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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지음 | 비아북
제국의 미래

에이미 추아 지음

비아북 / 2008년 5월 / 558쪽 / 25,000원

1부 고대 제국의 관용



팍스로마나, 세계인의 탄생


로마는 도시국가 로마를 건국했던 기원전 753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에 함락된 서기 1453년까지,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의 영광을 지속하였다. 로마 제국은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여 속주로 삼았는데, 로마 문명의 정점기인 기원전 70년부터 서기 192년까지 속주의 수는 40개에 달했다. 로마의 황제들은 각 지역 지배층의 도움을 받아 방대한 제국을 통치했고, 대신 각 지역 정부가 주민들을 계속 다스릴 수 있도록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았다.



최고 절정기의 로마는 야만인이나 미개한 민족 출신도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제국의 권력과 명성에 한몫할 수 있었던 독특한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로마가 속주의 여러 민족에게 관용적인 입장을 택하게 된 데에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의 편협한 태도와 인종 분리 정책은 분노를 일으켰고,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로마는 전략적인 관용이야말로 제국을 확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처음에 로마는 정복한 도시를 파괴하는 대신 평화조약을 제시했다. 조약의 기본 틀은 단순했다. 정복된 도시는 자체 법률과 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지속할 수 있었으나, 두 가지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첫째, 각 도시는 로마와는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었으나, 상호 간에는 교역할 수 없었다. 둘째, 각 도시는 로마에 병력을 공급해야 했다. 이런 평화조약 덕분에 로마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크게 성장했다.

서기 1세기경 로마는 전략을 바꾸어서 기존 토착 세력이 다스리던 영토들을 로마의 직접 지배 아래 두었다. 하지만 로마는 직접 지배하는 지역에서 급격한 경제적, 사회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후 로마는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여 유럽 중부와 소아시아, 중동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로마는 정복을 하는 동안 피정복민의 지도자에게 시민권을 주었으며, 로마 법률에 저항하는 나라는 가혹하게 응징했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는 건국 후 6세기 만에 작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했다.



로마인은 다른 민족을 자신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보았고,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교만하게 굴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야만인들을 모조리 제국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재능을 활용하여 로마 내에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대부분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정복된 민족들은 두 세대가 지나기 전에 로마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지도계층은 자식들을 로마에 있는 학교로 보냈고, 이 아이들은 자라서 로마 시민이라는 공동체의 충실한 성원이 되었다.

또한 로마인은 유용하다는 판단이 서면 서슴없이 다른 민족의 전통, 지식, 관습을 받아들였다. 이런 태도는 그리스 문화와 관련해서 가장 두드러졌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학, 미술, 조각, 건축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것을 흡수했을 뿐 아니라, 검투사 경기 같이 대중이 좋아할 만한 고유문화를 고안해 냈다. 로마 문명은 하나의 문화적인 용광로였기 때문에 각 지역의 지도 계층이 엄청난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각 지역의 귀족 계급은 인종이나 민족과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이런 정책을 통해 이들은 로마의 체계에 동화되었고 자신들의 이익이 제국의 존속에 결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시민권은 상류 계층에 국한되지 않았다. 하류 계층도 군 복무를 통해 시민 신분으로 편입되는 사람이 많았다. 피부색과 계층을 구분하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하는 정책은 로마의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제국 전역에 걸쳐 로마 시민들은 로마의 토가를 열심히 입고 다녔고, 로마식 작명법을 사용했다. 로마가 관용 전략을 쓴 목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의 관습, 생활양식, 풍습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어떤 집단이든 완전히 제국에 통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로마는 너그러운 나라였다.



관용은 로마가 세계 대국으로 발전하고 팍스로마나를 유지하는 결정적 요인이지만, 다른 한편 로마 땅에 뿌려진 붕괴의 씨앗이었다. 관용 정책은 전성기에는 로마에 이롭게 작용했다. 그러나 로마 동쪽과 북쪽의 민족들은 관용 정책 덕분에 자율성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차츰 제국의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기독교는 처음에는 불관용 정책의 표적이었고 나중에는 불관용 정책의 주요 원천이었다. 서기 303년 로마는 기독교에 대한 대 박해를 시작했다.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경은 불태워졌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끝이 났다. 이후 로마는 기독교 중심의 종교적 통합이 제국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상숭배와 이단에 대한 공격은 자멸적인 결과를 낳았고, 야만인들의 침입을 촉진했다.



여기에 서기 4세기 말부터 인종 갈등이 전염병처럼 로마를 휩쓸었다. 당시 수십만 명의 게르만족이 로마로 이주했는데 처음 로마는 이들에 대해 전통적인 관용 전략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동화는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분란만 일어났다. 결국 로마는 처음으로 피지배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로마는 종족 간 결혼을 금지했고, 야만적인 형식의 기독교를 이단이라 비난했다. 걸핏하면 이민족 병사에 대한 집단 폭행이 일어났다. 그 결과 한때 제국에 충성하던 게르만족들이 분노하여 로마에 등을 돌리고 반란 세력에 합세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 자리에는 현재 유럽 국가들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야만인 왕국들이 들어섰다.



로마의 붕괴는 로마가 도저히 관용할 수 없는 문화와 습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종교적 불관용과 인종적 불관용이 결합하면서 로마는 전쟁과 내란에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로마의 혈통, 문화, 종교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대 그리스의 실책을 되풀이한 것이다. 바로 그 시점부터 로마는 분열과 망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2부 계몽화된 관용



불관용의 덫 - 오스만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 제국은 1300년경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었다. 전성기 때 오스만 제국의 두드러진 특징은 종교적 관용이었다. 8세기부터 이슬람 통치자들은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에게 자유로이(이슬람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한도에서) 원하는 신앙을 믿을 수 있게 하였다. 이런 관용 정책은 교활한 의도를 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 성서의 민족을 보호한다는 이슬람의 원칙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런 전통 위에 세워진 오스만 제국은 계산된 관용 정책을 토대로 인종적, 종교적 구성이 매우 다양한 지역을 다스렸다.



오스만의 패권은 1520~1566년까지 통치했던 술래이만의 치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술래이만은 이교도들이 원하는 종교를 신봉하면서 자율적인 공동체를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거주지와 직업에 대한 제한도 하지 않았다. 오스만의 법률은 이교도가 검을 소지하거나, 땅을 사거나, 예배당을 짓거나, 권력을 행사하는 직위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제한 사항들은 무시되었고, 많은 이교도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요셉 나시는 제국의 중요한 재정가이자 술탄의 조언자로 외교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오스만의 관용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개종자에 대한 포용 정책이었다. 일반적으로 오스만 사회는 위계질서로 꽉 짜여 있어, 맨 꼭대기에 있는 아스케리라는 지배 계층에는 이슬람교도만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에서는 어떤 인종, 어떤 사회계층도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아스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이 무제한으로 출세할 수 있는 오스만의 상황은 기독교 국가였던 스페인의 상황과 대조적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지 오래된 유대교인조차 불순한 혈통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화형장에서 재가 될 위협을 무릅써야 했다.



오스만은 전략적인 관용 정책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우선 그들은 피정복민족의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정복당한 직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들 대부분이 종교적인 이유보다 현실적인 이유로 개종을 하였다. 포용 정책 덕분에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협조적인 피지배민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농사를 짓거나 군대에서 복무하는 인구가 늘어났고, 재능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 핵심 세력이 형성되었다.



오스만의 종교적 관용은 개종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큰 혜택을 주었다. 온갖 유형의 비이슬람교도들은 제국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특히 합스부르크 왕조를 피해 온 유대교도들은 무역 및 금융 조직만을 제공했고 이를 토대로 이스탄불, 카이로 등 오스만의 도시들은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대교도들은 과학적, 의학적 지식과 무기에 관한 새로운 기술도 공급했다. 또한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금융업, 조선업, 사치품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술래이만 치세의 전성기에 눈부신 영토 확장과 문화 발전을 이룩한 오스만 제국은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제패한 이슬람 국가로 여겨졌다. 그러나 술래이만 이후 왕위를 계승한 열세 명의 술탄들은 무능한 사람부터 우둔한 사람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의 무능함은 대재난과 다를 바 없었다. 1500년대 후반 이후 오스만제국을 약화시키는 데에는 술래이만의 눈부신 관용 정책을 유지하지 못한 후계자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민족과 이교도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사라지면서, 1500년대 말부터 상인들과 무역업자들은 점점 거세지는 종교적 비판과 예측할 수 없는 과세 및 재산 몰수에 시달려야 했다. 제국 밖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경제적·기술적 혁신은 억압되었다. 그리하여 교역은 침체되고 무기와 선박을 갈수록 낡아져 오스만 군대를 약화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최후에는 험악한 불관용적 행태가 발작적으로 벌어졌다. 제국은 1922년 완전히 붕괴될 때까지 격심한 인종적, 종교적 편협성, 분파주의, 폭력에 시달렸다.



세계 최대의 해상국가 - 영국

17세기 영국은 유럽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대교도에게 우호적인 나라였다. 영국의 유대교도는 특별세를 내야 할 의무가 없었고, 이민, 취업, 사업, 주거와 관련하여 아무 규제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유대교도가 유럽에서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영국을 기회의 땅으로 삼은 진취적인 종교 집단은 또 있었다.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이다. 17세기 루이 14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면서 약 5만 명의 위그노교도들이 영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시계, 종이, 유리, 인쇄, 금속 가공 기술이 영국으로 들어왔다.



영국에서 유대교도와 위그노교도의 공헌을 무색케 할 만한 또 다른 소수집단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를 합병한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포용할 것인지 억압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영국은 전자를 선택했고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8~19세기 영국의 영토가 놀라운 속도로 팽창하면서 식민지에서 일할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스코틀랜드인들은 대영제국에 인력을 공급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합병 이후 영국을 섬기는 노예 신세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전례 없는 자유를 누렸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1830년대 스코틀랜드는 철강 산업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했고, 조선기술은 영국 내에서 독보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중요한 발명품인 증기 엔진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20세기 초 대영제국은 전 세계 땅의 25%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이 세계 패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경쟁 상대가 없는 해군력, 상업력, 금융력에 있었다. 1689년 이후 관용 정책을 택한 영국이 세계적인 패권 국가로 성장하는데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중추적인 공헌을 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세계 최강국이 가진 최강의 금융 기구" 잉글랜드 은행이다. 이 은행을 입안한 것은 스코틀랜드인이었고, 창립 자금을 댄 것은 위그노교도이었고, 대부금을 중개한 것은 유대교도였다. 유대교도는 또한 런던 주식거래소를 설립하고 런던을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만들었다.



19세기 대영제국의 관용은 전략적인 계산을 넘어선 것이었다. 영국은 계몽주의적 관용의 개념을 채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들은 만민 평등의 원칙을 채택하고, 다양한 인종 및 종교 집단에게 본토박이 잉글랜드인과 똑같은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가진 대영제국의 정식 국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영국은 1830년 대단한 수익을 남기던 노예무역을 폐지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노예무역에 반대함으로써 영국은 경쟁국인 프랑스뿐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미국에 대해서까지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린다 콜리는 말한다. "빅토리아 시대 노예제도 폐지 운동은 영국의 국력이 축적된 군비나 자본이 아니라 종교, 자유, 도덕적 우수성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기 어려운 증거를 제공했다."



대영제국이 절정에 도달할 무렵인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은 유명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모든 피지배민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 영국인들의 권리와 욕망을 부인하고, "유럽인들과 토착민과의 완전한 평등"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여왕이 발표한 "완전한 평등"은 딱하게도 공허한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해 가혹한 통치를 계속했고 인도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정치적 대표권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인도뿐 아니라 유색인들이 사는 모든 영토에서 스스로 공언했던 계몽적인 관용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게 된 것은 관용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차 대전 당시 수십만 명의 인도 병사들이 세계 전역의 전쟁터에 파병되었고, 100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해외에서 제국에 대해 봉사했다. 인도 지도자들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전쟁이 끝나면 캐나다를 비롯해서 백인들이 거주하는 영국의 다른 영토들이 누렸던 것과 똑같은 자치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후 인도가 받은 보상은 자치권이 아니라 가혹한 탄압과 지독한 억압이었다. 그 결과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각이 자라나 전국에 스며들었고, 인도의 부를 빼돌려 영국의 제국주의적 수요를 충족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늘어갔다. 여기에 영국 출신 이주민들의 극심한 인종주의는 인도 엘리트층의 분노를 격화시켰고 이들은 차츰 대중적인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기업의 추방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두 독립국가의 탄생을 지켜보아야 했다.



과거의 패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요인은 파괴적인 인종적, 종교적 난투로부터 강력한 개방과 관용 정책으로의 극적인 전환이었다. 영국이 세계 최고 지위를 누리던 시기가 유대교도, 위그노교도, 스코틀랜드인들이 국회의원, 수상 등 영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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