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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四庫全書)

켄트 가이 지음 | 생각의나무
사고전서(四庫全書)

켄트 가이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1월 / 397쪽 / 28,000원



서론


청조 건륭 연간에 이루어진 『사고전서(四庫全書)』편찬사업은 황실과 학자 · 관료들 간의 조정과 협력으로 22년에 걸쳐 이루어진 방대한 학술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학술사업이 청조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치적 통합은 학술을 통한 식자층 엘리트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학술을 파괴하거나 보존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진(秦)의 시황제를 비롯한 진조의 통치자들은 일반인들이 시(詩)와 서(書), 경전 등을 소장하거나 논하면 책을 몰수하고 관련자를 처형시키도록 하였다. 반면 한조(漢朝)에서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작품과 주석서들을 부활시켰다. 이와 같이 저술과 통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기능을 하면서 중국조정의 통치권과 영향력을 유지시켰다.

『사고전서』편찬사업 역시 황실과 지식층의 이해를 반영한 협력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각 학술적 유파 간의 논쟁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논쟁은 황제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과 관련되었으며, 그것은 조정안과 조정 밖에서 공존했다. 다시 말해서 조정에 출사한 사람들과 관직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지식인들 사이의 학술적 견해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분 짓게 만든 기준이라는 것이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양상을 많이 보여주었던 곳이 한림원(翰林院)이었다. '한림'이라는 이름은 '깃털로 만든 붓들의 숲'이라는 의미이며, 그 조직은 '언로집단'으로 알려졌다. 조정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과거시험의 기준을 정해야 했던 그들은 최소한 경전해석에 대해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해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정 밖의 학자들은 권력에서 자유로운 만큼, 경전과 역사서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비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이들에 의해 오랫동안 계승되어왔던 텍스트는 도전을 받았고, 불분명한 해석들이 명료해졌다.

18세기에 대한 가장 큰 논쟁거리는 무엇보다도 『사고전서』편찬과정에서의 검열 과정이다. 역사학자들은 만주족 통치자들이 한족 신하들의 삶과 사상을 통제했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통계에 따르면, '건륭 연간의 문자탄압'이라 알려졌던 이 검열운동을 통해 2,400여 종 이상의 책들이 파괴되었고, 400~500여 종의 책은 개정되었다. 사실 건륭제는 자신의 치세와 청대 선조들의 치세를 영광스럽게 만들려고 했다든가, 지난날 있었던 한족과 만주족 사이의 불쾌한 기억들을 역사기록으로부터 삭제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군주뿐만 아니라 중국인 엘리트들 모두가 이 검열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사고전서』편찬사업에는 구성원들의 동기, 그 작업이 수행된 기간, 18세기 중국의 역사에서 그 작업이 끼친 결과를 모두 담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황제의 발의



『사고전서』편찬사업은 황제와 지식인들의 관계에 대한 역사의 복잡한 발전을 반영했다. 황실의 도서사업에 대한 관례는 송조(宋朝)에 이르면서 가장 활기를 띠었으나 원조에 들어서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몽골 통치자들의 가혹함이 지식인들을 낙향하게 만들었고, 인쇄술의 발달로 학술은 더 이상 특정계층의 독점영역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조(明朝)에 들어서면서 학술작업이 다시 부활했다. 그것은 명대의 중요한 학술사업이었던 『영락대전』편찬 작업에서 나타났다. 명태조는 경전 · 역사 · 철학서 등에서 중요한 말들을 뽑아 분류한 『유요(類要)』를 편찬하게 했다. 이를 영락제(永樂帝)가 운율에 따라 분류시키니 이렇게 개정된 판본이 『영락대전』이었다. 『영락대전』은 문헌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찾기 위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학술적 성과였다.

청조에 들어서면서 다시 학술사업은 쇠퇴했다. 청조 초기 수십 년 동안, 만주족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막대한 인구의 한족과는 다른 소수파였다. 한족들의 문인 조직이었던 문사(文社)들은 통치자의 인사권과 정책을 침해했다. 또한 만주족의 언어 · 관습 등을 조롱거리로 삼으면서, 자신들의 문어적 언어를 통해 은연중에 우월성을 드러냈다. 따라서 만주족 통치자들이 통치의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러한 언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여기에는 경전학습에 대한 필요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조 2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재위)는 중국 왕조에서 가장 인기 있던 신유학에 관심을 표명하고, 이 분야에서 창조적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등용하여 후원했다. 그러나 신유학에 대한 후원은 강점과 약점을 모두 나타냈다. 강점은 조정과 한족 학자들 사이에 가교가 건설되었다는 점이고, 약점은 후원의 제한된 범위로 인해 당파주의와 편파성을 조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편파성이 당파간 분쟁을 조장했고 이는 강희제의 후계 계승을 둘러싼 투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雍正帝)는 개인적 후원과 관련된 학술사업들을 중단시키고, 국립서원의 모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분파주의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옹정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건륭제(乾隆帝, 1735~1796 재위)는 많은 방면에서 조부 강희제의 정책을 모방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붕당 간의 대립을 염려하였다. 그가 다섯 차례나 진행한 남순(南巡)여행은 이러한 목적과 신조가 담겨져 있던 것이었다. 건륭제는 대운하를 타고 남하하면서 영향력 있는 지역의 유지들과 시 · 책 · 글씨 등을 서로 교환했는데, 이는 한족 엘리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능력과 잠재력을 갖춘 젊은 학자들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였고, 황제는 이들의 학문연구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연구의 초점이 경전에서 역사서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의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만주족 정부는 국경 일대의 군사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졌고, 황제의 측근들이 중앙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주족의 역사와 군사적 업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성격의 학술작품들이 저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한족학자들의 학문 활동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당대의 업적을 기술하는 것은 군주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자 그 시대의 번영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772년 2월, 건륭제는 회갑을 맞아 대규모의 도서수집사업에 관한 조서를 반포했다. 그는 전국에서 수집된 도서를 사고(四庫: 경전, 역사서, 철학서, 문학서) 체계로 분류할 것을 제시하고, 이러한 사업을 진행시킬 사고전서관을 설립할 것을 명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사고전서(四庫全書)』편찬사업이 진행되게 되는데, 그가 보위에 오른 지 36년 만에 시작된 일이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왜 통치 말기에 이러한 대규모의 학술사업을 진행시킨 것일까? 아마도 건륭제는 자신의 회갑과 200년을 넘긴 청조의 성공적 통치를 묵상하면서, 청조 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에 대한 개관과 함께, 자신과 조상들이 문명화된 통치에 기여한 것에 대한 최종적 선언을 원했던 것 같다.

학자들의 반응



건륭황제가 학술사업의 관행을 다시 확립한 것은, 의심할 것도 없이 통치권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이 통치할 권리를 강조한 유가경전을 통해, 자신의 지배 입지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사실 건륭제는 이전의 어떤 청조황제들보다도 중국의 역사와 경전에 대하여 훨씬 깊이 있는 지식을 지녔던 황제였다. 그는 경전과 역사에 대한 자신의 존경을 입증해왔고 이를 통해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감은 당시의 사회적 특징과도 관련이 있었다. 18세기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지식인들의 관심이 대거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상업적 부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을 설립하고 출판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후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경제적 번영으로 후원자가 대거 늘어나면서 학술연구의 부흥을 이루게 된 것이다. 특히 대규모의 소금 생산으로 크게 번영했던 양자강 하류지역은 부유한 염상들의 후원으로 학술연구에 가장 활기를 띠었다.

18세기 학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경학(經學)에 대한 고증(考證)연구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고대의 진리를 연구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토대를 닦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강조점이 신념의 문제에서 증거의 문제로 이동했다. 이전까지 사실이라고 생각하거나 단정되었던 신조는 이제 입증되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도 그러한 방법론적 인식이 과학의 성장과 연결되었다. 중국에서도 고대문헌 해석에 대한 그러한 기술들이 유용했다는 점은 분명했고, 그것은 지식의 힘에 대한 자신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이 많은 전통적 신념들을 손상시키기 시작했다. 18세기의 역사가들을 좌절시킨 것 중의 하나는 그 시대의 양적 변화가 항상 질적 변화를 주도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고증학자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구절만을 인용했고, 이전 사상가들의 보다 정치적인 작품들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무시해버렸다. 그들은 개혁을 추구하기보다는, 당시 존재하던 질서 안에서 황실의 제안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에 만족했던 것 같다.

건륭 연간의 학자와 관료 : 『사고전서』의 편찬



주균학단의 건의와 건륭 연간의 정책 결정

18세기 고증학계를 대표하는 집단은, 주균(朱筠, 1729~ 1781)과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주균학단이었다. 주균은 1745년에 시행된 순천부시(順天府試)에서 1등을 차지하여 북경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754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이때의 합격자 대부분이 『사고전서』편찬에 기여한 학자들이었다. 거의 전원이 한림원에 배속되었던 이들은 한참동안 북경의 사상계를 지배했다. 주균은 한림원에서 약 10년 동안 건륭 연간의 역사편찬 작업에 동원되었고, 이후 과거시험의 주고관(主考官)이라는 직책에 오랫동안 재임함으로써 당시 학자들의 학문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평생 500~1000명 정도의 문인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제자들과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문장을 논하고 술이 바닥날 때까지 마시면서 즐기곤 했다. 그리고 1771년 이러한 자신의 생활방식과 욕구를 지속시킬 수 있게 해주는 학정(安徽學政)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학정(學政)은 각 성의 수재(秀才) 학위를 가진 사람들을 감독하기 위해서 옹정제가 만든 자리였다. 그 직책은 공식적으로 관료직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큰 권위와 명성을 가졌다.

주균은 안휘성의 학정으로 임명되자 자신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1772년 2월, 황제가 도서수집에 관한 조서를 반포하자 그해 12월, 편찬사업과 관련한 상소를 올렸다. 주균은 이 상소문과 함께 약17종의 서적을 제출하고 네 가지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제출된 서적은 고증운동에 기여한 안휘성지역의 성과를 대표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네 가지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았다. ①필사본, 특히 송대와 원대의 필사본에 대한 보존. ②『영락대전(永樂大典)』에 수록된 자료를 통한 문헌의 복원. ③전국에 산재한 모든 석각비문에 대한 목록 작성. ④각 서적을 간략하게 평가한 해제의 작성. 이러한 주균의 제안을 처음 접한 곳은 군기처(軍機處)였다. 군기처는 정부의 기능 대부분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는 정책결정기관으로, 그곳의 대신들은 건륭 연간에 관료계의 정점에 있었다. 군기처는 주균의 상소문을 숙의(熟議)하고 그 내용을 요약하여 황제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그 어조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군기대신들의 지위는 복잡한 것이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학자였으므로 학술사업에 대한 가치와 역사적 전례들을 인식했다. 그러나 고위관료의 입장에서는 채택된 제안에 책임을 져야 했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감안해야 했다. 그들이 주균의 제안에 반대한 것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료들과는 달리 황제의 위치는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이 아닌, 조상들의 업적,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천명(天命)을 수행한다는 인식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천명은 고대 성인들의 말씀을 통한 백성들의 교화에 있었다. 따라서 고전을 수집하고 이를 간수하는 것은 군주의 정당한 의무였다. 황제는 군기대신들의 권고에 선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주균이 제안한 프로젝트를 대부분 수렴하는 방향으로 도서편찬사업을 진행시키도록 하였다. 그는 먼저 수집한 장서들을 사고(四庫)체계로 분류하도록 하였는데, 이 체계는 진조(晉朝, 265~313)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당 · 송대에 꽤 보편적인 것이었다. 건륭 연간에 이 체계를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은 당 · 송대의 영광과 자신의 치적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영락대전』을 통해 수집하는 장서의 명칭을 『사고전서』라 명명함으로써 중국 학문의 총체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업의 평가와 청조의 행정

『사고전서』편찬 작업은 근대용어로 이른바 '라우팅슬립(routing slips)'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작업 절차와 시간 및 장소를 결정하고 배분함으로써 작업의 진행과정을 추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고관에 배속된 관리는 300명이 넘었다. 편찬의 실무를 맡은 찬수관(饌修官), 교감 업무를 맡은 분교관(分校官), 원고를 필사하는 등록관(謄錄官) 등이 주요 실무진이었는데, 사고관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권력의 통로에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했다. 이들은 승진대기자로 올려 졌으며, 각종 시험관을 맡는 등의 부업으로 부족한 급료를 보충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들이 중앙의 실무진이라면 지방에서는 각성마다 순무들이 도서수집과 관련한 총괄 업무를 맡고 있었다.

순무들은 서국(書局)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도서를 수집하고 검열하여 그 목록을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으로 올라온 책들은 무영전(武英殿)이라는 곳에 취합되어 목록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복원되어야 할 서적의 편찬은 찬수관들이 맡았다. 찬수관들이 교열을 완성하여 원고를 돌려보내면 등록관(謄錄官)들이 이를 필사했고, 2인의 보조교대관이 따로 그 텍스트를 검토했다. 이렇게 재검토를 마친 원고는 총열관(總閱官)에게 최종 검토되어 황제에게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기대신들은 원고에 떨어진 누런 차(茶) 얼룩에 대해 불평해야 했고, 붉은 색 먹물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했다. 또한 일부 찬수관들은 희귀본을 감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장용 내지 판매용으로 삼기 위해 필사본을 만들기도 했다. 그에 대한 법적 규제는 없었으나 도서가 유출되는 행위는 모든 교감작업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774년 여름에는 한 찬수관이 『영락대전』에서 여섯 권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일이 발생했는데, 이 일로 인해 군기대신과 제조관들은 6개월에서 3년 치 급료를 지급정지 당했다. 이후 책의 반출을 금지하는 규칙이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사고관에서 쏟아낸 결과물은 이전의 모든 총서를 압도했다. 총 36,500책으로 구성된 7질의 『사고전서(四庫全書)』와 이 총서에 수록된 목록집인『사고전서간명목록(四庫全書簡明目錄)』. 총서의 축약본인『사고전서회요(四庫全書 要)』. 목록 해제집인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총서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품만을 수록한『무영전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板總書)』. 이러한 결과물은 그 규모나 활용도에 있어서 전례가 없었던 방대한 성과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교감상의 여러 오류에 대한 비평 또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복원될 수 있었던 책들이 간과되거나 서문은 생략되었고, 한자에 실수가 생겼으며, 지도가 잘못 그려지는 등, 원본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류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이슈는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시스템과 관련된 문제라는 것이다.

『사고전서』교감과정에서의 오류는 분교관들의 작업속도와 관련이 있었다. 황제의 주요한 관심사는, 그 사업이 신속히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들이 쌓여가면서 분교관들이 읽어야 할 분량은 한 달에 수천페이지로 늘어났고, 결국 참을성 없는 황제와 과로에 지친 분교관들 사이에서 오류가 초래된 것이다. 작업의 지루함도 영향을 끼쳤다. 『영락대전』에서 언급한 책들은 너무나도 단편적이거나 주석들이 잡다하여 그중에서 한두 줄만이 가치가 있을 언급도 있었다. 게다가 경쟁적인 한림원 분위기는 편찬 작업보다는 고위관료들의 주목에 더 치중하게 만들었다. 그 주목은 복원해낸 책의 종수와 교감한 분량이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오류는 거의 어쩔 수 없는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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