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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적 사건

이수혁 지음 | 중앙BOOKS
전환적 사건

이수혁 지음

중앙BOOKS / 2008년 4월 / 342쪽 / 15,000원



제1장 사건의 노출과 긴장

북한 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정보


한국의 언론은 미 국무부 군축 담당 차관 존 볼턴(Jonn Bolton)의 방한에 촉각을 세웠다. 2002년 8월 28일 방한한 볼턴은 예정대로 한국 고위인사를 만났다. 외교통상부가 언론에 브리핑한 외교통상부 장관과 볼턴 차관과의 면담 내용에 따르면 볼턴 차관은 북한의 조기 핵 사찰 수용 및 즉각적인 미사일 생산, 수출 중단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지난 94년 체결된 제네바 기본 합의에 따라 북한에 대한 핵 사찰 실시가 중요하다"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볼턴은 8월 29일 힐튼 호텔 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거듭 지목하며 "북한이 '제네바 합의'의 즉각적인 이행에 돌입하지 않을 경우 제네바 합의'의 미래는 심각한 우려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사찰을 거부함으로써 플루토늄과 농축우라늄 생산에 대해 의심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볼턴의 연설에는 《워싱턴 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는 초안에 들어있다던 농축우라늄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미국 정부 핵심 인사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북한의 플루토늄 농축우라늄 생산의 문제는 앞으로 북핵문제 해결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는 조짐을 보여주는 사안이었던 것이다. 만일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다면 모든 핵분열 불질을 안전조치 하에 두도록 규정한 IAEA-북한 간 안전조치 협정 제1조'의 위반이다. '우라늄 농축 시설을 건설 중'이라고 하더라도 설계 단계에서 이러한 사실을 IAEA에 신고하도록 한 '동 협정 제42조 및 보조 약정 관련 규정' 위반이 되는 것이다.



2차 북핵 위기의 재현과 초기 대응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추진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후 미 · 북 양측은 첨예한 대립 상태를 지속했다. 미국은 북한의 '선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폐기'를 요구하면서 핵 폐기를 위한 협상이나 유인책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2002년 11월 14일 KEDO(Korea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 집행이사회는 11월 중유는 예정대로 공급하되, 12월 분 중유부터는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미국의 결정에 대해 12월 12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1994년 미 · 북 '제네바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핵 동결을 해제하고 핵 시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12월 21일부터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동결을 해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곧 5MWe 원자로, 사용 후 연료봉, 핵연료 제조 공장, 방사화학실험실처리 공장의 봉인 제거와 카메라 작동 정지 조치를 시작했다. 동시에 5MWe 원자로에 장전할 미사용 연료봉을 옮기는 작업도 진행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위반 행위에 대해 2003년 1월 6일 IAEA 특별이사회는 북한의 핵 시설 감시체제 복원을 촉구하는 '대북 결의'를 채택했다. 한편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핵 개발 프로그램 추진을 '제네바 합의', NPT(핵확산금지조약), IAEA 안전조치 협정 및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에 위반되는 행위로 규정하고 북한의 약속 위반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는다는 완고한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북한이 재처리까지 감행할 것으로 보고,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일 · 북 간 수교 교섭 채널을 통해 북한을 설득하고자 했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지만 대북 영향력과 설득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었으며 러시아는 다자간 대북 안전보장을 구상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2003년 2월 25일 신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는 북한 핵문제 때문에 한반도 위기 상황이 초래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설

2003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미국, 북한, 중국 간의 3자회담은 북한 수석대표의 발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북한 외무성 이근 미주국부국장은 4월 23일 만찬 중에 켈리 차관보에게 'pull-aside meeting(회동 장소 내에서 구석 등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곳에서 별도로 대화하는 형식)'을 제의했다. 회동 장소 구석진 곳으로 켈리를 데리고 간 이근은 켈리에게 "우리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소. 우리는 핵무기를 폐기할 수 없습니다.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과시 · 공개하는 것이나, 이전 여부의 문제, 숫자를 늘릴 것이냐 하는 문제는 미국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북한의 핵보유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충격파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더욱더 경직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이 핵보유의 사실을 언급한 지 1여 년이 지난 2004년 4월 28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정보 보고서 내용을 보도했는데, 이 보고서는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에 대한 가능성을 추정하면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수를 당초 '2개 보유 가능'에서 '최소한 8개'로 상향조정했으며,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이 2007년까지 실제 가동 단계에 들어가 이후 매년 6개씩 핵무기를 추가 생산할 수 있는 핵물질을 만들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외교통상부는 2004년 9월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제네바 합의' 이전 핵 활동을 통해 핵무기 1~2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이를 사용하여 실제 핵무기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북한의 핵무기를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북한에 핵 개발 기술을 전수한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칸(Abdul Quadeer Khan) 박사의 목격담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추측하게 만들어주었다. 칸 박사는 1999년 방북하여 평양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떨어진 어느 비밀한 장소에서 25~30m 길이의 지하 터널로 안내되었다. 칸 박사는 운반대 위에 놓인 3기의 플루토늄 핵 장치를 목격했다. 운반대는 레일로 이동하고 탄두는 직경이 약 24인치로 뇌관은 64개였는데, 이것이 진짜 핵탄두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제2장 자극과 대응

제1차 6자회담 공동발표문 채택 실패


제1차 6자회담은 역사적인 회담이므로 각국은 공동발표문에 합의하기를 희망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오후 3시 15분부터 오후 6시까지 세 시간에 걸친 합의는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합의문을 도출하기 위해 토의를 하는 과정에서 북한측은 합의 내용 중에 핵문제, 안보 문제, 일괄 타결안 등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내용이므로, 북한의 입장을 정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므로 다음날 전체 회의에서 각국 대표의 최종 발언을 끝으로 금번 6자회담을 마무리하고 공동발표문은 없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태도 돌변은 8월 27일과 28일에 열린 북 · 미 양자협의의 결과에 대해 북한이 강한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이 양자협의에서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북한은 미국에게 '핵 억지력과 운반 수단'을 과시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공동발표문 채택을 끝까지 반대한 북한이 불참한 가운데 폐회식에서 각국 대표의 종결 발언을 마지막으로 중국 왕이 부부장이 회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각국은 모두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둘째, 각국은 모두 한반도의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셋째, 각국은 모두 원칙적으로는 단계적, 동시 또는 병행하는 방식으로, 총체적으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넷째, 각국은 회담의 진행 과정에서 정세를 격화시키지 않기로 한다.

다섯째, 각국은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한다.

여섯째, 각국은 6자회담의 과정을 계속해야 한다.



제2차 6자회담 전략

2차회담 개최 일자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북한은 2004년 2월 초가 되어서야 제2차 6자회담 개최에 동의했다. 그러나 공동발표문 사전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려워 보였는데, 넘어야 할 난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과 중국 안의 합의 전망이 불투명했는데,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 Complete, Verifiable and Irreversible Dismantlement)'라는 표현의 명기를 완강히 견지하고 있었고, 또한 북한이 제안한 '핵 동결 대 상응 조치'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리비아의 핵 프로그램 관련 시설 및 물질 조기 반출 사건과 파키스탄의 칸 박사가 북한과의 핵 협력을 진술한 사건이 회담의 부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료일을 정하지 않고 2004년 2월 25일에 개최된 제2차 6자회담은 공동발표문을 만들기 위한 대표단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은 공동발표문은 합의되지 못하고 의장발표문으로 낙착됨으로써 2월 28일 11시에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끝났다. 제2차 6자회담에서 공동발표문을 작성하기 위해 중국이 각국의 의견을 접수하여 작성한 초안은 핵문제 해결의 목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계로서 핵 활동 중단, 회담의 지속 등에 대한 토의, 서면 안전보장 문제, 핵 동결과 상응 조치 문제, 회의 정례화와 실무그룹 구성 문제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 문안에 대해 수정 요청을 해와서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한 · 미 · 일 · 중 · 러 5개국은 이미 본부로부터 문안에 대한 승인이 있었으므로 폐회식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문안 수정을 추진할 수는 없다며 북한의 수정 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6개국은 공동발표문이 아닌 의장발표문으로 결정했다.



제3차 6자회담의 희망과 좌절

2004년 6월 23일부터 제3차 6자회담이 개최되었었는데, 그동안 제2차 회담까지 일부 원칙적인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각국의 입장을 구체화한 것은 논의 지속을 위한 기반 조성과 상황의 급격한 악화 방지 측면에서 성과였다. 검증을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고, 핵 폐기의 첫 단계 조치로서 '동결 대 상응 조치'를 논의해 나간다는 데 북한을 포함한 참가국들 간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 대선이었는데, 미국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미 · 북 양측이 적극적으로 접근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도 해결책 제안에 적극성을 보이다가는 북한이 정치적 이유에서 강수를 둘 경우 부시 진영에는 타격이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부시 정권으로서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대북 양보로 비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반면 북한 입장에서는 유화적으로 접근하여 부시 행정부에 성과를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각국과 협의한 결과를 보면 검증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투명하게 달성해나가며, 핵 폐기의 첫 단계 조치로서 '동결 대 상응 조치'를 논의해 나간다는 데 북한을 포함한 참가국 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미국은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대칭성(symmertry)', '동시성(simultaneity)'에 따라 '말 대 말(Commentment for Commentment)', '행동 대 행동(Action for Action)'을 추진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안정보장 제공 방식에 대해 한 · 미 · 일의 다자간 서면 안정보장 입장을 거부하고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문서 보장을 요구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미국이 견지하고 있는 '대 북 적대시' 정책은 북한으로서는 회담 전체의 기조 문제였으며,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변화시킬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 북한의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제 요소로 인하여 제3차 회담의 논제는 제4차 회담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흘러갔다. 결국 제3차 회담에서도 공동합의문 대신 제2차 회담처럼 '의장 성명'을 채택함으로써 제3차 회담은 폐회되었다.



미국 대선전 제4차 6자회담 개최의 꿈

2004년 6월에 개최된 제3차 6자회담에서 차기 제4차 회담은 2004년 9월 말에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04년 8월 18일에 미국 위스콘신주에서 열린 유권자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지칭해 '폭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은 부시 대통령을 히틀러를 무색케 하는 폭군 중의 폭군이라고 공격함으로써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험악한 관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북한은 9월 10일 북한을 방문한 리장춘(李長春)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변함이 없음을 주지시켰다. 북한은 6자회담에 응할 경우 부시 대통령의 대선 전략에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될 것이며, 한국의 우라늄 추출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북한인권법안의 미 하원 통과, 탈북자 대량 국내입국 등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명함으로써 제4차 6자회담 개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 대선과 연계되어 6자회담은 상당 기간 열릴 수 없어 보였으며, 기껏해야 미국 대선 직후인 11월 또는 12월에나 개최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회담개최가 지연됨에 따라 북핵문제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기 위한 방안 협의도 추진력이 약화되었다. 그동안 한국은 제3차 6자회담 직후 미국과 북한 양측 안을 일부 절충하여 제4차 6자회담에서의 한국 제안을 구체화한 안을 마련했으며, 8월 중순부터 북한의 부정적 태도로 실무회의 조기 개최가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됨에 따라 한국 구상을 중심으로 관련국과의 협의를 시작했다. 한국은 북한을 제외한 4개국과 합의를 마치면서 각국의 입장을 정리했는데, 우선 북한의 핵 동결을 통해 상황 통제 체제를 구축하고, '핵 폐기 및 상응 조치'에 관한 세부 방안은 동결 기간 중에 마련한다는 단계적 해결 방안을 성안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국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마침내 9월 말 제4차 회담을 거부함으로써 제3차 회담에서 김계관 외무성부상의 "약속은 지킨다"는 말은 그때의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들어냈다.



제3장 허상과 실상

농축우라늄에 관한 영국 연구소의 분석


영국 전략문제연구소(HSS)의 게리 새모어(Gary Samore) 연구원은 2004년 1월 「North Korea's Weapon Programs」라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이것은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었다. 새모어는 북한이 독일로부터 구입을 시도한 알루미늄 튜브는 파키스탄의 제2세대 원심분리기 모델인 P-2(또는 PAK- ) 원심분리기 외피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200t으로는 3,500개 원심분리기 외피 제작이 가능하며, 3,500개 원심분리기는 핵무기 3개 제조에 충분한 양인 고농축우라늄 75kg을 1년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또한 그는 북한은 아직 원심분리기 시설 완비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아울러 북한이 영변에 우라늄 변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여기에서 5MWe 원자로 핵연료 제작용 4불화우라늄(UF4) 생산이 가능하지만, 북한이 이 시설에 기초하여 어느 정도의 UF6(6불화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그러나 새모어는 북한이 영변 이외 별도의 장소에서 UF6 생산 시설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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