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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더 뉴스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 아시아네트워크
THE NEWS 더 뉴스: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 9

쉐일라 코로넬 외 지음

아시아네트워크 / 2008년 7월 / 324쪽 / 16,000원

1장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다



피플파워에 쫓겨난 로빈후드 대통령 - 쉐일라 코로넬


나는 1980년대 초 독재자 마르코스 집권 말기부터 필리핀 대통령들을 취재해, 에스트라다가 등장할 때까지 역대 대통령의 온갖 모습을 보아왔다. 마르코스는 20년 가까이 필리핀을 집권 통치했으나, 마닐라 거리에서 3일 동안 벌어진 대규모 대중시위 '피플파워'로 1986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뒤 그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던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부인으로 정치 경험이 전혀 없던 가정주부 코라손 아키노가 민주 필리핀의 새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시민들은 곧 아키노의 무능과 무경험에 좌절했다. 말썽 많던 그녀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1992년, 시민들은 보다 전문적인 지도자를 원했는데, 국방장관과 군 참모총장으로 오랫동안 정부조직을 이끌어왔던 피델 라모스가 적임자로 보였다. 그는 필리핀을 아시아의 차세대 호랑이 경제국가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지녔고, 실제로 필리핀은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7년 말 몰아닥친 동아시아 경제위기로 희망은 사라져버렸다.

1990년대 말에 이르자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민주 정치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전통적인 정치인들에 대한 염증도 커졌고, 관공서는 부패, 범법 비호, 위선으로 가득 찼다. 정치적 비주류이면서 자칭 가난한 사람들의 우상인 에스트라다 같은 사람을 위한 무대가 마련된 셈이다. 아무튼 1998년 대통령 선거 후보 10명 가운데 '민심'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한 사람은 바로 에스트라다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는 유권자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들을 웃겼다. 결국 에스트라다는 시민들의 선택을 받아 2위를 600만 표 이상 따돌리고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첫 해가 저물어 갈 즈음부터 대통령의 부패와 방탕한 생활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여성 6명과 적어도 자녀 11명을 낳았고, 미인대회 우승자들이나 여배우들과 즐기며, 하룻밤에도 여러 여자들의 집을 전전하는 바람에 경호원들이 허둥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나갔다. 에스트라다는 가정 밖에서 '신중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대통령의 여자관계를 문제삼는 기자들과 비판자들에게 "내 부인들보다 당신들이 더 걱정하는 것 같다"고 쏘아붙였다.



1999년 초, 당시 작은 기자 조직 PCIJ를 꾸려 활동하던 동료들과 나는 대통령의 정부 운영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리는 주류 언론사들이 무시하거나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 포기한, 특히 부패와 환경ㆍ사회복지에 초점을 맞춘 탐사취재기사를 신문과 방송에 팔았다. 에스트라다 집권 1년 뒤, 계간〈PCIJ〉는 논란을 일으킨 대통령의 공직자 임명과 '밤의 내각'을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에스트라다는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고, 언론과 다소 불편하기는 해도 여전히 밀월을 즐기고 있었다. 1999년 말 규모는 작으나 열의 있는 한 신문이 논란 많은 정부의 전력 계약 문제를 보도했는데, 에스트라다는 곧 신문사를 대통령의 친구들에게 매각하라고 신문사주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또 필리핀 최대 일간지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리〉가 대통령 가족의 비행을 보도하자 광고 보이콧을 사주하기도 했다. 아무튼 2000년 새해로 접어들자 PCIJ는 지금이 에스트라다의 대통령직 수행을 진지하게 파고들 시점이라고 결정했다. 나는 PCIJ 소속 기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PCIJ 전속기자 4명과 기고자 3명은 모두 여성이었다. 논의 끝에 우리는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소유한 재산에 대해 체계적으로 조사하기로 했다. 1차 취재원 확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문건에 집중해야 했는데, 뇌물이 오고간 거래 문건을 찾을 수 없었지만 거래 자금 행방은 추적할 수 있었다. 조사 초기 전략은 에스트라다가 자산진술서에 모든 취득자산을 성실히 신고했는지 밝혀내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에스트라다가 소유 재산을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합법적인 소득으로 구입했다고 설명할 수 없는 불법 취득자산 입증에 매달렸는데, 조사 결과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이 설립자, 이사, 주요 주주로 드러난 회사가 66개나 되었기 때문에 회사 등기서류와 금융기록을 확보하는 것만 몇 달이 걸렸고, 이 문서들은 2000년 7월 보도한 첫 기사 '대통령은 자신의 재산을 설명할 수 있을까?'의 뼈대가 되었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에스트라다 가족의 다양한 주식 소유 내용을 열거한 뒤, 대통령이 자산신고서에 일부만 신고했고, 나머지 회사 주식들을 누락시켰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염려했던 대로 대부분 신문들은 우리 기사를 외면했다. 마닐라에 있는 작은 경제신문과 필리핀 중부 세부의 지방신문이 보도했을 뿐이다.



더 파고들어야 했다.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여러 제보자들은 에스트라다와 정부(情婦)들이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졌고 극심한 낭비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나와 동료들은 대통령이 정부들을 위해 짓고 있다는 웅장한 맨션들 이야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에스트라다는 실제로 몇 년 동안 소규모 주택건축 사업을 해왔는데, 조사 결과 우리는 에스트라다의 부동산회사가 메트로 마닐라 동쪽 끝자락 교외에 저택 34채를 건축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주택 건축에 필요한 허가 내용을 조사한 결과, 에스트라다의 회사가 모든 법규를 위반한 사실을 발견했다. 중대한 사건이었다. 필리핀 헌법은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의 재임 중 사업 관여를 금지하고, 헌법은 또 공직자가 된 뒤 60일 내에 보유 주식을 스스로 처분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PCIJ 기자 한 명이 직감적으로 에스트라다가 주식 처분 규정을 따랐는지 조사해야겠다고 판단했고, 조사 결과 에스트라다는 60일이 한참 지난 뒤에 주식을 부인에게 넘겼는데, 그 역시 사촌 이내 친척에게 처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위반하였다. 사실상 주식을 처분하지 않은 것이다. 아주 심각한 대통령의 위헌 행위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흥분했다. 헌법 위반은 탄핵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2008년 8월 대통령의 헌법 위반 가능성을 주제로 보도했다. 독립 외주제작사와 함께 몇 달 동안 이 기사의 영상물도 제작했다. 그런데 방영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흥분한 방송국 고위 관계자들이 프로그램 방영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으나, 프로듀서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뒤 더 많은 제보가 있었고, 덕분에 취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편 우리는 대통령의 자산 가운데 상당수가 가명과 차명으로 은닉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토지대장, 매매계약서, 건축허가서, 건축계획서를 비롯한 서류를 입수했는데, 대통령이나 가족 명의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2000년 10월 무렵 우리는 취재한 내용을 공개할 준비를 마쳤다. 한 가지 문제는 기사를 용감하게 게재할 신문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2000년 4분기쯤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며 마작 파트너인 주지사 루이스 차빗 싱손이 기자회견을 열고 에스트라다는 '불법도박의 영주'라고 비난하며 자신이 대통령에게 뇌물을 전달하는 배달책이었다고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싱손의 폭로는 필리핀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웠던 언론사 사주들도 '팔리는' 뉴스를 찾아 재빠르게 움직였다. 더 이상 좋은 타이밍을 기대할 수 없었다. 우리는 여러 날 밤을 새워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신문 연속 기사와 방송 기사 원고를 만들었다. 마침내 10월 23일 대통령이 정부들에게 수백만 페소짜리 부동산을 사주기 위해 이름을 빌린 사람들을 다룬 3부짜리 기사 가운데 1부를 보도했다. 그러자 바로 그 주에 필리핀 최대 방송도 우리 기사를 방송했다. 1개월 뒤에는 대통령 재직 기간 2년 반 동안 에스트라다가 취득한 부동산을 한 눈에 보여주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뿐 아니라 몇 주일에 걸쳐 에스트라다의 카지노 부정을 다루는 후속보도를 TV로도 방영했다.



그러자 필리핀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마닐라 교구 하이메 신 대주교가 공개적으로 에스트라다가 필리핀 국정에 대한 '도덕적 지배권'을 상실했다고 선언했다. 11월이 되자 필리핀 하원은 우리가 취재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에스트라다 탄핵 발의를 의결했다. 12월에는 국영 TV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상원이 탄핵 심판을 시작했다.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항의 시위가 거의 매일 벌어졌다. 2001년 1월 16일 에스트라다와 한편인 상원 다수파는 표결을 통해 호세 벨라르데의 여러 계좌기록이 포함되어 있는 봉투 하나를 개봉하지 않기로 했다. 대통령을 기소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들이었다. 놀라운 표결 결과 이어진 무거운 침묵 끝에 상원의장이 수치스러운 표결 앞에서 사임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리고 검사들은 항의 표시로 재판정을 떠났다. 한 시간도 안 돼 수천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경적을 울리고, 냄비를 두드리고, 촛불을 켜며 상원 표결에 항의했다.



거리로 나오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1986년 반마르코스 시위가 벌어졌던 '피플파워' 기념탑 인근 에드사로 몰려들었다. 자정 무렵 신 대주교와 아키노 전 대통령이 도착해 대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과 함께 대통령 하야를 요구했다. 4일 뒤 에스트라다는 대통령 관저인 말라카낭궁을 떠났다. 사람들이 말라카낭궁으로 행진하겠다고 위협하자 경호실에서 대통령과 가족을 뒷문을 통해 빼돌린 것이다.



2장 뉴스 인물을 만나다



오사마 빈 라덴이 당신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 라히물라 유스프자이


"여보세요, 저는 아이만 알 자와히리 박사입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파키스탄 시간으로 오후 9시 50분쯤이었다. "예, 물론 기억합니다. 자와히리 박사,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신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형제여, 저는 잘 있습니다. 우리 형제 오사마 빈 라덴이 당신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아울러 그가 전하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당신이 이 메시지를〈BBC〉와 당신 신문〈더 뉴스 인터내셔널〉에 보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모든 기자들이 제아무리 바빠도 무조건 받고 싶은 그런 전화가 지금 내게 걸려온 것이다. "말씀해주십시오. 보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공동체에게 성지 해방을 위하여 유대인과 미국인들에 맞선 성전을 촉구했습니다. 이와 함께 그는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폭파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자와히리 박사는 이것이 전부라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순간 혼선이 일어났다. "당신 누구야? 당신 누구야?" 낯선 목소리는 분명히 영어를 쓰고 있었지만, 이 짧은 말만 가지고는 미국인인지 영국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갑작스런 일로 자와히리 박사는 경계심을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 나는 자와히리 박사가 서둘러 작별 인사를 건네며, 전화를 끊기 전에 오사마 빈 라덴 인터뷰를 다시 한 번 요청했다. 자와히리 박사와 통화는 채 2분도 못 돼 끝났다. 그러나 이건 대단한 기사거리다. 기자 사회에서는 흔히 특종이라고 한다. 전화를 건 사람이 자와히리라고 판단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1998년 5월 아프간 남부 코스트 주에서 그를 인터뷰할 때 녹음해두었기 때문이다. 자와히리가 나와 통화를 끝낸 지 채 30분도 안 돼서 미군이 코스트를 공격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미군이 위성통화를 추적해 자와히리 박사와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을 찾아낸 것일까? 아무튼 이 전화 통화 이후 나는 유명해졌고, 오사마 빈 라덴의 위성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전화가 전 세계에서 빗발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오사마 빈 라덴의 위성전화번호를 갖고 있지 않았다.

8월 21일 오후 11시 자와히리 박사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미군이 아프간 남부 코스트주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 기지와 파키스탄에 있는 급진 무슬림 단체 하르카툴 무자헤딘의 여러 기지를 공습한 지 24시간이 지난 뒤였다. "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며 무슬림식으로 인사하고는 오사마 빈 라덴의 새 메시지를 건네겠다고 했다. 자와히리 박사가 다시 내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그와 오사마 빈 라덴이 나를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세상에 메시지를 전달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전쟁은 막 시작되었다. 미국인들은 응전을 기다려라." 오사마의 짧은 메시지를 자와히리가 재빨리 전했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이, 무슬림에게 이슬람 성지 해방을 위해 유대인과 미국인들에 맞서는 성전을 촉구했다고 다시 강조했다. 자와히리 박사는 코스트에서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희생자들을 기리며 덧붙였다. "충실한 신자들의 사령관,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제안을 용감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무슬림입니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1998년 5월 하순 코스트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나를 포함한 파키스탄 기자들을 초청해, 대 미국 이스라엘 '성전'을 선포하자 화를 냈다. 왜냐하면 물라 오마르는 자신이 지도자라는 것을 오사마 빈 라덴이 인정하고, 또 탈레반과 다른 나라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하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 칸다하르에 있는 물라 오마르 사무실에서 일하는 탈레반 관리들은 물라 오마르가 코스트에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을 소환해, 기자회견에 대해 심문했다고 귀띔해주었다. 물라 오마르는 자신을 무시한 오사마 빈 라덴을 질책한 모양이고, 곧장 그 효과가 났다. 왜냐하면 자와히리 박사는 오사마 빈 라덴이 물라 오마르의 지도권을 받아들였고, 물라 오마르를 '충실한 신자들의 사령관'이라 부르는 내용이 담긴 성명을 나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코스트에서의 기자회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알 카에다와 미국이 서로를 타격하면서 둘 사이의 전쟁이 전환점을 맞는 1998년 5월, 파키스탄 국경 산악지대에서 출발해 사막과 개울을 지나고 산을 넘으며 5시간을 달린 후 어둠을 기다려 한참 걸어 도착한 목적지 자와라에는 6개의 훈련 캠프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유럽인부터 중국 위구르족까지 세계 곳곳에서 온 젊은 무슬림들이 훈련받고 있었다. 아무튼 나흘을 기다린 끝에 허공에 총을 쏘아대는 요란한 환영식 속에 빈 라덴 일행이 도착했다. 힘을 과시하고 정당함을 알리는 언론 플레이에 능숙한 오사마다운 등장 이었다. 코란 암송과 예언자 모하마드 찬양으로 시작한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과 모든 무슬림들이 깊이 간직한 두 가지 문제 - 미국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에 맞서 조국을 찾으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희망과, 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한 외국군과 이슬람 최고 성지 메카, 메디나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비무슬림 군인들을 축출하겠다는 맹세 - 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그는 부인이 셋이고 자녀가 꽤 여럿이 있다는 등 베일에 싸인 개인사 일부도 밝혔다.



아무튼 탈레반 지도부가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과 두 번째 만남은 1998년 12월, 아프간 남서쪽 탈레반 탄생지이자 정신적 수도 칸다하르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탈레반 정부 외무차관 물라 압둘 잘릴이 내게 전화를 걸어 칸다하르로 빨리 와달라고 했다.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난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짐작한 대로 칸다하르에 도착하자마자,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난다는 말을 들었고, 나는 이게 특종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도착한 곳에는 대형 텐트 세 개가 사막에 세워져 있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텐트로 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존경의 표시로 일어섰을 때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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