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論
마틴 더퓌, 케이스 보클먼 지음 | 늘봄
체인지! 그 담대한 희망 오바마 론
마틴 더퓌, 케이스 보클먼 지음
늘봄 / 2008년 3월 / 314쪽 / 15,500원
남부에서 주 전체로2004년까지 버락 오바마는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일리노이주 주 의회 의원에 불과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경선에 도전했을 때 그의 앞에는 많은 정치적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름이 오사마 빈 라덴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04년 말, 그는 일리노이주 역사상 가장 큰 득표율 차이로 상원의원 선거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전국 언론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록 스타 상원의원이 되어 있었다. 무명의 신참 정치인에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거물이 된 것이다.
오바마는 1961년 하와이에서 케냐인 아버지 버락과 미국 캔자스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당시 하와이대 학생이었다. 오바마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석사를 하러 하버드대로 떠났고 부모는 이혼했다. 어머니는 인도네시아 출신 남자와 재혼했고,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6~10세 사이에 살았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목격한 빈곤과 불평등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후 하와이로 다시 돌아와 유명 사립학교인 포나후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고등학교 시절 인종적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오바마는 1983년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로 옮겼다. 슬럼가의 지역사회개발 프로젝트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지역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인권 운동, 풀뿌리 운동을 믿었다. 현장 경험은 때론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그에겐 정치의 실상에 대해 알게 해준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경험을 통해 공공선이란 개념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분쟁이나 대립하는 가치관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988년 오바마는 시카고를 떠나 하버드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인권법 변호사로 시카고로 돌아와서 계속 지역사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96년 그는 주 의회 상원의원에 출마하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2004년까지 그는 공공보건복지위원회와 사법위원회에 소속되어 일했다. 그리고 공화당을 포함하여 모든 의원들의 생각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버나딘 법안" 수정안을 발의했지만 통과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수정안은 일리노이주 거주자에게 의료보험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복지에 관련해서는 소득세 감면안을 제정했고 사법 부문에서는 사형제도 개혁 외에 경찰의 피의자 조사 때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관행을 모니터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하였다. 그가 찬성한 법안들을 보면 그의 정치적 입장이 다분히 진보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그의 성향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자신의 선거구 성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주 상원의원 초기 시절부터 그는 더 높은 직책을 목표로 했다. 2000년 일리노이주 현역 하원의원 바비 러시의 자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권자 대부분이 민주당 지지자인 터라 당내 경선이 당선의 분수령이었다. 러시는 오바마를 61대 30으로 대파했다. 비록 당내 경선에서 졌지만 이를 계기로 오바마는 떠오르는 정치 스타란 평을 얻었다. 흑인, 진보계층, 무당파에게 골고루 지지를 얻어 막강한 정치적 연합 전선의 기반을 마련했다. 동시에 일자리, 보건정책, 국가 안보 등 국가적 이슈를 다루지 못하는 주 상원의원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선되지 않으면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피오리나에서 전략이 먹혀들 것인가?2004년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자리에 도전한다. 현역 의원인 피터 피츠제럴드가 출마를 포기했기 때문에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모두 열다섯 명이 출사표를 냈고 그중 일곱 명이 백만장자였다. 오바마는 경선 레이스에 두 번째로 뛰어든 후보였다. 초기에 오바마는 흑인과 부유층 주택가 거주 진보계층을 묶어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시카고 북쪽 주택가와 남부 대학가가 공략 지역이었다. 이라크 개입에 반대하는 오바마의 뛰어난 연설에 감동받은 반전 운동가들이 그를 지지했다. 경쟁자인 하인스가 민주당 조직의 도움을 받은 반면 오바마는 스스로 흑인 공직자층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당의 진보계층 인사들도 조직화해냈다. 선거운동이 진행될수록 그의 지지계층은 넓어져 갔다.
다른 후보들처럼 오바마도 약점과 장점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약점은 그가 한 번도 고위직에 걸맞은 후보임을 증명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흑인에게 어필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저소득 노동계층 흑인들은 오바마에 대해 '흑인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인 권력구조와 가까이 있는 흑인에 대한 불신에서 파생된 것이다. 흑인 민족주의자 일부는 오바마가 완전한 흑인이 아니라고 수군댄다. 어머니가 백인이며 백인 진보층의 귀여움을 받는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통 흑인 기득권 당 세력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오바마가 먼저 높이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이름 또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과 이름이 모두 희한한데다 성은 9.11 테러의 총 지휘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과 한 글자 차이였다. 잠깐 동안 공화당측이 오바마의 얼굴을 빈 라덴의 몸에 붙인 이미지를 올린 웹사이트를 만들었다가 사과하고 이를 내린 일도 있었다.
오바마는 다른 후보가 갖추지 못한 장점도 있었다. 우선 약점인 자신의 이름을 강점으로 만들었다. 유세 중에 그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을 '알라바마'나 '요마마'로 부른다며 자신의 이름을 농담의 주제로 삼았다. 여기에 그의 이름은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보다 아프리카 이민자 출신에게 더 우호적인 일부 유권자에게 어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하버르 로 리뷰》 최초의 흑인 편집장을 했다는 성취적 이력을 강조하는 선거운동을 펼치면서 이름이 알려지자 오바마는 흑인들과 중산층, 노동자층 백인들에게 점점 더 인기를 끌 수 있게 되었다. 경쟁자들은 돈과 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오바마는 개인적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의 덕을 보았다. 오바마의 개인적 매력은 애초에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던 층을 열성적 지지자로 바꾸어놓았다.
예수님도 오바마는 찍지 않을 것이다민주당 경선 이후 시카고 트리뷴은 "일리노이주가 한 세대에 한번 볼까 말까한 상원의원 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사설에 썼다. 오바마와 맞선 후보들이 문제가 있거나 그와 맞설만한 후보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싱겁게 승리할 것이란 결론이 나왔고, 따라서 정책에 관한 뜨거운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화당의 유망한 경선 승리자였던 잭 라이언은 선거에 나갈 준비가 덜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비공개였던 이혼 기록이 공개되자 아예 출마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라이언이 사퇴하자 공화당은 그를 대신할 후보를 찾으려 했지만 후보를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쟁력 있는 후보들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반면 경선에 참여해 진 일부 후보들은 자신을 내세웠지만 당에 의해 거절당했다. 공화당은 라이언을 대신하기 위해 연방 검사, 전직 시카고 베어스 출신 미식축구 선수, 70년대 록 스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놓고 검토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인물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작가 겸 매릴랜드 상원의원 후보 앨런 키이스였다.
이 기간 동안 오바마는 마치 경쟁 후보가 있는 것처럼 선거운동을 계속했다. 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남부 링컨에서는 "현 상태에선 절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다른 선택이 없을 듯합니다"라고 조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 현역 주 상원의원이었기 때문에 회의에 참여해 중도적 투표 성향을 보이며 주 전체에 어필하려 애썼다. 오바마의 위치는 이 시기를 거치며 급상승했다. 일리노이주 밖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 단위 언론이 그를 정치계의 메시아로 비유하는 기사를 종종 싣곤 했다. 그는 선거자금도 계속 늘려 나갔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와 마이클 조던 등 유명인들이 그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했다.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 때 엄청난 주목 받는 연설을 하면서 그의 지명도는 크게 올라가게 되었다.
오바마는 개인적인 스토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양떼를 치면서 컸으며 외조부모는 연방정부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시켜 "다른 국가였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과도한 개인주의를 비판했다. "시카고 남부에 글을 읽을 수 없는 어린이가 존재한다면 그가 내 자식이 아니라 해도 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만약 아랍인 가족이 아무 이유 없이 체포된다면 이는 시민 자유를 위협하는 일이다. 내가 동족을 지켜준다는 이 근본적인 믿음이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원천이다."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인을 통합할 수 있는 중도적 가치를 강조했다.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비판한 후 오바마는 "민주당 사람도 위대한 신을 숭배하고 공화당 사람도 연방요원들이 인권을 침해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반대한다. 이라크 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애국자이며 찬성하는 사람도 애국자다. 우리는 같은 나라의 국민이다"라고 말했다. 연설은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그는 하룻밤 사이에 스타로 부상했다. 갑자기 몰리는 언론의 관심 덕을 보면서도 오바마는 그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거란 전망 등 갑자기 높아진 기대 수준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
오바마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공화당은 메릴랜드 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적이 있는 보수주의자 앨런 키이스를 후보로 내세웠다. 키이스는 선거운동을 하면서 종교관과 윤리관 특히 낙태를 둘러싼 자신의 보수적인 입장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대조적으로 오바마는 경제와 의료보장 같은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를 내세웠다. 유세에서 키이스는 오바마의 낙태 관련 입장을 비판하면서 "예수님도 오바마를 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키이스의 논쟁적이고 대립적인 태도는 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투표가 끝난 결과 오바마는 키이스를 70대 27의 득표율로 눌렀다. 이는 일리노이 상원 선거 사상 최대 득표율 차이였다. 그는 선거 승리 연설에서 "정치 문화를 바꾸고 미국의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다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오바마는 공화당 유권자들로부터 40%를 득표했고 자칭 보수주의자들로부터도 30% 가량의 표를 얻었다. 특히 남부지역 보수주의자들이 오바마에게 투표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이들은 오바마와 많은 정책적 이슈에서 입장이 달랐지만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오바마를 선택했다. 이들은 오바마가 네거티브 공세를 폈으면 투표장에 가지 않았을 사람들이었지만 오바마의 정책에 기반을 둔 선거운동에 이끌려 표를 던진 것이었다. 반면 키이스는 흑인층을 타깃으로 한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흑인층에 어필하지 못했고, 오바마가 이들의 표 90% 이상을 쓸어갔다.
돈은 정치에서 모유와 같은 존재 상원의원 선거에 나가기 전 오바마가 모은 정치 기부금 모금 기록은 50만 달러였다. 선거 와중에 그는 엄청난 규모의 개인 재산을 쓰고서라도 당선되고 싶어 하는 백만장자와 맞닥뜨렸다. 또한 기득권 정치 세력에 커넥션이 많고 지명도도 더 높은 후보들과도 싸워야 했다. 2004년 선거운동은 다른 해보다 6개월 빠른 2002년 여름 시작되었다. 가장 큰 도전은 주 전체를 아우르는 선거운동과 TV 광고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매우 기민한 선거 전략을 갖고 있는 숙달된 기금 모금자란 사실을 증명했다.
오바마는 다른 후보들과 다르게 직접 나서서 정치 자금을 모금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잠재적 기부자들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돈을 기부해 달라고 요청했고 기부를 이끌어냈다. 어떤 주엔 주당 20~30시간을 전화로 기부금을 요청하는 데 쓰기도 했다. 그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마치 그와 오랜 친구인 것 같은 기분이 들도록 했다. 오바마는 2003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87만 달러를 모았다. 그가 성공적으로 정치 자금을 모으자 많은 전문가들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오마바를 위한 후원금 행사에 참여했던 그레고리 크레이그는 오바마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옆에 있으면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 이슈에 대해 입장이 다른 걸 알면서도 그에게는 화가 나지 않게 하는 묘한 뭔가가 있었다."
2003년 가을 오바마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후원금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2004년 2월 남부 유권자들에게 맞춤 정치 광고를 하기 위해 돈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그가 경선 전까지 쓴 돈은 450만 달러에 달했다. 전체 선거 비용 중 85%를 두 달 반 동안 집중적으로 투입한 것이다. 오바마는 경선에서 이기는 데 570만 달러를 썼다. 한 표당 8달러 75센트 꼴이었다. 2위 하인스는 총액 550만 달러를 써 한 표당 18달러 85센트, 3위 헐은 3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들여 1표당 223달러를 사용하였다. 오바마는 시카고뿐 아니라 보스턴, 뉴욕, 워싱턴 DC에 사는 젊고 여유 있는 흑인 전문가 집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재계 리더들도 선거 지원을 위해 적극 나섰다. 후원금을 낸 사람들의 리스트도 쟁쟁했다. 가수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와 스티비 원더, 배우 크리스 락과 운동선수 마이클 조던 등이 망라돼 있었다.
후원금을 낸 3천명의 개인 후원자들 중 2/3 이상은 25달러 이하를 낸 사람들이었다. 경선 후원금의 12%는 1인당 2백 달러짜리 후원금이었고 이들이 모여 74만 달러가 된 것이다. 그는 술집에서 젊은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 모금 행사를 열기도 했고 힙합 콘서트나 시 낭송 대회에도 나타나 지지자들을 모았다. 대학 캠퍼스에서 지지자 모임을 조직해냈고, 교회 청년 모임과도 협력했다. 그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기호나 문제를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를 지지했다"고 말했다. 상원의원 선거를 위해 그가 모은 돈은 1천 5백만 달러, 선거 운동에 실제 쓴 돈은 1,430만 달러에 불과했다. 후원금의 68%는 일리노이주 주민들이 냈다. 대조적으로 경쟁자였던 공화당 후보의 정치 후원금은 67%가 외지에서 온 것이었다.
2006년 오바마는 미래 군자금으로 또 2백만 달러를 모았다. 그는 또한 호프펀드라 불리는 리더십 정치 단체를 설립했다. 이런 단체는 선거운동본부보다 자금 모금이나 자금 사용이 덜 엄격하다. 한 개인이 리더십 정치 단체에 기부할 수 있는 상한선은 3만 달러지만 후보 선거운동본부에 기부할 수 있는 상한선은 4,200달러에 불과했다. 리더십 정치 단체에서 모은 돈은 후보 자신의 선거운동에는 쓸 수 없지만 다른 후보들의 유세 지원 여행에 지출하는 비용이나 직원 월급, 다른 지역에서의 여론 조사에는 쓸 수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지명도를 높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2007년 2월까지 호프펀드는 44O만 달러를 모았고 이중 380만 달러를 다른 후보에게 후원했다.
록 스타와 비슷한 인기, 카리스마,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오바마는 2007년 1분기까지 2,570만 달러의 어마어마한 대선자금 모금에 성공했다. 오바마는 연방 로비스트나 정치 단체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