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주의?
알브레히트 메츠거 지음 | 푸른나무
1 이슬람주의란?
이슬람주의란?
이슬람주의는 근 현대에 서구식 정치 경제 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이슬람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때로는 과격한 근본주의적 이슬람을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맥락에서는 이슬람 운동, 그냥 이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슬람주의에 대한 입장은 두 진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슬람을 옹호하는 입장으로서 이슬람이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테러리스트적 이슬람주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테러리스트적 이슬람주의는 이슬람 세계가 서구의 식민지 침략으로 짓밟히고 억압당한 역사적인 상처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정치적 문제라는 것이다. 다른 쪽 견해는, 이슬람이 그 탄생부터 생래적으로 폭력적 성향을 보여 왔다고 주장하며 지하드(성전聖戰)는 이슬람의 본질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미국과 같은 서구 국가들과 이슬람주의 사이의 갈등을 '문명의 충돌'로 보고, 이와 같은 갈등은 이슬람이 조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주의는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와 온건한 이슬람주의, 곧 세속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이슬람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급진적인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의 금욕주의와 이분법적인 세계관 말고도 과거에 이슬람권 지역이 서구 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수탈당하고 억압당했다는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역사적 귀결로서, 곧 서구는 악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의 도움으로 서구라는 악에 대해서 투쟁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힘의 신학(Theoligy of Power)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대다수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함으로써 한때 적이었던 대상과 동맹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장점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터키의 이슬람주의자다.
Issue : 강대국의 중동 정책과 아랍의 분열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은 패전국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강제로 분할·해체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터키, 이란, 아랍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터키는 1923년 연합국으로부터, 이란은 1919년 영국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는 1932년 영국으로부터, 시리아는 1941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레바논은 194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팔레스타인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에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를 따로 세울 것을 제안하는 결의안이 통과되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수립이 선포되면서 분쟁의 화약고로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중동아시아는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손에 의해 넘겨졌는데, 소련은 부동항의 확보와 혁명 수출의 전진 기지 확보, 서방 세계로의 석유 공급 저지 전략, 미국은 소련의 남하정책의 저지, 중동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 이 지역에서 파워게임을 불사함으로써 중동아시아는 여전히 서구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적인 사정은 급진적 이슬람주의자들이 서구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과격한 테러리스트적 태도를 견지하게 하고 있다.
이슬람 의식의 세계화 이슬람은 민족국가를 거부하고 모든 남성 신도의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로서 이슬람 의식의 세계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슬람 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민족적 특성이 형성되어 많은 나라들이 국가별 민족주의 세대로 빠르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국경을 초월한 형제애를 강조하는 근본적인 특성 때문에 지구화 시대에 특히 삶의 터전에서 뿌리가 뽑힌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는 모델로 안성맞춤이었고 지난 20년간 그 무엇보다도 이슬람주의는 뿌리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고향을 제공해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민족주의가 이슬람 세계에 팽배함으로써 이슬람주의의 세계화가 소멸되는 듯했지만, 1979년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진군함으로써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슬람주의가 재활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슬람 세계에 통일전선이 형성된 것인데, 이때 지하드 이념으로 무장한 무자헤딘(민병대로 구성된 이슬람 게릴라)이 소련에 대항해서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1992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이슬람 세계는 지하드(성전聖戰)의 결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지하드 이념은 이슬람의식의 세계화에 대한 사상적 받침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9·11 사태 전후에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서구에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이슬람권 사람들에게 지하드 이념이 통일된 가치관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서구 여러 나라에서 문화적으로 동화되지도 못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 취급당함으로써 소외감과 이질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었는데, 이런 소외감과 이질감은 서구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게 되고, 이와 같은 반감이 응결되어서 폭발한 것이 9·11 사태였다. 9·11 사태 이후로 지하드 이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이슬람주의의 정체성 확립 운동으로 강화되었으며 이 정체성 확립 운동이 바로 이슬람주의 세계화로 이어진 것이다. 프랑스의 이슬람 학자 올리비에 로이는 "알카에다 추종자들, 1993년과 2001년 사이에 죽거나 체포된 빈 라덴의 추종자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대부분 고향을 잃은 자들로서 서구적인 교육을 받았고, 고국에 있는 가족과 관계를 끊었으며, 지구적인 세계, 즉 이슬람 의식이 보편화된 세계에 살고 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의 탄생 _ 서구의 양면 정책 2004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칼럼니스트 라흐만 알 라시드는 〈중동〉이라는 신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을 만한 논설을 썼다. 라시드는 "지하드 이슬람주의가 무슬림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이슬람이 혼자서 지하드 이슬람주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지하드 이슬람주의를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서구 동맹국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기까지만 해도 이슬람주의를 지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유럽은 자기들의 정치적 구상에 들어맞는 한은 중동 국가들이 이슬람주의로 연계되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았다. 예로 그 어떤 나라보다 「쿠란」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중동에서 미국과 가장 긴밀한 동맹국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더구나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를 확보해야만 국가 경제적인 필요성이 있어 이 동맹관계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띤다.
한편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군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소련에게 당했던 치욕을 설욕할 기회를 여기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소련에 맞서서 투쟁했던 아프가니스탄의 저항 세력 무자헤딘(Mujahedin)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아랍 세계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모집하여 힌두쿠시로 실어 보냈고, 이슬람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과격한 자들을 선택하여 전쟁에 투입했다. 이러한 미국의 지원 아래 무자헤딘은 한때 소련을 몰아내고 승리하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탈레반 정권에 의해서 무자헤딘은 축출되었고, 실업자로 전락한 채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된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 기술을 배웠고 지하드 이념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이들은 이제 테러리스트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하드 이념으로 의식화한 채 과거의 후원자였던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된 것이다.
모두가 테러리스트는 아니다 _ 테리리즘 저편의 이슬람주의'이슬람주의는 호전적'이라는 관념이 서구 사회의 통념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슬람주의자들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이슬람주의는 과격 단체로부터, 개혁 지지세력,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에 이르기까지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다양한 운동이며, 이들 대부분은 각각 자국에서 활동하며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슬람주의와 관련하여 한 나라의 정치 체제가 민주적일수록 그 나라의 이슬람주의자들도 그만큼 민주적이라는 규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근본적인 이념은 반민주적이며, '신의 편(헤즈볼라)'과 '악마의 편(히즙 알 샤이탄)'만이 존재하는 흑백 논리가 있을 뿐이고, 다양한 견해와 서로 다른 입장을 포용하는 다원주의에 맞서 신의 뜻에만 복종하는 지상 낙원을 세우고자 하는 획일주의를 제시한다. 그러나 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이념은 현실성이 없는 이상임을 깨달았다. 급진적 이슬람주의(하산 알바나의 무슬림 형제단, 이집트 이슬람 원리주의의 운동)가 세력을 떨쳤던 이집트에서도 이미 30여 년 전부터 비민주적 정권에 대항한 시민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시민운동에 편승하여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부는 실용주의로 전환함으로써 다원주의적으로 노선을 바꾸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인 지각 변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서 정치 구조를 개방적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1990년에는 알제리, 1993년에는 예멘에서, 1990년에는 요르단에서 자유 투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처럼 급변해 가는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 이슬람주의자들 가운데 실용주의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이 선거 참여를 지지하고, 흑백논리라는 이분법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공생과 화합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터키를 꼽을 수 있는데, 터키에는 50년 넘게 다당제 민주주의가 존속하고 있으며, 2005년에 들어 절대 다수파 정당이 된 이슬람정당(정의발전당, AK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그 어떤 세속 정부보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민주적 개혁을 수행하고 있다.
2 중동 각 국의 이슬람주의
'뿌리 뽑으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_ 알제리알제리는 소련의 붕괴 후 아랍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행렬에 합류한 국가였다. 집권 중이던 민족해방전선(Front the Liberation Nationale, FLN)은 정당, 독립 노조, 언론 출판에 대한 자유까지 허용했다. 복수정당제가 인정됨으로써 1990년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로 이슬람주의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ront Isamique du Salut, FLS)이 FLN을 누르고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 경우에 민주주의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이슬람 율법에 근거한 국가를 세우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군부를 자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부는 무력으로 선거를 무효화함으로써 군사최고평의회를 통해 임시정권을 수립하고, 부디아프를 대통령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집권당 민족해방전선과 이슬람주의와의 격렬한 투쟁, 곧 '이슬람주의 뿌리뽑기' 전략을 수행하고자 하는 군부와 '이슬람주의를 지키려는 자들'과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극이 '뿌리 뽑으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벌어졌는데, 특히 이슬람 테러집단들은 온 가족, 온 마을을 몰살하고,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학살했으며, 이 테러집단들의 무차별성과 잔인성에 대해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시아파 이슬람주의의 융성과 몰락 _ 이란이란의 정치는 왕정 체제였는데, 미국을 등에 업은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이 자국 내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1963년에는 백색 혁명을 강행함으로써 국민 경제를 악화시키고 결국, 대중이 등을 돌리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국왕의 측근들은 더 부해지고, 정부의 부패는 극을 향해 달렸으며,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고, 국민들의 대부분은 빈궁의 극한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슬람 성직자를 중심으로 반 백색 혁명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결국 1979년 국왕은 이집트로 망명하게 되고 국외로 추방당했던 호메이니가 귀국하여 1979년 2월, 혁명 정부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호메이니와 그를 지도자로 옹위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이란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바탕을 둔 이슬람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하메네이가 후계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 신정 체제가 이슬람 전제주의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호메이니의 공식 대리인으로 있다가 가택연금을 당했던 몬타제리(AYatolla Sheikh Hussein Ali Montazeri, 1923~ )를 중심으로 강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보수파라 일컬어지는 이슬람 혁명의 수호자들과 이슬람 공화국을 세속화시키려는 개혁파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물밑에서 진행 중이다.
지하드에서 의회로 _ 레바논헤즈볼라는 중동에서 가장 잘 알려진 레바논의 이슬람주의 조직이다. 또한 이 조직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이 알카에다와 더불어 골수 테러 조직으로 여기는 단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헤즈볼라는 알카에다와 달리 변신을 시도함으로써 현재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걷고 있다. 과거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어 왔던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을 대표하는 '아말 민병대'로서 세속적인 성격이 강한 레바논의 저항운동 단체였다. 헤즈볼라는 수년간 이스라엘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한때 이스라엘 군대를 레바논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동에서 가장 현대화된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전쟁하는 것은 무모한 일임을 깨닫고 실용주의적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헤즈볼라의 변화는 군사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차 정치·사회적으로도 이루어졌는데, 전에는 이교도적이라고 생각하여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이슬람 혁명만을 주장했었지만 그 혁명의 창 끝을 거두고 스스로 존경받는 의회주의자로 전환함으로써 이전에 적대적이었던 정치가나 정당과도 연대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주의의 민주 _ 터키터키가 중동의 다른 아랍 국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터키에는 극단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의 세속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슬람주의가 민주적 경기 규칙에 적응한 가장 좋은 본보기가 터키인데, 터키는 극단적인 사태를 겪지 않고 평이(平易)한 방법으로 이슬람 정당이 독자적으로 집권당이 되었다. 터키 공화국의 세속주의는 적극적인 세계관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진보는 달성할 수 있으며, 국가는 이러한 진보를 담는 그릇 또는 창조자라는 것'이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신념이었다. 여기서 이들이 달성할 진보의 모델은 서구 문명이며,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대화의 걸림돌인 종교의 뿌리를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와 21세기 초, 지방 선거와 전국 선거에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승리하게 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 시장 선거에서까지 이슬람주의자가 당선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이 여전히 케말주의 노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케말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군부의 강력한 감시가 있고, 스스로의 선택이기도 하다.
3 이슬람주의의 미래
미국과 새로운 제국주의미국이 세계무역센터와 국방성을 공격 당한 뒤 배후 세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지목하자 전 세계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2002년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고 중동에 민주주의 길을 열어 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이 제국주주의적 목적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적어도 중동 지역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포린 어페어(Foreign Affairs)〉 지는 1993년 전 미 국방 장관이었던 제임스 슐레진저에게 다른 나라에 민주적 정부 형태를 가르치는 것이 미국에 무슨 이익이 되는지를 물