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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개혁 개방 30년

송승엽 지음 | 휴먼비전
中國 개혁 개방 30년

송승엽 지음

휴먼비전 / 2008년 7월 / 289쪽 / 12,000원

여명(黎明) (1976년- )



'뿌따오옹(不倒翁)' 다시 일어서다


1966년 중국은 최고 실권자 모택동의 비호를 받고 있던 강청(江靑, 쟝칭), 장춘교(張春橋, 장춘챠오), 요문원(姚文元, 야오원웬), 왕홍문(王洪文, 왕홍원)의 '4인방' 주도하에 6월 '문화대혁명'의 막이 오르고, 8월부터 어린 홍위병들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대륙 전체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든다. 1968년 12월 모택동의 제2인자였던 유소기의 실각, 도시 지식 청년의 상산(上山) 하향(下向) 운동 개시, 유소기의 사망(1969.11), 모택동 후계자 임표 탑승 비행기 격추 사건(1971.9), 등소평 복권(1973.4),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 개시(1973.10) 등 지도부내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0년간 지속돼온 혼미상황은 1976년에 이르러 여명의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그 조짐은 1975년 자연재해로 나타났다. 1975년 8월 하남성 주마점 지구에 엄청난 폭우로 수십 개의 저수지가 무너져 사망자 2만 6천 명, 이재민 1,100만 명, 경제손실 약 100억 위안에 달하는 재난이 발생했다. 1976년 3월에는 길림시 지역에 세계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운석비가 쏟아졌다. 이때 수집된 운석만 100여 개가 넘고 총중량은 2,600㎏에 달했다. 또한 대만에서는 대륙 본토회복을 꿈꾸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해오던 장개석 총통이 1975년 4월 5일 사망하고 불과 9개월 후인 1976년 1월에는 주은래 총리, 7월에는 주덕 전인대 상무위원장, 9월9일에는 모택동 당주석에 이르기까지 제1세대 지도자이자 건국의 주역인 거두(巨頭) 세 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로 인해 '문화대혁명'의 종말을 알리는 대반전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중국의 권력구조는 모택동을 등에 업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고 있던 '문혁 4인방' 및 그 추종세력과 그동안 총리로 줄곧 국정을 운영해오던 주은래 및 두 번째 재기한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실무관료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등소평은 일생동안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3전3기(3顚3起)한 '不倒翁(뿌따오옹, 불도옹: 오뚝이처럼 넘어지지 않는 노인이란 뜻)'으로 유명하다.



등소평의 첫 실각은 1930년대 초기 농촌을 중심으로 공산당활동을 해야 한다는 모택동을 지지함으로써 주류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모든 당직을 박탈당하고 구속된다. 그 후 1935년 모택동이 실권을 장악한 뒤에 복권되었다. 두 번째는 문화대혁명 초기 제2호 자산계급 주자파 두목으로 지목되어 고초를 치렀다. 그러나 문혁의 폐해가 심각해짐을 우려한 주은래의 막후 도움으로 1973년 모택동에 의해 국무원 부총리로 복직된 후, 1975년 초 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제1부총리,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으로 승진되어 다시 정계에 복직했다. 1976년 1월 주은래 총리 사망이후 모택동은 화국봉을 총리대행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중도세력을 규합하여 정국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1976년 4월 5일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모택동과 4인방을 비난하는 구호를 제창했고 이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행사되어 소위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문혁 4인방 세력은 그 배후인물로 등소평을 지목하고 화국봉에게 그의 숙청을 강력히 요구했다. 화국봉 측은 문혁 4인방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틀 후인 4월 7일, 당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등소평을 모든 직책에서 해임시켜 등소평은 세 번째로 낙마했다.



'문혁 4인방'은 등소평을 제거한 후 다시 화국봉 측과 권력암투를 벌이다가 1976년 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한 달도 채 안된 10월6일 화국봉 측과 엽검영의 군부세력, 왕동흥의 공안세력 연합에 의해 전격 체포됨으로써 완전 실각하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의 8대 원로 중의 하나로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엽검영의 후원을 받은 등소평은 다시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하게 된다. 1977년 7월에 열린 제10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의 전면적인 복권을 공식 발표하게 되며 등소평의 복권을 계기로 화국봉 측의 정치입지는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세 번째로 복권하게 된 등소평은 문화대혁명이란 광란으로 무너진 국가 시스템의 정상적인 회복이 시급하다고 판단, 문혁 4인방과 잔재 세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정풍을 요구하고, 구 관료와 간부들의 복권과 명예회복을 추진하는 한편, 10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입학 시험인 까오카오(高考)를 1977년부터 부활시켰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시기에 강제로 농촌에 내려갔던 도시청년 800만 명이 1978년 12월 개혁개방 정책 채택 이후 도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북경, 상해, 천진, 광주 등 대도시에는 이들 직장이 없는 젊은이들의 인파로 넘쳐나 숙식 및 취업이 시급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등소평은 과거 공상업계에 종사했던 원로들을 불러 이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외국자본이든 내국자본이든 자본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인민 생활 개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개인이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개체호가 탄생하게 된다.



개체호 장려

1978년 말 당시 중국에는 사영기업은 하나도 없었으며 개체호는 전국적으로 14만 개에 불과했다. 공산사회에서 장사꾼은 자본주의를 추구한다며 지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장사를 꺼려했다. 장사는 사회주의의 '다구어판(大鍋飯)'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낙오된 범죄자, 신체 불완전자, 무능력자들이 생존차원에서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1979년 초 농촌에서 광주시로 귀환한 룽쯔런(容志仁, 용지인)이란 지식청년이 시내에 죽과 국수를 파는 작은 점포를 열어 전국에서 가장 싼 가격인 한 그릇에 1지아오(角, 각, 중국화폐 최소 단위)에 팔아 당시 실직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많은 돈을 벌었다. 광동성 당국은 그의 사례가 귀향청년들의 취업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 이를 전국적으로 크게 선전해 정부의 작업 배치만을 기다리지 말고 개체호를 열어 직접 생계를 꾸려가도록 유인했다.



당 중앙은 개체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1980년 8월 "개체경제 발전을 장려하고 지원할 것이며, 일체의 법을 지키는 개체 노동자는 응당 사회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 중국에 개체 상업과 사영기업을 적극 운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후 도시 내에 이발, 구두수선, 칼갈이, 우산수리, 가판 음식 등의 개체호가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되었고, 1982년 말 기준으로 전국의 개체호가 261만 개에 달하고 종업인원은 320만 명에 이르렀다.



등소평은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百猫論-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 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다) 등 '진리 검증' 논쟁을 통해 중앙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78년 12월18일-22일까지 당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어 '사상 해방'과 '실사구시'의 정신에 따라 당 노선을 '경제건설 위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동 회의에서는 '계급투쟁이 모든 것을 우선 한다'는 그동안의 좌경노선과의 결별을 명확히 했다. 또한 자본주의 국가와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여 중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할 것을 결의해 3차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 개최일자가 바로 중국 개혁·개방 30년의 시발점이 되었다.



외국 자본 선진 기술 도입

등소평은 1978년 전후부터 외국 자본 및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하기 위해 서방 세계에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교류를 강화하는 작업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1977년 4월7일-13일 영국 대처수상이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였고, 1978년 8월12일 중·일 평화 우호조약이 조인되었으며, 1978년 10월22-29일 등소평의 방일이 이루어졌다. 특히 1979년 1월1일 미·중간 국교수립과 1월29-2월5일간 등소평의 역사적인 방미가 이루어졌다. 7월에는 미·중간 무역협정 조인, 12월5-9일 일본 수상의 중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중국 최초의 중외합작기업으로 비준 받은 회사는 북경과 홍콩이 합작 경영하는 『북경 항공 식품유한회사』로 1980년 4월10일 등록 번호 '001'로 설립, 비준되어 5월1일 정식 간판을 달았다. 한편 중국 당 중앙은 해외 화교 자본과 경영 노하우, 기술 유치를 위해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해 4개의 경제 특구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1979년 1월31일 광동성 사구(蛇口)에 공업구를 설립키로 하고 홍콩 자본 유치를 위해 홍콩 초상국(招商局)에 자금 유치와 공업구 운영을 위탁하는 대모험을 감행한다. 이렇게 해서 중국 최초의 공업구가 탄생하게 되었고, 이는 후에 등소평의 4개 경제특구를 구상케 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1980년 8월26일 중국 최초의 광동성 경제 특구조례가 제정, 발표되어 광동성 내 선전, 주하이, 싼토우, 대만과 인접한 복건성 하문(厦門, 쌰먼) 4개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립하게 된다. 4대 경제특구는 중앙 정부와 지방 성정부의 지원과 투자, 해외자본의 진출로 중국경제의 상징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특히 선전 지역은 홍콩과의 인접성과 홍콩반환이라는 정치적인 고려로 중앙의 집중적인 관심과 투자가 이루어져 4대 특구 발전의 시금석이 된다. 선전 특구의 경우, 의약 등 33개 분야의 공업체계가 형성되었고, 제2 ·3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외지에서 인구유입이 부단히 이루어졌다. 1979년 당시 선전은 상주인구 31만 4,100명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10년이 지난 1989년에는 191만 6,000명으로 160만 1,900명이 늘어났으며, 2002년에는 504만 2,500명에 달하는 도시가 되었다. 2002년 선전의 국내생산 총액은 2,239억 4,100만 위안으로 1979년에 비해 340배가 증가하여 경제총량이 전국 대도시 중 4위를 차지하였고, 1인당 국내생산 총액은 4만 6,030위안으로 전국 대도시중 1위였다.



굴욕의 역사를 청산하라(1979년- )



1국(國)2제(制)창안


중국지도부는 1978년 12월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한 직후 1979년 1월1일 미국과의 국교수립을 공식 선포하는 한편,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 이름으로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대만해협 양안간 상호 폭격중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통일, 3通〔통상(通商), 통우(通郵), 통항(通航)〕실현'을 제의했다. 그리고 1981년 9월30일 엽검영 국가부주석이 신화사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중국 공상당과 국민당간 대등한 담판, 3통(통상, 통우, 통항) 및 친척방문, 학술 · 문화 · 체육교류, 대만의 특별행정구화(特別行政區化)' 등의 '대만문제 해결 9가지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특별행정구 설립을 통한 『1국가 2제도』해결방안을 처음 내놓았다.

그러나 대만은 등소평의 『1국가2제도』제의에 대해 1979년 1월 상순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의 "우리는 왜 중공과 담판을 하지 않는가?" 제하의 사설을 통해 처음으로 '대대륙(對大陸) 불접촉(不接觸), 불협상(不協商), 불통행(不通行)의 3불 정책'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대만 내 각계인사들은 시간이 갈수록 『3불 정책』을 비판하면서 탄력적인 정책운영을 요구했다. 특히 대륙 출신 퇴역군인들이 정부의 『3불 정책』에 불만을 품고 시위를 하면서 대륙 친척상봉을 요구하며 '귀향 및 친척 방문' 운동을 전개했다.



1986년 5월 대만 중화항공 화물기(기장 왕시취에)의 중국 대륙망명 사건이 돌발하면서 사태해결을 위한 양측 항공사간의 접촉이 이루어짐에 따라 대만은 『3불 정책』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87년 10월 "대만 민중의 3촌 이내 대륙 친척방문, 서신왕래, 대륙 출판물 및 중약재 · 석탄 · 면 수입 등을 전면 개방"하는 내용의 『대만 민중의 대륙 친척방문 개방에 대한 규정』을 선포했다. 이 신대륙 정책은 과거 왕래 절대 금지에서 부분개방으로, 불통(不通)에서 소통(小通)으로의 변화를 보임으로써 양안관계 발전에 큰 획을 긋는 조치로 이후 대만 내 대륙친척방문 열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만 독립세력 등장

양안 간 민간 교류 진전과는 달리 정치·군사적으로는 대만 내부 갈등 및 민주화 요구와 맞물려 대만 독립주장이 나오면서 오히려 여건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대만은 전체 인구 중에 15%가량이 장개석과 함께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며, 이들 대륙 출신들이 당·정·군 주요 권력을 장악하고 85%가량인 대만인을 통치해왔다. 그러나 대만인들이 점차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정치의식도 높아져 지식층 사이에 정치 민주화 요구와 나아가서는 대만독립 주장이 제기되면서, 주요한 사회갈등 요인으로 등장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장개석 당시 중화민국 총통은 천이(陳儀)를 대만성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들 대륙에서 온 외성인(外省人)들은 대만 본성인(本省人)들을 일제의 황국화 교육을 받은 노예라고 멸시했고 이에 본성인들은 이들을 일본보다 더 악랄한 것으로 인식하는 등 상호간에 불화가 심했다. 1947년 2월28일 경찰이 외제 담배를 팔던 노파를 구타하는 것을 보고 군중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이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한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만인들이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를 벌여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대만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49년 대만으로 밀려온 장개석 정부는 5월20일 대만 전 지역을 전시동원 상태 지역으로 선포하고 일체의 언론·출판·시위·파업 활동과 신당창설을 엄금하는 등 1987년 계엄령 해제 때까지 38년간을 계엄법으로 통치했다. 장개석 본인은 1960년 초 종신총통이 되어 1975년 4월 사망 때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장개석의 뒤를 이은 장경국은 1986년 3월말 국민당 제12기 3중전회 이후 '시대와 환경 및 조류의 변화에 순응하여 새로운 관념과 방법으로 민주헌정체제상에 혁신적인 조치를 추진할 것'을 강조하고, 당내 최고위 인사 12명으로 혁신 소조를 구성, 계엄령 해제와 정당 설립 허용 등 6개항의 정치혁신 조치를 마련케 한 뒤, 1987년 7월14일 정식으로 7월15일 0시를 기해 38년간의 계엄령을 철폐하는 등 '6개항 혁신조치'를 발표했다. 장경국은 대만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대조치를 발표한 뒤 이듬해인 1988년 1월 당뇨병으로 일생을 마감한다. 그 후 대만은 각종 정당이 대거 출현하게 되었고, 이 가운데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당수 천수이삐엔이 1998년 총통에 당선되면서 국명을 '대만'으로 바꿔 유엔 가입을 시도하고, 대만 독립을 명시하는 헌법 수정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등 대륙의 중국정부와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비상과 좌절(1985년- )



개혁과 개방의 확대


농촌 개혁과 4대 경제특구 개방을 통해 개혁과 개방의 큰 성과를 얻은 개혁 세력은 1984년 4월에 14개 연해 도시(천진, 상해, 진황도, 연대, 청도, 남통, 영파, 온주, 복주, 광주, 쟌장, 베이하이)를 대외에 개방하여 경제기술 개발구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10월에는 당 제12기 3중전회를 열어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채택, 전면적인 도시부문의 경제개혁에 들어가 당과 기업의 분리, 기업의 자율권 확대, 시장 경제영역 확대와 국영기업에 계약 책임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경제발전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당·국가 고위 간부에 대한 세대교체를 진행, 1985년 임시 당 대회에서 호요방, 조자양,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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