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여자 힐러리론
길 트로이 지음 | 늘봄
세계 최고의 여자 힐러리論
길 트로이 지음
늘봄 / 2008년 3월 / 359쪽 / 18,000원
프롤로그
2005년 1월, 민주당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승리로 인한 충격에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을 때, 힐러리 상원의원들은 낙태 합법화의 손을 들어준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32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을 했다. 힐러리는 뉴욕 주 패밀리 프로바이더즈(New York State Family Providers)라는 단체를 언급하면서 진보 민주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판결이 다시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뉴욕 주 상원의원으로서 그녀는 낙태가 '슬프고 비극적이기까지 한 선택'이며 미국의 낙태 열풍은 '우리 교육과 의료, 예방 시스템의 실패'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힐러리는 찬반이 극렬히 깔린 이 문제를 놓고 '낙태율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은 애초에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이는 일입니다'라며 중도적인 말로 무마했다. '낙태에 대한 공감대를 추구하는 클린턴'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이 헤드라인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2005년 뉴욕에서 '클린턴'은 분명히 상원의원인 힐러리 클린턴을 지칭하는 이름이지 전 대통령이 남편 빌 클린턴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헤드라인은 힐러리를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희망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더 비판적인 워싱턴 타임스는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은 지난해 대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가치적 이슈에 대해 중도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낙태, 이민, 가치에 기반을 둔 제안들에 대해 우파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고 있다'고 논평했다. 이 보수적 신문은 힐러리의 이러한 행보를 회의적으로 보면서 미국가치협회의 회장이자 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게리 바우어의 성차별적인 암시가 섞인 말을 인용했다. "나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궁극적인 화장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하고 직접 써내려갈 때 많은 친구들과 동료,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네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는 수업 중 학생들에게 세상에 어리석은 질문이란 없다고 말하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네 가지 질문은 모두 현대 미국의 정치적 담화가 얼마나 유감스러운 상태인지, 특히 힐러리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한심한 상태에 머물러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이에요? 그녀{{ 세계 최고의 여자 힐러리論}}를
좋
아
해
요
, 싫어해요?' 이 질문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유감스럽고 극단적이며 과도하게 감정적인 평가 방법을 대변하고 있다. 이는 '에버트와 로에퍼(미국의 유명한 영화비평 프로그램: 역자 주)'에서와 같이 다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내리는 것으로만 정치적 인물을 평가하려고 하는 것이다. 역사가들은 힐러리의 강점과 약점, 성공과 실패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녀를 인터뷰해봤어?'라고 묻는다. 이는 우리 '미디어 중심' 시대에 저널리즘적 테크닉에 대한 맹신적 믿음을 드러내면서 능수능란한 유명인을 상대하는 인터뷰의 한계를 간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또한 이들은 역사가가 가져야할 일정한 거리감도 이해하지 못한다. 좀 더 개방적이고 역사적인 질문이라면 '무슨 자료를 보면 그녀의 본질과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정도쯤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레즈비언이에요?'라는 점에만 관심을 가진다. 이는 선정적인 가십에만 침몰되어 정치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벌이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2008년에 대통령이 될까요?'라고 묻는다. 이는 역사적 통찰력은 뒤로 한 채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며 강박적으로 정치적 경주의 승자를 끊임없이 추측하는 우리 정치문화의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힐러리 클린턴의 완전한 전기가 아니다. 그녀가 백악관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현대의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시도되는 더 넓은 지적 연구의 일환인 것이다. 나는 힐러리의 마음을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역사적 자취를 평가하고 싶었다. 역사적인 힐러리 클린턴을 찾아서 그리고 퍼스트레이디로서의 힐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은 그녀 이전의 퍼스트레이디들의 경험도 고려하는 한편, 힐러리의 삶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역사적 요소도 함께 담았다. 이렇게 퍼스트레이디 힐러리 클린턴의 좌절과 기쁨을 연구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1997년에 발간한 책인 『미국 정치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 부부의 흥망성쇠』(Affairs of State: The Rise and Rejection of the Presidential Couple since World War Ⅱ)와 2000년에 증보된 『대통령 부부: 트루먼에서 클린턴까지』(Mr. and Mrs. President: From the Trumans to the Clintons)에서 클린턴에 대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나는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의견도 여러 가지 형태로 발표해왔다. 그 중에서도 「사회과학 저널」37호(2000)에 게재된 '부부 대통령? 공동통치의 흥망'(Mr. and Mrs. President? The Rise and Fall of the Co-Presidency)은 1999년 4월 토론토에서 열린 미국역사학자협회 연례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에 기초하고 있다.
1. 파크리지에서 리틀록으로, 골드워터걸에서 빌러리로
1945년, 엘리노어 루스벨트는 자신이 불우했던 유년시절을 이겨내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것을 전설적 일화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것은 20세기 중반 미국의 고전적 전설의 하나가 되었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지만 할머니에게마저 못생겼다고 조롱당하고 무시당했던 한 소녀가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바람대로 널리 퍼져나갔다. 가난뱅이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운오리새끼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백조로 자라났다는 이야기는 확실하다. 이는 불굴의 정신만 있다면 미국이란 좋은 토양에서 역경을 극복한 벤자민 프랭클린과 호라시오 알저(135권의 소설을 쓴 19세기 미국작가. 작품의 대부분이 가난뱅이가 성공하는 과정을 다뤘다: 역주)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엘리노어가 퍼스트레이디로 임기를 마친지 반세기 후에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비슷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베이비붐 세대에서 성장한 어린 딸은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골드워터걸'(힐러리는 고교시절 공화당 정치인 골드워터를 신봉했다: 역주)은 웰슬리대의 히피가 돼버렸고, 중서부 촌뜨기는 이상적 아동권익의 옹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플롯은 촌뜨기 소녀가 성공한다는 식의 서사구조에다 트렌디하면서도 1960년대 지향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모든 베이비붐 세대는 히피가 되었다거나 좌파로 전환했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부응하여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성장시절에 관한 챕터에 '한 미국인의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이야기는 그 세대의 전형이 암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힐러리 스토리를 단순히 의식 있고, 타고난 진보주의자인 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로 본다면 그것은 너무 이념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기자들은 '힐러리 로댐의 급진성은 그 세대의 궤적을 따르는 것이다'라거나, 웰슬리대 1969년도 졸업생인 누나는 '세상에 대해 굉장히 진보적으로' 변했다는 그녀의 남자 형제들의 말을 인용하는 걸 즐겨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꾸준히 균형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와 실용주의, 진보주의와 출세주의, 여성성과 개성, 페미니즘과 전통주의 사이에서 말이다. 대학시절 남자친구에 따르면 그녀는 '승리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한다. 야망, 권력의지, 그리고 타협을 이끌어내는 그녀의 본질을 모르고 말하는 것은 삼차원적 전기를 이차원적 포스터로 축소하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정치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진짜 삶보다는 성인 성녀들의 연대기에나 어울릴 것이다. 힐러리 로댐은 1947년 10월 26일 전후 미국의 풍요로움 속에서 태어났다.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과 토머스 드웨이 주지사가 자신 있게 공화당으로의 정권교체를 기대하고 있었고, 민주당 출신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전후 군대해산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놓고 공화당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유럽에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샤를 드골이 권력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중동에선 아랍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설정하기 위한 유엔 투표를 놓고 다투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들이 카슈미르에서 전후 식민지 배열 문제를 놓고 충돌하고 있었다.
2. 나는 그저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
1992년, 캠페인은 의혹을 벗는 달콤한 설욕이 되어야 했다. 리틀록에서 『남부 미인 원칙』(로레인 데스프레가 쓴 핸드북. 남부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제안했다: 역주)에 따랐던 행동이 안티 세력을 만든 다음이었다. 외모와 이름과 정체성마저도 바꾸라는 압력이 있었다. 결혼생활 몇 번의 위기, 속임수와 배신으로 정신적 상처를 많이 겪은 다음이었다. 1987년 빌의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아칸소 주에 모였던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클린턴의 여자들'이라는 긴 리스트와 뒷전에 가린 대통령의 사명이라는 수모뿐이었다. 이제 1992년 선거 바로 전에, 캠페인에서는 모든 것을 바로잡고,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그렇게 원하던 전국 무대에 등장하며 미국을 환호하게 할 대단한 기회였다. 백악관 바로 문 앞에서 힐러리와 남편은 그들의 가장 큰 실수, 가장 끔찍한 순간들, 끔찍했던 결혼생활의 상처들이 다시 헤집어지는 고통에 직면해야 했다. 1992년 여러 낙인을 찍히며 롤러코스터 타기, 한 시대를 여는 정치적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변절해야 했던 개인적 소신들, 이런 어울리지 않는 혼합은 대통령으로서 각광받은 클린턴 집권기에도 계속되었다. 엄청난 정치적 권력과 그 뒤에 도사린 끔찍한 개인적 고뇌의 결합은 클린턴 정권의 특징이면서 결국 대통령직과 퍼스트레이디직은 그 결합에 내내 발목이 잡혀 있었다. 그나마 힐러리와 그녀가 수행한 상식을 벗어난 역할과 심사숙고한 계획이 가혹한 현실보다는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빌 클린턴은 어머니가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립스틱, 아이섀도 바르기 등 '공적 얼굴'에 들이는 엄청난 화장 시간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힐러리 또한 '공적 얼굴'을 위해 화장을 해야 했다.
힐러리는 주지사 부인으로서 그동안 살아남기 위해 써왔던 모든 전략과 이론을 1992년 캠페인에 총동원했다. 때론 못처럼 뾰족하고 거칠게, 때론 어떤 결심이나 원칙도 타협할 것처럼 유연했고, 때론 공격을 가차없이 쳐내는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고, 때론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오해하게 만드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 양극적인 방어체계는 그녀를 돕기도 했으나 신랄한 반대와 비평을 만들어 내었다. 힐러리의 비평가들은 다소 역설적이고 양극적인 두 가지로 그녀를 공격했다. 하나는 그녀를 급진적 좌파 이론가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을 쥐기 위해 어떤 말이든 하고 무엇이든 기꺼이 하는 교활한 정치가로 보는 것이다. 때로 힐러리는 너무 고집이 세다는 비난을 들어가며 원칙을 지켰다. 이런 이념적 완고성은 의료개혁 논쟁의 대단원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이런 타협을 거부하는 힐러리의 태도가 결국 자신의 시대에 미국 의료제도 개혁을 위한 그 동안의 가장 실용적이고 초당파적인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때로 그녀는 정치적 생존과 대중의 승인을 얻기 위해 자신의 핵심적 이상을 버릴 줄 알았다. 이는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남편을 방어하고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를 당황하도록 만들기 위해 결혼, 페미니즘, 전통주의에 관한 레토릭의 홍수를 쏟아낸 데서 분명히 나타났다. 빌 클린턴이 1991년 10월 대통령 출마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약속했다. 그는 힐러리를 '아내이자 친구 그리고 아칸소와 미국의 어린이와 가족의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의 동반자'라고 소개했다. 더 나아가 클린턴 주지사는 베이비붐 세대답게 독특한 파트너십을 내세웠다. '하나를 사면, 하나는 덤'이라며 그는 의기양양했다. 힐러리도 말했다. '당신이 그를 뽑으면 나도 얻는 것.' 이런 동반자적 결혼의 의미는 공동리더십과 개혁의 시대를 선도했다.
3. 공동대통령: 엘리노어 루스벨트 시대
백악관에서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처음 몇 달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행정부의 전략과 인물선정을 도왔다. 자신과 자신만의 이슈에 헌신할 유능한 참모진을 구성했다. 언론 장악력도 대단했다. 인사와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의료개혁안도 안정되어 갔다. 사실 초기에 흔들린 것은 힐러리가 아니라 클린턴이었다. 대통령 부부 중 한 명이 잘 나가면 다른 한 명은 실패한 것처럼 언론이 인식하는 그런 패턴이 계속되는 것 같았다. 1992년 캠페인이었던 '하나 값에 두 개'를 전략적으로 그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빌 클린턴은 아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전례 없는 적극적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런 위임은 힐러리가 어떻게 사무실을 구성했는지, 자신의 일을 선임자와 어떻게 연결했는지, 대중에게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명문 여대와 아이비리그 지성인답게 힐러리는 전임 퍼스트레이디들의 역사를 먼저 공부하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이 역사연구는 '엘리노어의 정신을 따라했다'고 풍자한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 덕분에 심야 개그쇼 소재로 전락해버렸다. 그래도 처음부터 클린턴 부부는 퍼스트레이디의 이런 선구자적 역할을 백악관과 행정부, 나아가 미합중국에 있어서 더 폭넓은 개혁과 현대화의 한 요소로 바라보면서 역사의 빗장을 풀기 위해 도전했다는 것은 분명했다. 빌 클린턴은 43%의 지지율 밖에 얻지 못했지만 대통령 부부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해준 것처럼 느꼈다. 그들은 인물보다 이슈를 강조하고, 언론에게 뻣뻣하게 굴고, 민주당 리더십을 복원하고,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를 만들고, 힐러리가 '60미니츠'에 요구했던 '사적 영역'을 개선하고, 공동대통령직을 구축할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믿었다.
1987년 한 기사에서 처음 언급된 공동대통령이라는 용어는 1993년에는 9만 2천 회 이상 등장하였다. 힐러리의 전임자, 바버라 부시는 이 용어로부터 물러섰지만 클린턴 부부는 받아들였다. 바버라 부시는 1989년 백악관으로 입성하면서 미국 정치와 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온 전임자 베티 포드, 로잘린 카터, 낸시 레이건과 달리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버라 부시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선출직이 아니므로 정치이슈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선출된 대통령이라면 내가 지금까지 남편을 위해 해준 것을 이번엔 그가 내게 해줄 것을 바랄 것입니다.' 1950년대 마미 아이젠하워(Mamie Eisenhower)의 '아이크가 국정을 요리할 때 나는 양고기를 요리한다'는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부시 부부는 가정과 일,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전통적으로 구분하는 태도를 지지했다. 바버라 부시는 남편에 대해, "나는 그의 사무실에서 어슬렁거리지 않고 그도 내 영역에서는 어슬렁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