하게 지닌 사상이론으로 평가받는다.

교육으로 우홍우전 인재 집단을 양성

덩샤오핑의 과학기술 발전 사상과 전략에서 중요시한 것은 인재와 교육 문제였다. 이는 마오쩌둥이 가졌던 인재와 교육의 중요성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직후 그 악영향을 말끔히 청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여기서 그가 시급하게 인식한 게 바로 지식인 대우 문제였다. 덩샤오핑은 가장 먼저 지식인이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이라고 과감히 다시 인정하고 나섰다. 이 같은 역사적 과오의 수정은 지식인과 과학기술 인재들로부터 즉각적인 환영과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덩샤오핑은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시대적 사상과 행동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함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서만 과학 기술자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고 '우홍우전' 조건을 갖춘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여겼다. 덩샤오핑은 개혁 개방 이후 당정 간부가 갖추어야 할 인재 조건에 대해 4가지 덕목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는 소위 '간부사화(幹部四化)'로 혁명화, 연경화(年輕化), 지식화, 전문화 등 4가지를 말하며 바로 '우홍우전' 인재의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 기준은 이후 간부 인재는 물론 국가 지도자를 선발하는 조건으로까지 엄격히 적용됐다. 덩샤오핑에 이어 국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장쩌민, 후진타오 등도 모두 이 기준에 따라 선발된 것이다.

3장 장쩌민, 중국 통치 전략의 창시자



신시대 신사상으로 과학기술 전략 추진


장쩌민은 중국 정치사에서 본격 세대교체를 이룬 첫 번째 최고 지도자로 평가된다. 혁명투쟁과 항일전쟁으로 분류되는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최고 지도자들과는 구분되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대학에서 전기를 전공한 뒤 줄곧 생산현장에서 기술자로 지내며 과학기술 사업에 종사했다. 이 같은 경력은 그로 하여금 과학기술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과학기술 사업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게 했다.

장쩌민은 과학기술 전략을 집중적으로 확대 추진한 최초의 테크노크라트 지도자로 꼽힌다. 그는 또 과학기술 사상을 통치 전략으로 승화시킨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과학기술 통치 전략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집권하면서 내세운 통치 전략은 '3개대표(三個代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과학기술이 선진 생산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요 지표라고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 우수 인재들이 없으면 선진 생산력도 없고 과학 사상, 과학 관념, 과학 정신, 과학 방법 등이 없으면 선진 문화도 없다. 과학기술과 문화의 진보가 없으면 경제와 사회의 발전도 없고 인민의 생활수준 제고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다'라는 덩샤오핑의 과학기술 핵심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과 미래 과학기술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지식 존중과 인재 존중 사상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동시에 인재는 사회 발전 과정, 특히 자주적인 혁신 과정에서 중요한 자원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그는 지식 혁신과 과학기술 혁신에서 핵심을 과학기술 인재 집단 건설 강화에 뒀다. 특히 새로운 인재 양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는 "체제 개혁을 심화해 수많은 젊은 세대의 과학 기술 인재를 육성하고 세기를 뛰어넘는 거대한 과학기술 인재 집단을 건설해야 한다"는 말로 인재양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21세기 인류가 해결해야 할 3대 과학기술 윤리 문제를 '생태 윤리, 생명 윤리, 인터넷 윤리'라고 규정했다. 이 세 가지는 오늘날 전 세계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그는 과학기술에 대해 '양날의 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과학기술의 거대한 발전이 인류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많은 재난과 근심도 초래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므로 인류는 과학기술 발전 과정에서 당연히 생태환경과 지적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과학기술 발전에서 윤리, 법제 문제와 함께 사회과학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의 사회과학에 대한 중요성 인식은 윤리와 법제 문제 분석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균형적 발전을 중요시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테크노크라트 지도자로서 사회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며, 이 사상은 차기 지도자인 후진타오도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4장 후진타오, 중국 통치 철학의 선구자



신세기 과학기술 사상으로 혁신형 국가 건설


장쩌민이 중국 테크노크라트 시대를 개막했다면 후진타오는 테크노크라트 시대를 활짝 꽃피운 지도자이다. 후진타오도 대학에서 수리 공정을 전공하고 해당 분야 기술 현장에서 경험과 경력을 쌓은 뒤 정치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특히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통치 전략을 뛰어넘는 과학기술 발전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중국 과학기술 사상을 통치철학으로까지 승화시킨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아직 집권하고 있는 후진타오의 과학기술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조명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대개 임기 후 활발한 연구 분석을 통해 시도되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뒤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추진에 있어 과학기술 발전의 핵심적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를 위해 그가 독창적으로 제안한 이론이 바로 과학 발전관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기술 발전 전략 사상 체계이다. 이는 후진타오 과학기술 사상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후진타오가 제시한 과학 발전관의 궁극적인 목적은 경제사회 발전에서 현대화 건설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과학기술 발전성과를 전환해 과학기술과 경제를 효율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구조 건립과 체제 개선에도 주력했다. 그는 과학기술과 경제의 유기적 결합을 촉진시키기 위해 중국이 힘주어 해결해야 할 근본문제가 바로 경제와 과학기술의 체제 개혁이라고 여겼다. 그는 2006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그 유명한 '팔영팔치(八榮八恥)' 사회주의 영욕관을 제시했다. 이는 8가지 영광과 8가지 수치를 요약해 설명한 것으로 그중 하나가 바로 '과학숭상을 영광으로 삼고 우매무지를 치욕으로 삼아야 한다'이다.

과학 인재관 실천으로 인재 강국 건설

후진타오의 과학 인재관은 과학 발전관을 견지하면서 인본주의 인재관 체계를 형성했다. 그는 2003년 처음 열린 전국인재업무회의 연설에서 인재 강국 전략으로 대표되는 과학 인재관을 처음으로 제창했다. 이는 '과교흥국' 전략의 심화와 발전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회의에서 "인재 자원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인민은 누구나 모두 인재가 될 수 있다. 인재는 바로 일반 대중 속에 있다"라는 인재관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는 덩샤오핑이 줄곧 주장한 '과학기술이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다'라는 이론 사상에 이은 또 하나의 새로운 과학기술 가치관을 탄생시킨 셈이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