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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프리카

세르주 미셸, 미셸 뵈레 지음 | 에코리브르
차이나프리카

세르주 미셸, 미셸 뵈레 지음

에코리브르 / 2009년 4월 / 319쪽 / 16,000원



검은 대륙을 위한 레드카펫


"'니 하오, 니 하오.' 콩고공화국의 수도 브라자빌 거리를 10분쯤 걷고 있을 때 공을 따라 몰려가던 꼬마들이 발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프리카에서 백인을 보면 흔히 영어로 '헬로, 미스터!'나 프랑스어로 '살뤼, 투밥!' 또는 '무슈, 무슈!'라고 인사를 한다. 하지만 길가에 늘어선 이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중국어로 '안녕'이라는 뜻의 '니 하오!'를 외쳤다. 그 아이들 눈에는 외국인이 모두 중국인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중국에서도 이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중국 정부가 아프리카와 우호를 증진하기 위해 여러 해 전부터 아프리카 전체에서 온 대학생 수천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 상하이, 난징, 심지어 쓰촨성 청두 등의 대학 근처에서 흑인 학생들을 보는 것도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중국은 석유 필요량의 30%를 아프리카에서 충당하고 있고, 중국은 수단의 제1무역국이며 수단은 아프리카 국가 중 앙골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어 중국의 세 번째 무역국이었다.

제1회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은 2000년 베이징에서 열렸는데 당시에는 국제적으로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실 그때는 아시아의 거인 중국과 검은 대륙 아프리카 사이의 교역량이 100억 달러를 겨우 넘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6년이 되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몇 년 사이에 중국이 검은 대륙 곳곳을 파고들었다. 11월 3일자 중국의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무역량을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2002년에서 2005년 사이 양자 간 무역량은 123억 9000만 달러에서 398억 달러로 세 배 넘게 늘어났다. 2006년에는 5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2006년 11월 4일자 《차이나데일리》의 기사 주제는 모두 똑같았다. 중국이 아프리카 전역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2006년 11월 5일 고위급 회담이 시작되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베이징 정상회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농담 같았다. 단 며칠 사이에 수많은 계약 협정 조약 합의가 줄줄이 체결되었고, 이 모든 과정에 서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프랑스의 미묘한 조정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우호적 압력은 낄 자리가 없었다. 또한 2006년 4월에서 2008년 1월까지 20개월 동안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비롯해 원자바오 총리 등이 아프리카 순방길에 올라 31개국을 방문할 만큼 적극적이고 순발력 있게 공략했다.

콩고의 숲속

중국인은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쌀의 32%를 먹어치우고 시멘트의 47%를 사용하며, 담배의 3분의 1을 소비한다. 수치상으로 보면 현재 수입 목재를 그리 많이 소비하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주요 목재 수입 지역인 시베리아와 동남아시아의 숲에 큰 타격을 주었다. 포레스트 트랜드 컨소시엄(Forest Trend Consortium)은 벌채가 현재 속도로 계속 진행된다면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의 숲이 10년 후, 파푸아뉴기니의 숲이 13년 후, 러시아의 숲이 20년 후에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콩고분지에 대한 압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콩고공화국과 콩고민주공화국, 가봉, 카메룬, 앙골라 북부를 아우르는 콩고분지에는 전 세계 식물의 3분의 1이 서식한다. 2억 헥타르에 달하는 숲에는 파충류 438종, 양서류 336종, 새 221종, 포유류 270종, 영장류 43종이 산다. 콩고의 밀림은 세계 최대의 숲 코끼리 서식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마다 93만 4000헥타르의 숲이 사라지고 있어 동물들의 보금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세계야생생물기금(WWF)은 지금 속도로 벌채가 계속된다면 2050년에 콩고분지 숲의 3분의 2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사이언스》지에 실린 우즈홀연구센터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콩고분지 숲의 3분의 1이 잘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 국토 넓이와 맞먹는 면적이다. 새로난 임도(林道)로 밀렵꾼들의 통행이 쉬워졌다는 점도 벌채 못지않게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웃나라 가봉과 중국의 가장 큰 계약은 벨링가 지역에 묻혀 있는 철광 5억 톤을 개발하는 계획으로 중국기계설비수출입공사(China National Machinery & Equipment Import & Export Corporation, CMEC)와 중국수출입은행에서 25억 유로를 투자했다. 민케베 국립공원 근처의 철광은 또 다른 중국 회사에서 개발할 예정이며, 거대 광물 회사인 완바오는 무칼라바 국립공원 쪽을 탐사하고 싶어한다. 한편 중국 석유 회사인 시노펙은 로앙고 국립공원 거의 전체를 양도받아 탐사를 시작했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에 대한 약사(1421 2008년)

『중국과 아프리카, 1956~2006』의 저자 우위안은 기원전 1세기에 한나라 사신 장건이 실크로드를 통해 지중해 남쪽 연안까지 갔다고 단언한다. 장건은 당시 꽤 알려졌던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비단옷을 가져다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백 년 후 당나라 시대(618~917년)에는 아랍 정복자들과 직접 왕래했다. 사하라 사막을 횡단한 중국 탐험가들도 있었다. 아프리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 두환이 쓴 『경행기(經行記)』에 처음 나온다. 당나라 시대의 예술작품에는 흑인이 꾀 많고, 용기 있고, 영리한 '정의의 사도'로 묘사되어 있었다. 당나라 상인들은 도자기를 북아프리카에까지 유통시켰다. 중국 동전이 케냐와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9세기 당나라의 학자 단성식은 지금의 소말리아 베르베라인 보발리에서 벌어지는 노예와 상아 무역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 썼다.

송나라 시대(960~1279년)에는 해군력과 무역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송나라의 각종 상품이 현재의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짐바브웨에까지 깊숙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추세는 원나라(1279~1368년) 때에도 계속되었다.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마다가스카르에까지 사신을 보냈고 도교의 도사이자 지리학자인 주사본에게 최초의 아프리카 지도가 실린 『여지도(輿地圖)』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 지도에 실린 아프리카 대륙은 길쭉한 삼각형 모양이었다.

한편, 베이징 정상회의에서 배포한 공식 책자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유럽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15세기 아프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분할 지배한 유럽 국가들 때문에 중국과 아프리카 간의 우호적인 교류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식민주의의 희생양이었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의 공격에 중국은 반(半)식민지가 되었다. 1880년대부터 중국인 수천 명이 강제로 아프리카로 끌려가 철도 건설, 광산개발, 농지 경작에 동원되었다. 다카르와 콩고의 철도 건설 현장과 남아프리카공화국 금광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흘린 피와 땀이 배어 있다. 이렇게 불행한 경험을 공유했기에 중국과 아프리카 인민들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는 1980년대 덩샤오핑이 표방한 경제개혁의 영향으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제 아프리카는 시장인 동시에 에너지 자원과 원자재의 중요한 공급지로 여겨졌다. 중국이 아프리카에 신속하게 구애를 하게 된 중요한 두 가지 계기는 첫째, 프랑스의 롤랑 마르샬 연구원이 주창한 것으로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태이고, 둘째, 1995년 권력을 장악한 장쩌민 국가주석이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 중국 대기업들에게 "해외로 진출하라" 즉 세계의 주역이 되라고 선언한 것이다. 중국 기업인들에게 아프리카는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글로벌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 발톱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프랑스 영향권을 넘보는 중국

카메룬의 장관은 프랑스를 참 좋아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한다. "우리 카메룬에는 보크사이트와 코발트, 니켈이 풍부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도통 관심이 없어요. 금,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광산에도 마찬가지예요. 프랑스는 이곳에서 오로지 석유만 개발해요." 그러면서 기니 만의 석유는 접근하기 쉬우나 "수단 쪽의 사나가 단층은 그렇지 않으며, 석유가 매우 풍부하지만 탐사를 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아프리카는 프랑스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친 말로 요약하자면 아프리카는 식민지 시절에는 프랑스의 시녀였다가 해방 이후에는 첩이 되었다. 옛날에는 주인으로 군림만 하려던 프랑스가 친절하게 대해주자 해방된 아프리카도 프랑스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부터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첩으로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프리카보다 덜 혼란스럽고, 더 얌전한 데다 전망도 있어 보이는 아시아에 눈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중국이 아프리카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고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프랑스와 쓰라린 이혼 후 아프리카는 중국의 지원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았다. 프랑스인과 달리 중국인은 이것저것 까다롭게 가리지 않았다. 중국은 프랑스가 실패했던 일을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해냈다. 인프라를 재건하고, 금융 라인을 구축하고, 무엇보다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경제?정치?군사?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후퇴하고 있으며 그 혜택을 주로 중국이 보고 있다. 2007년 대아프리카 무역량은 중국이 오히려 프랑스를 앞섰다. 중국은 전년대비 22% 증가하여 690억 달러에 달했는데 프랑스는 560억 달러에 머물렀다. 프랑스 그룹들은 상수도와 목재 분야에서 발을 빼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경제적 영향력은 이제 대기업과 중기업 20여개사로 압축되었다. 또 다른 큰 변화는 많은 프랑스 기업이 사하라 이남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 영어권 아프리카 쪽으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주도권을 쥐었던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수익성이 없다고 평가되는 나라들도 있지만 중국은 어디든 가리지 않는다.

프랑스 정부가 아프리카 땅에 굳건히 뿌리내렸다고 믿는 프랑스 말과 문화는 어떨까. 애석하게도 그 분야 역시 후퇴하고 있다. 세네갈의 월로프족 젊은이들은 프랑스의 강경한 이민 정책에 자극받아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며 '아메리칸 드림'을 키우고 있다. 또한 아비장의 대형 호텔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비즈니스 협상은 늘 영어로 이루어진다. 한편 아프리카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지만, 중국 대학과 교류하고 중국문화원 설립이 확대되면서 학습자 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케냐,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인 르완다 등에 중국문화원이 있다.

사하라 사막 '우라늄 러시'

중국은 불과 4~5년 만에 리비아의 이웃나라인 수단, 차드,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와 긴밀한 관계를 쌓았고 니제르에서는 이제 프랑스 다음 가는 두 번째 무역 파트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니제르에서는 수십 년 동안 프랑스 기업 아레바가 우랴늄 탐광과 개발을 독점해왔는데, 중국과 경쟁이 붙으면서 독점 체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니제르에서는 밭에 우라늄이 묻혀 있어도 양배추를 심어서 파는 게 수지가 나을 정도로 우라늄이 쌌다. 하지만 원유 가격이 폭등하면서 원자력 에너지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2007년 말 전 세계적으로 28기의 원자로가 건설 중이며 중국은 이미 해마다 원자력 발전소 한 기씩을 새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렇듯 수요가 폭발하는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우라늄광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복잡한 인프라를 건설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앞으로 우라늄 품귀현상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2006년만 해도 세계의 우라늄 수요량이 8만 톤인데 생산량은 4만 6000톤에 지나지 않았다.

전력 생산의 80%를 원자력으로 충당하는 프랑스로서는 니제르를 놓칠 수 없다. 니제르에서 생산되는 우라늄이 프랑스 전력의 3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니제르에게도 프랑스는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아레바는 니제르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고용한 사기업으로서, 아를리트와 아쿠타 우라늄광에서 2000명이 일하고 있고 파생되는 노동인구만 적어도 20만 명에 달한다. 그런데 2006년 중국 기업 세 곳이 니제르 정부와 계약을 맺고 경쟁에 뛰어들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국은 프랑스 코앞에서 두 개 지역을 얻어내어 탐광 활동을 시작했다. 계약 성사일이 공교롭게도 프랑스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이다. 그저 일정상의 우연일까, 아니면 정말로 프랑스에게 한 방 먹인다는 의미일까.

'우라늄 러시'가 일어나기 10년 전에는 섬유산업이 각광 받았다. 그러나 1996년 IMF와 세계은행의 압력으로 니제르 정부는 시멘트, 유제품, 숙박업, 통신, 전기, 섬유 등 모든 산업을 민영화해야 했다. 국영 기업이 모두 매각 대상이 되자 호재를 맞은 건 중국인들이었다. 지난 30년간 세계 섬유 무역을 지배했던 수입쿼터제가 폐지되면서 아시아에서 생산된 값싼 의류가 쓰나미처럼 몰려와 아프리카를 강타했다. 대륙 전체의 섬유업계가 결국 휘청거렸다. 스와질란드에서는 섬유업계 전체 종사자의 42%에 달하는 1만 2000명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만 5000명(15%), 레소토에서는 1만 4000명(26%)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 모든 실패 속에 '워싱턴 컨센서스'의 신자유주의적 개혁 처방 덕분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중국이 니제르에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세계은행은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가 생길 때마다 국제 경쟁 입찰에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덕에 중국이 입찰에 참여하는 족족 따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돈을 빌려주며 유혹한다. 중국과 교섭하는 건 마치 대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과 같다. 섬유, 인프라, 석유, 우라늄 등 중국은 모든 것을 취급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안하는 것은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기세다.

한편 석유가 발견되었을 당시의 텍사스를 방불케 하는 아프리카 사막에서 프랑스는 여전히 무시 못 할 존재이다. 니제르 정부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수출할 수 있는 건 아레바의 기술력과 엄청난 투자 덕분이다. 중단기적으로 아레바만큼 생산할 수 있는 경쟁사는 없다. 2008년 1월 13일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던 수개월 끝에 아레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우라늄광인 이무라렌 광산 개발 허가권을 따냈다. 이무라렌 광산을 탐내던 중국 기업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러나 중국이 니제르 정부에 준 선물 보따리 덕분에 니제르가 프랑스에 배짱을 부리며 가격을 올릴 수 있었다는 사실로 조금은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싸구려 잡화의 습격

카메룬에서 '중국인'이란 우수함, 끈기, 실천의 화신이었다. 그들이 카메룬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중국인이 모든 경기장을 지었고 야운데의 거대한 멀티스포츠센터도 완성했다. 경찰에 신형 오토바이 30대를 기증했고 상수도망도 새로 건설 중이다. 중국인은 치료도 해주었다. 가장 낙후한 시골에까지 병원과 무료급식소를 지어주었다.

중국인들이 특별히 강한 분야는 아프리카 전역에서 팔리는 저렴하고 대중적인 잡화 제품이었다. 의류, 신발, 비누, 샴푸, 가발, 필기구, 오토바이, 펌프, 발전기, 전화기, 양철통, 시계, 안경, 주전자, 그릇, 각양각색의 장난감 등 모든 제품이 다른 곳보다 3~5배는 더 쌌다. 가난한 나라에서 싸구려 제품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과도 같아서 재고품은 금세 없어졌다. 전국 시장의 진열대를 가득 메운 '싸구려 잡화'라는 중국의 작은 병사 수백만이 카메룬을 이미 점령했다.

중국에게 카메룬은 최상의 목표이다.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 열대우림의 경계 지역이라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고, 프랑스어와 영어 이중 언어권의 중심이며, 석유?천연가스?보크사이트?주석?금?우라늄?목재가 풍부하다. 국토면적은 프랑스와 비슷한데 인구는 4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카메룬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따라 이제 카메룬에서는 중국인이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고용 계약 없이 1년 6개월 동안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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